누가복음 20:1-18 읽기

1-8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던 어느 날, 기쁜 소식을 전하실 때,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이 장로들과 함께 예수께 와서 따졌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누가 이런 권한을 당신에게 주었습니까?”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난 것이냐? 사람에게서 난 것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의논하였다. 그들은 하늘에서 났다고 말하면 요한을 왜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났다고 말하면 요한을 예언자로 믿고 있는 백성들에게 돌을 맞을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났는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하고 답하셨다.

9-18 예수께서 백성에게 다음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오랫동안 멀리 떠났다. 포도를 거둘 때가 되어서 포도원 주인은 종 하나를 보내 포도원 소출 가운데서 얼마를 소작료로 받아오게 하였다. 그런데 농부들은 그 종을 때리고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주인이 다른 종을 보냈다. 농부들은 그 종도 때리고 모욕하고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주인이 세번째 종을 보냈더니 농부들은 이 종에게도 상처를 입혀서 내쫓았다. 결국 포도원 주인은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기로 하였다. 주인은 농부들이 자신의 아들은 존중하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농부들은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보고 서로 의논했다. 상속자인 아들을 죽여버리면 포도원을 자신들이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바깥으로 내쫓아서 죽였다. 이제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주인이 와서 농부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라는 기록된 말씀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셨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 돌 위에 떨어지면, 그는 부스러질 것이요, 그 돌이 어느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 종교지도자들과 지배층 사람들은 예수께 무슨 권한으로 백성들을 가르치는지 물었다. 예수는 즉답 대신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났는지 반문했다. 다시 말해 요한이 무슨 권한으로 백성에게 세례를 주었는지 그들에게 되물은 것이다. 요한의 세례를 하늘에서 난 것이라고 인정하면, 예수의 권한도 인정할 수밖에 없어, 지도자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예수께서도 무슨 권한으로 복음(기쁜 소식)을 전하는지 대답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  예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자신이 주인 아들의 권한으로 기쁜 소식을 전한다고 간접적으로 말씀하신다. 곧 자신의 권한이 하늘로부터 왔음을 분명하게 밝히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나라의 머릿돌이라고 덧붙이신다. 성도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 그렇다고 성도가 성전을 짓는 건축주는 아니다. 성도는 건축가가 (집을 짓는 사람들이) 될 수는 있어도, 건축주는 한 분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건축주 하나님은 아들, 곧 성자 예수를 거룩한 성의 (하나님나라의) 머릿돌로 삼으셨다. 성도는 교회의 지체요, 머리는 그리스도시다. 마태는 집을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을 집 모퉁이의 머릿돌로 삼은 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람의 눈에는 집을 짓는 것은 건축가들이 하는 것 같지만, 집은 건축주의 설계대로 지어진다.

// 종교 지도자들과 지배층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권한이 주어진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이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 할 성도의 일원이다. 교회의 건축주는 하나님이며,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시다. 교회에 속한 성도는 직분을 떠나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사람들이다. 성도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되는 권세가 아니다!

누가복음 19:28-48 읽기

누가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심을 반복적으로 상기 시킨다. 예수께서는 앞장서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셨다. 예수께서 올리브 산이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오셨을 때 제자 두사람을 보내시며 말씀하셨다. “맞은쪽 마을로 가거라. 거기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본 적이 없는 새끼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서 끌고 오너라. 혹시 누가 너희에게 왜 푸느냐고 묻거든, ‘주님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십니다.’ 하고 말하여라.” 보내심을 받은 두 제자가 가서 보니,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다. 두 제자가 나귀를 푸는데, 그 주인들이 그들에게 그 새끼 나귀를 왜 푸는지 물었다. 두 제자는 예수께서 일러주신 대로 ‘주님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십니다.’ 하고 대답했다. 두 제자가 그 새끼 나귀를 예수께 끌고 와서 자기들의 옷을 나귀 등에 걸쳐 얹고서 예수를 태웠다. 예수께서 탄 나귀가 진행할 때, 제자들이 자기들의 옷을 길에 깔았다. 예수께서 올리브 산의 내리막 길에 이르셨을 때, 제자의 온 무리가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하늘에는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는 영광!” 무리들 중에는 바리새파 사람들도 있었다. 바리새파 사람 몇이 예수께 “선생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도착하자,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셨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이 (예루살렘 주민들이) 평화의 예수를 알았으면 좋을 터인데, 그 일을 보지 못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포위당하고, 예루살렘 주민들과 자녀들이 짓밟히고,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찾아오신 때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는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다. 예수께서는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에 기록하기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는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지도자들은 예수를 없애려고 논의했으나 방도를 찾지 못했다. 백성들이 예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 예루살렘은 평화의 마을이다. 평화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라고 정리한다. 이런 하나님의 나라의 왕으로 오신 예수. 정복자의 모습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다. 예수께서는 입성하시기 전에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다. 평화의 마을이 그 속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평화의 왕을 기대하지 않고, 병거를 타고 입성하는 개선장군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리라. 더군다나 예수께서는 (육적) 평화의 마을이 함락되고, 그 중심에 있는 성전이 무너질 것을 아셨기 때문에 더 슬프셨을 것이다.

//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는 제일 먼저 성전에 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다. 장사는 주인이 없을 때 하는 것이요, 주인이 있을 때는 주인과 함께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는 것이 종들이 하는 일이 아니었던가? 물론 주인이 없을 때라도 종은 정의와 공의로 장사를 해야 하지만. 하여간 예수는 성전에 하나님을 주인을 모시지 않음에 진노하셨다. 평화의 마을에, 그것도 평화의 왕을 모셔야 하는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꾸짖으신다.

// 성전을 회복하는 길은 결국 말씀을 가르치는 것 밖에 없다.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가깝지만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다. 백성들은 모두 예수의 말씀을 열심히 들었지만, 오히려 장사의 잇권을 빼앗긴 종교지도자들과 지배층 사람들은 예수를 없앨 계획을 세웠다. 평화의 마을에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누가복음 19:11-27 읽기

(삭개오의 집에서,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하고 말씀하신) 예수께서 다음의 비유를 덧붙이셨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자, 당장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날 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바로잡고 싶으셨을 것이다.

[귀족 출신의 어떤 사람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려고 먼 나라로 길을 떠날 때, 종 열 명을 불러 한 므나씩 주고서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를 하라고 명령하고 떠났다. 사실 시민들은 그 귀족을 미워해서, 먼 나라로 사절을 보내, 그 귀족이 자신들의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알렸다. 그러나 먼 나라 황제는 그 귀족에게 왕위를 주었고, 그 귀족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은화를 맡긴 종들을 불러 결산을 하였다. 첫째 종은 주인이 준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벌었다고 결산했다. 주인은 첫째 종에게 착한 종아 네가 아주 작은 일에 신실하였다고 칭찬하고,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었다. 둘째 종은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벌었다고 결산했다. 주인은 둘째 종에게는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었다. 또 다른 한 종은 주인이 주고간 한 므나를 수건에 싸서 보관했다가 가져왔다고 결산했다. 그 종은 깐깐한 주인이 무서워서 그랬다고 덧붙였다. 주인은 그 종을 악한 종이라고 책망하며, 종이 말한대로 깐깐하게 심판했다. 그 종에게서 한 므나를 빼앗아서 열므나를 가진 사람에게 주라고 명했다. 종들은 주인에게, 첫째 종은 이미 열 므나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주인은 종들에게 ‘가진 사람은 더 받게 되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가 가진 것까지 빼앗길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왕이 된 귀족은, 자기가 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사절을 보낸 원수들을 끌어내어 자기가 보는 앞에서 죽이라고 명령했다.]

//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동의어처럼 사용하신다고 적용했다. 그러나 복음을 듣는 사람들은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를 혼돈스러워 한다. 예수를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받는 제자, 무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예수께서 언제와 어느 곳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치셨음에도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자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나타날 줄 생각했다. 예수께서는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소개한다.

//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는 나라다. 종들이 공평하게 대접받는 나라다. 능력과 상관없이 한 므나씩 받는 나라다. 차별이 없다. 그런데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기까지,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반대하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원치 않는 세상나라와 공존한다. 그러나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예수가 다스리시는 (예수가 왕위를 받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

// 예수가 왕위를 받고 돌아오는 것은 정해진 일이다. 종들은, 예수를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은 주인이 왕으로 다시 부임할 때까지 맡겨진 일에 충성해야 한다. 재능과 상관없이 한 므나씩 받았지만 최선을 다해 장사를 해서 남겨야 한다. 남긴 만큼 누린다. 차별인 것 같지만 순종이라는 면에서 동일하다. 장사를 해서 남기라는 명령에 불순종한다면, 주어졌던 한 므나도 도로 빼앗기게 될 것이다. ( 그는 주인의 자비를 알지 못하고, 주인을 깐깐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인에 대해 몰랐기 때문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 종의 신분이 유지 되는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권을 빼앗기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무익한 종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게 된다.)

//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다스림, 예수가 왕이 되는 나라를 거부한 백성들, 곧 세상나라는 주께서 왕으로 다시 오실 때, 사망의 벌을 받는다.

//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께서 다스리시고, 성도들이 예수와 함께 다스리는 나라가 맞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다스림, 예수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는 세력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열 명의 종들과 달리 먼 나라에 사절단을 보낼 정도로 세력과 규모가 더 크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다. 나에게 맡겨 주신 한 므나로 장사를 해서 남기라고 하신다.

// 장사해서 열 므나를 남기고, 다섯 므나를 만들었다는 것은 단순히 이윤을 내서 내 주머니를 (창고를) 크게 했다는 의미보다는, 장사를 해서 다른 열 사람, 다섯 사람에게 한 므나씩을 나누었다고 이해하면 어떨까? 성도의 삶도 이와 같아야 한다. 나를 위해 부를 쌓는 것이 아니라, 나눔으로 하늘에 보화를 쌓아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삶이다.

누가복음 19:1-10 읽기

1-2 예수께서 여리고 성에 들어가셨다. 삭개오가 여리고에 살고 있었다. 삭개오는 세관장이며 부자였다. // 삭개오는 부자 청년 관원과 대비된다. 그냥 세리가 아니라 세관장으로 부와 함께 권력도 거머쥔 사람이었다.

3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무리에 가려서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 // 삭개오는  여리고 입구에서 구걸하던 맹인과 대비된다. 맹인은 육신의 눈이 멀어 볼 수 없었다. 키가 작은 삭개오는 무리에 막혀 예수를 볼 수 없었다.

4 키가 작아 예수를 볼 수 없었던 삭개오는 예수를 보기 위해, 예수께서 가시는 길 앞에 있는 뽕나무에 올라갔다. // 구걸하던 맹인은 예수를 큰 소리로 불렀다. 거듭 불렀다. 삭개오는 예수를 보기 위해 나무에 올라갔다. 둘의 열심을 막을 수 없었다.

5 예수께서 뽕나무 아래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삭개오에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 구걸하던 맹인에게 다가가셨던 예수는 이번에는 뽕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에게 다가가셨다. 맹인에게는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셨고, 삭개오에게는 예수께서 원하시는 것을 말씀하셨다.

6-7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예수의 방문을 기뻐하며 집으로 모셨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고 수군거렸다. // 눈을 뜬 맹인이 예수를 따랐다면, 이번에는 예수께서 삭개오를 따라 삭개오 집으로 들어가셨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예수와 함께 함이 기쁨이다. 죄인이니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한 세리를 의롭다 하신 주님은 자칭 타칭 죄인들을 불쌍히 여겨 주신다.

8 예수를 집으로 모신 삭개오가 주님께 말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 삭개오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일까? 삭개오는 자신의 소유 전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뭔가 부족해 보인다. 그런데 약탈 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선언한다. 뭔가 지나쳐 보인다. 그러나 삭개오의 진심은 분명하다. 주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심이다.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면 삶이 달라진다. 나의 소유는 없어지고 내가 주님의 소유가 된다.

9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말씀하셨다. “오는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 누가는 구원과 하나님 나라를 동의어처럼 사용한다. 삭개오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삭개오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았다고 선언하신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다.

10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 구원자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서 떨어져 나간 백성들을 찾아, 다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신다.

// ‘구원’은 ‘하나님 나라’와 동의어다. 하나님의 다스림이다.

누가복음 18:31-43 읽기

31-34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고 상기시키신다. 그리고 인자를 두고 예언자들이 (구약성경에) 기록한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신다. 인자가가 이방 사람들에게 넘어가고, 조롱을 받고, 모욕을 당하고, 침뱉음을 당하고 채찍질을 받은 후에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인자가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였다. 비유로 말씀하지 않으셨어도 제자들은 알지 못했다.

35-43 예수와 제자들은 여리고 가까이에 이르렀다. 어떤 눈먼 사람이 구걸을 하고 있다가 큰 무리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고 말했다. 그러자 눈먼 거지는 ‘다윗의 자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이 눈먼 거지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으나, 그는 더욱더 크게 ‘다윗의 자손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라고 명하셨다. 그가 가까이 오니, 예수께서 그에게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주님, 내가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그에게 ‘눈을 떠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선언하셨다. 그는 곧 보게 되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예수를 따라갔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 누가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예루살렘의 길은 말씀을 성취하는 길이다. 죽음과 부활의 길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조금도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다는 제자들의 (베드로의) 고백이 무색할 정도다. 제자들은 과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을까? 제자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몰랐던 것이다.

// 예수가 지나 간다는 소리에 눈먼 거지는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거듭 크게 외쳤다.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하고 기도한 세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면 눈먼 거지도 의롭다 하심을 (구원을) 받는 게 당연할 것이다. 불쌍히 여김을 받았다.

// 사람들은 눈먼 거지에게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고 대답했건만, 눈먼 거지는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불렀다.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백문이불여일견’이라고 하지만, 눈먼 거지는 복음을 들은 사람이다.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생기고, 들음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말씀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쳤다.) 그는 예수의 정체성을 나사렛 출신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다윗의 자손에서 찾았다. 보지는 못했지만 들은 것을 믿었던 것이다. ‘오실 이가 당신입니까?’ 하고 옥중에서 물었던 요한보다 낫다.

//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맹인이 육신의 눈을 뜨는 것보다 메시야, 곧 주의 구원을 보고자 했다면 엉뚱한 상상일까? 누가는 맹인이 ‘곧 보게 되어 예수를 따르니’ 라고 기록하고, 마가는 ‘그가 곧 눈을 뜨고 예수님을 따라 갔다’ 라고 기록한다. 믿음의 눈을 뜬 것이다. 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