딤전 4:1-16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모든 일에 유익이 있으며 이 세상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생명까지 약속해 줍니다. [딤전 4:8 현대인의 성경]

 

육체의 훈련과 경건의 훈련의 차이점은 이 세상에서의 삶뿐이냐 아니면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생명까지냐로 확연히 구분된다. 물론 이 세상에서의 삶도 ‘약간’과 ‘모든 일’로 엄청난 차이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문제는 경건은 다분히 영적이어서 그 열매를 눈으로 보기 어렵다. 또 경건은 영성과 또 다른면이 있다. 주어진 말씀에 대한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내주하시는 성령하나님께 순종해서 깨달은 바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입에 할렐루야 아멘이 없어도.

 

졸업식날 아침이다.

 

딤전 3: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며, 자녀와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딤전 3:!2]

세상 도가 이러할 진데 복음은 어떠랴.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하나님나라의 좋은 백성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고자 하는 먼저 집안에서 본이 되어야 하고

집안에서 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기자신을 수양해야 하고

자기자신을 수양하고 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하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성령의 가르침을 받는 먼저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하니

하나님의 말씀안에 있는 지식을 깨달음이라

말씀을 이해해야 알 수 있고

알아야 성령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고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야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을 바르게 한 후에야 절제할 수 있다.

자기 몸을 절제해야 가정을 이끌 수 있고

가정을 잘 이끌어야 하나님 나라의 좋은 백성이 될 수 있다.

하나님나라의 좋은 백성이 되어야 천하가 평안하게 된다.

딤전 1:1-11

딤전 1:1-11

(1111빼빼로 본문이다. 말씀을 대하는데는 이런게 보이니 참 나도 에휴다.) ‘다른 교훈’과 ‘신화와 족보’, ‘이 교훈’과 ‘율법’은 서로 다른게 아니다. 이것들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보다 변론만 토해내거나 사랑없이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헛된 말로 설교만 한다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면 ‘다른’복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이 모든 것들은 ‘율법’들을 지칭한다고 보면 좋을 것 같다.  율법이 원래 주어진 목적 (반복한다면)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고,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실천하고, 선을 이루기 위해 적법하게 사용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음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다른’ 가르침이 된다는 것이다.

건전한 교훈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에 맞는 것이어야 합니다. 나는 이 복음을 선포할 임무를 맡았습니다. [딤전 1:11 새번역]

 

시 92

시 92

시편 90편을 노래한 시인은 마지막절에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라고 두번이나 간구했다. 그런데 시편 92편을 노래한 시인은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기뻐 외친다고 고백한다. ‘우리의 손’과 ‘주의 손’, 그 크기가 다름은 분명하다. 아니 백세인생을 노래한들 영원토록 지존하신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다.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에 감사하는 시편기자의 노래는 시편 1편을 떠올린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1:4~6/92:9). 그러나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다(1:3/92:12-14). 시냇가 대신 하나님의 집에 심겼다고 더 구체화 된다. 늙어도 고목이 되지 않고 열매를 맺는 생명력을 유지한다.

하나님의 집 마당이라고 온갖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낮에는 뜨거운 해와, 밤에는 추위와 싸워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 마당에서는 ‘사람이 낸 꾀’ 대신에 정직함, 정의와 공의가 선포된다. 세상과 다른 점이다. 내 ‘꾀’ 대신 정의와 공의가 선포된다면 그곳은 하나님의 집 마당이다.

 

시 91

시 91

탄탄대로를 노래하는 시는 드물다. 아니 없다. 어느 인생도 탄탄대로만 걷지 않는다. 오히려 공포가 밤에 찾아오고 화살이 낮에 날아드는 개인적인 어려움만 아니라 전염병과 재앙이라는 공동체적 재난까지 겹친다. 구원이란 근본적으로 이런 온갖종류의 환란을 겪지 않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는 것이다. 놀이동산에 있는 귀신의 집처럼 통과가 보장된 길이기에 두려움없이 걷는다. 두려움이 노래로 변한다.

시편기자는 14-16절에서 하나님이 되어 노래를 이어간다.

“나에게 부르짖는 자를 내가 건져주며 나의 이름을 아는 자를 내가 높여주리라. 나를 부르는 자에게 대답해 주고 환난 중에 그와 함께 있으리니 나는 그를 건져주고 높여주리라. 그로 하여금 마음껏 오래 살게 하고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여주리라.”

구원이란 인생 순간 순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인생너머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