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5:12-26 읽기

12-16 예수께서 어떤 동네에서 온 몸에 나병이 든 사람을 고치셨다. 온 몸에 나병이 든 사람이 예수를 찾아와 얼굴을 땅에 대로 엎드려 간청하였다. “주님, 하고자 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니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갔다. 예수께서 그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된 것에 대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서 사람들에게 증거로 삼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의 소문이 더욱 더 퍼지니, 큰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들의 병도 고치고자 하여 모여들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외딴 데로 물러가서 기도하셨다.

17-26 어느 날 예수께서 가르치시는데, 갈릴리와 유대 각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교사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예수께서는 (이들이 보는 앞에서) 병을 고치심으로 주님의 능력이 함께시는 것을 드러내었다. 그 때, 사람들이 중풍병에 걸린 친구를 침상에 눕힌 채로 예수께 데려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기와를 벗겨 천정을 뚫고 그 병자를 침상에 누인 채, 무리 가운데 계신 예수 앞에 달아 내렸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네 죄가 용서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예수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고 의하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어찌하여 너희는 마음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셨다. ‘죄가 용서받았다’ 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서 걸어가거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서 어느 쪽이 말하기 쉽냐고 물으셨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중풍병자에게  일너나서 침상을 치워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사람들 앞에서 일어나, 자기가 누웠던 침상을 거두어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집으로 갔다.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으며, 두려움에 차서 말했다. “우리는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 예수께서는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나병환자로 하여금 모세의 율법대로 행하여 사람들에게 증거로 삼으라고 말씀하셨다. 깨끗해짐이 개인적인 사건일 수 있어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회복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수 믿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인 신앙고백으로 구원이 시작되어도, 교회라는 공동체로 부르심을 통해 구원이 완성된다. 사람들은 개인적인 구원에서 머물기 원하는 것 같다. 내가 깨끗해지고 내가 고침을 받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 예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교사들, 율법학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나라를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주님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셨다.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에서는 나병환자의 개인적인 믿음과 달리 그들의 믿음을 본다. 고침을 받은 사람은 중풍병자 한 명이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에 주목하셨다. 예수님은 율법학자/교사들과 바리새파 사람들 앞에서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는 것을 죄가 용서받는 것으로 적용하셨다. 예수께서 이땅에 병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죄를 용서하는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오신 것임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그리고 중풍병자와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죄용서를 선언하신 것은 분명 죄의 용서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예수께서는 종교지도자들이 바로 서는 것이 유대 공동체가 회복하는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바울의 표현을 빌리자면, 믿음이 강한 자들이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는 것, 우리가 이웃을 기쁘게 하여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하는 것이 공동체의 죄가 용서 받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초대 교회가 서는 길이었고, 곧 우리 교회 공동체가 바로 서는 길이다.

// ‘나’의 믿음에서 ‘우리’의 믿음을 생각해 봐야 한다. 침상에 누워지내던 중풍병자가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집으로 갔다. 모든 사람들이 놀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우리는 오늘 신기한 일을 보았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신기한 일은 우리의 기대에 어긋난 일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개인적인 문제로 주님 앞에 나오지만, 주님은 (우리의 기대와 어긋나게) 교회라는 공동체로 우리를 부르신다. 성도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야 말로 신기한 일이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할 신기한 일이어야 한다.

누가복음 5:1-11 읽기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계실 때, 무리가 예수께 말씀을 듣기 위해 밀려왔다. 마침 배 두척이 호숫가에 배를 대고, 어부들은 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두 배중 시몬의 배에 올라, 배에 앉으시어 무리를 가르치셨다. 예수께서 말씀을 그치신 (가르치심을 마친) 후, 시몬에게 ‘깊은 곳으로 나가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라고 말씀하셨다. 시몬은 밤새 애를 썼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즉시 마음을 바꿔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다고 순종했다. 시몬이 예수의 말씀 그대로 하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혔다. 시몬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도와 달라고 불렀다. 그들이 와서 고기를 가득히 채우니 두 배 모두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시몬 베드로는 이것을 보고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려서 말했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베드로와 베드로와 함께 있던 사람들, 특별히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배를 뭍에 댄 그들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 예수께서 시몬의 배에 올라 말씀을 가르치셨기에, 그물을 씻고 있던 시몬은 예수의 가르침을 귀동냥했을 것이다. 귀동냥이었서도 당연히 예수의 가르침이 권위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시몬도 예수를 선생님으로 받아들이고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는 명령에 즉시 마음을 바꿔 순종했다. 그리고 두배를 가득채우고도 배가 가자앉을 지경으로 물고기를 많이 잡자 시몬은 예수를 주로 (주인으로) 받아들인다.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께서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친 사건이 먼저다. 그리고 온갖 병을 앓는 많은 사람들이 시몬 장모의 집에서 고침을 받았고 축귀를 받았다. 그렇다면 시몬이 예수를 모를 수 없다. 주변의 수많은 간증거리가 시몬을 바꿀 수 없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시몬은 형제 안드레의 인도로 예수님을 만났다. 그러나 시몬에게 예수는 선생님 이상은 아니었다.

// 그런데 예수께서 시몬의 삶을 만지셨다.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로 자란 베드로의 전문 영역에 예수님이 도전?하신 것이다. 시몬은 창조주이신 예수께 질 수 밖에 없었다. 많은 물고기를 보고 시몬은 예수를 주인으로 모실 수 밖에 없었다. 피곤에 지쳐 예수의 도전에 ‘아침에, 그것도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그래도 장모를 고쳐주셨으니 한 번은 선생님의 말을 들어줘야지’ 라는 마음은 많은 물고기가 잡히자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주인과 종의 관계요, 그것도 불충한 종, 죄인의 자리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예수께서는 이런 시몬 베드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용서하셨다. 용서받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 베드로가 엎드려서 예수께 말한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번역은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다. “주님, 나에게 판결을 내려주십시오. 나는 죄인임을 자백합니다.” 좀 더 고친다면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어떤 판결(벌)을 내리시더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가 낫지 않을까? (헬라어를 모르니ㅠㅠ) 베드로는 죄가 있으니 벌을 달게 받겠다고 했지만 예수께서는 용서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사도 요한은 첫번째 편지에서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라고 하나님과의 사귐을 정리한다. 이것이 임마누엘이다.  

누가복음 4:31-44 읽기

31-37 갈릴리 나사렛에서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으로 가셔서,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가버나움 사람들도 예수의 가르침에 놀랐다.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가르치고 계시던 회당에 악한 귀신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다. 그가 큰 소리로 예수께 왜 우리를 간섭하냐고 외쳤다.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는지 물었다. 악한 귀신의 영도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악한 귀신의 영에게 입을 닥치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꾸짖으셨다. 귀신은 그를 사람들 가운데 상처 없이 쓰러뜨려 놓고 그에게서 떠나갔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지? 예수가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니 그들이 떠나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귀신들을 쫓아내신 소문이 근처 모든 곳에 퍼졌다.

38-41 예수께서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들어가셨다. 그런데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께 (낫게 해달라고) 청했다. 예수께서 시몬의 장모를 보시고 열병을 꾸짖으셧다. 그러자 열병이 물러가고, 시몬의 장모는 일어나서 예수와 예수와 함께한 사람들에게 시중을 들었다. 해질 때에 사람들이 온갖 병으로 앓는 사람들을 예수께로 데려왔다. 예수께서는 한사람 한사람을 안수하고 고쳐주셨다. 귀신들도 내쫓으셨다. 귀신들은 예수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리질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꾸짖으셨다.

42-44 다음날 새벽, 예수께서는 외딴 곳으로 가셨다. 무리가 예수를 찾아, 마을을 떠나지 마시고 머무시길 간청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 자신이 보내심을 받은 이유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유대의 여러 회다을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셨다.

// 고향 나사렛에서 환영받지 못한, 아니 살기등등한 고향사람들을 떠나신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으로 오셨다. 23절에 의하면 가버나움은 예수께서 이미 이적을 행하신 곳이었다. 누가는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말씀을 가르침’과 ‘축귀’와 ‘치유’로 나눠 기록한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하나님 나라의 복음전파’라고 정리한다.

// 가버나움 사람들도 예수의 가르침에 놀랐다. 그러나 가버나움 사람들의 놀람은 고향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놀란 (이상히 여긴) 것과 달랐다. 누가는 예수의 말씀이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힌다. 고향 나사렛에서는 가르침, 곧 말씀의 권위는 뒷전으로 밀리고,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가 선생이 되었다는 것에 더 놀랐을 것이다. 오늘날도 말씀 자체의 권위는 뒤로 밀리고 설교자의 스펙에 미혹되는 일이 많으니 정말 놀랄 (경악할) 일이 아닌가?  

// 예수께서는 배척 받은 나사렛을 떠나셨기에 환대? 받은 가버나움에 머무실 법도 했다. 그러나 외딴 곳으로 가셨던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물으셨던) 예수는, 자신을 찾은 무리들에게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보내심을 받은 목적이라고 말씀하시고, 유대 여러 회당에 돌아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셨다. 음~ 하나님 나라는 추앙받기 위한 나라가 아니라는 뜻이다. 무리의 뜻대로 예수께서 추앙을 받는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 뜻에 순종하는 나라가 하나님나라다.

누가복음 4:14-30 읽기

14-15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을 입고 갈릴리로 돌아오셨다. 예수의 소문이 사방에 두루 퍼졌다. 갈릴리로 돌아오신 예수께서는 유대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셨다.

16-21예수께서는 고향 나사렛에 오셔서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는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서서,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건네 받아 다음 구절을 찾아 읽으셨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 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돌려주시고 앉으셨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은 예수를 바라보았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방금 읽은 성경 말씀이 회중이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다.

22-30 예수의 말씀에 사람들은 모두 감탄했다. 예수의 은혜로운 말씀에 놀랐다. 그들이 놀란 것은 말씀만이 아니라,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이 소문대로 선생이 되어 돌아왔다는 것에도 놀랐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셨다.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이적도 보고 싶어한다는 것을.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아합 때 삼년 육개월 가뭄 동안 이스라엘에도 가난한 과부들이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시돈에 있는 사렙다 과부에게만 보내신 것과, 엘리사 때 이스라엘에 나병환자가 많이 있었지만 오직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고침을 받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의 지적에 모두 화가 잔뜩 나서 예수를 동네 밖으로 내쫓았다.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가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지나서 떠나가셨다.

//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두루마리에 있는 구절을 읽으신 예수께서 자리에 앉자 사람들은 예수를 주목했다. 소문에서 듣던 이적을 기대했던 것일까? 예수께서는  방금 읽은 성경 말씀이 오늘 예수께 이루어졌다고 짧게 봉독한 말씀을 적용했다. 예수의 말씀에 고향 사람들은 모두 감탄했다. 과연 소문대로 예수의 가르침은 은혜롭고 놀랐다.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가 선생이 되어 돌아오다니.  은혜와 놀람은 잠깐이고 회중들은 또다시 소문대로 어떤 이적을 행할 지 예수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회중은말씀대로, 예수께 주님의 영이 내리시고, 주님께서 예수께 기름을 부으시고, 주님께서 예수를 보내신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눈먼자에게 눈뜸을 선포하는 것과 같은 이적을 기대했다. 몇번을 들었을 성경두루마리나 펴서 짧은 구절을 읽은 요셉의 아들을 예언자로 모실 이유는 없었다. 예수를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도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까 생각했을 것이다. 그저 자기들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는 이적을 행하는 ‘종’이면 모를까?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만난 주인에게 큰 이익을 주던 점을 치는 여종같은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무한한 구원의 은혜를 버리고, 눈앞의 이익만 바라보는…) 예수께서는 이런 사람들의 생각을 아셨다. 예언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로 자신이 예언자이심을 분명히 하신다. 그리고 가난한 중에도 예언자를 섬긴 사렙다 과부와, 부한 중에도 예언자를 찾았던 이방인 나아만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고향이 아니어도, 심지어 이방에서도 예언자를 환영하고 존중하는 곳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회중은 돌변했다. 예수께 고향을 떠나려면 떠나라고 밀어부쳤다. 아니 정말로 예수를 회당에서 끌어내어 벼랑으로 밀어부쳤다. 그러나 예수는 회중들 한 가운데를 지나 자리를 피하셨다. 환영받지 못하면 떠나셨다.

>> 주님은 나의 주인으로 환영받기를 원하신다. 행운을 가져다 주고 재앙을 물리치는 부적이 아니시다. 주님을 내 편으로 삼지 말고, 내가 주님 편에 서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누가복음 4:1-13 읽기

예수께서 성령으로 가득하여 요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다. 그곳에서 사십일 동안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사십일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40일이 다하였을 때는 굶주리셨다. 악마가 예수께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돌을 빵으로 만들라고 말했다. 예수께서 악마에게 성경에 기록된 대로 ‘사람은 빵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라고 대답하셨다. 악마는 예수를 높은 곳으로 이끌고 가서 세계 모든 나라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서, 악마는 예수께 세계 모든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말했다. 악마는 세계 모든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넘겨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악마는 예수가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면 세계 모든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예수께서는 악마에게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라고 대답했다. 악마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말했다. 악마도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이 자기 천사들에게 명해서 너를 지키게 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천사들이 너를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예수께서 악마에게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라고 대답하였다. 악마는 모든 시험을 끝마치고 물러갔다. 악마는 정해진 때가 되기까지 예수에게서 떠나 있었다.

// 성령으로 가득하여도,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만 인도 받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광야로도 이끈다. 예수께서는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40일 동안 악마에게 시험받으시면서 가득했던 성령을 다 소진했다고 상상해 보았다. 금식으로 육신만 굶주리신 것이 아니다. 악마에게 시험을 당하시면서 성령에 이끌릴 수 없는 상황에 처하신 것이다. (금식은 나를 비우는 것이다. 나를 비운다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받아야 하는 것이다. 피동적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육신이 굶주린 상황에서도, 성령이 고갈된 상황에서도 악마의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악마가 모든 시험으로 예수께 성령이 공급되지 않도록 방해 공작을 폈지만, 말씀이신 예수께 말씀은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마의 시험으로 성령의 인도를 제대로 받을 수 없을 때 성도를 지켜주는 것도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된다.

//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면 그 말씀을 떠올리게 하고 그 말씀대로 실천할 수 있도록 보혜사 성령께서 도우신다. 예수께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하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신다. 곧 말씀이 있는 곳에 보혜사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 방법은 결국 말씀을 우리 마음에 두는 것이다. (결국 악마의 모든 시험으로 예수께 충만했던 성령이 다 소진했다는 나의 상상은 말씀이신 예수께는 해당되지 않는다.)

// 예수께서는 기록된 성경 말씀을 악마의 시험을 물리치기 위한 부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말씀대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양식으로 삼으셨고, 예수께서 말씀대로 아버지 하나님만을 자기 주인으로 모셨고, 예수께서 말씀대로 아버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으셨다. 내 안에 거하는 말씀도 나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악마가 있다면 내 안에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결국 마음을 말씀으로 채우는 수 밖에 없다. 악마가 나의 마음에 또아리를 틀지 못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