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애가 1:12-22

고통중에 괴롭고

몸은 피곤하고 마음은 황폐합니다.

원수에게 넘겨져 갇혔습니다.

청년들, 처녀들에게도 소망이 없습니다.

자녀들에게도 위로할 자 없으니 눈물만 하염없이 흐릅니다.

불결한 자가 두손 들고 기도하나 위로할 자 없습니다.

의로우신 주님께 불순종하는 다음세대에도 소망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도 배신하고 지도자들도 자기 배만 채우려다 의식을 잃었습니다.

오 주님! 이 모든 내우외환은 나의 반역 불순종이 크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나를 위로하는 자가 없습니다. 오히려 나의 고통을 기뻐합니다.

주의 날, 모든 악을 가지고 주 앞에 서는 자들을 심판하소서.

 

시인은 절망의 끝자락에 서서 노래한다. 구원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악이 심판 받는 주의 날을 바라본다. 탄식과 병든 마음만 남았다.

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3)”라고 했다. 우리가 시인보다 나은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리라 (24)”라는 후반절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하여도 주의 날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덧붙인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31).”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주의 날 확인하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애가 1:1-11

애가

긴 시는 어렵다. 더군다나 긴 시의 일부부은 더 어렵다.

슬픔의 노래. 슬픈 이유는

  1. 화려함과 높음이 초라함과 낮음이 되었다.
  2. 사랑하는 사람도 떠나고 친구들도 원수가 되었다.
  3. 포로로 잡혀가고, 잡혀가서도 안식을 얻지 못하고 픽박을 받았다.
  4. 성전을 찾는 사람도 그히고 제자장들은 할 일을 잃었다.
  5. 대적들이 권세를 잡고, 원수들이 형통했다. 대신 자녀들을 포로가 되었다.
  6. 영광이 떠나갔다. 지도자들마져도 도망갔다.
  7. 옛 영화를 기억한들 대적들이 비웃는다.
  8. 조소거리가 되었고 업신 여김을 받았다.
  9. 수치가 내 옷에 그대로 묻어있었는데도 씻지 않아 추락을 자초했다.
  10. 대적이 내 보물을 빼앗았다.
  11. 구차하게 연명하려고 보물을 팔아 먹을 것을 구했다.

이렇게 슬픈데도 하나님을 향해 크게 부르짖지 못하니 얼마나 슬프랴. 이게 다 내 잘못이니 어쪄랴. 기껏 입에 풀칠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밖에 달리 기도하지 못한다. 반대로 뒤집어 보면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1. 부자가 되는 것이고 높은 지위를 얻어 강제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요
  2. 사랑하는 사람에게 위로 받고 많은 친구들과 노는 것이요
  3. 쉴 곳을 얻으며 핍박을 면하는 것이요
  4. 모여 시끌벅쩍 잔치를 하는 것이요
  5. 대적들을 누르고 원수들이 망하는 것을 보고, 죄가 많아도 자신들은 잘되기 바라는 것이요
  6. 영광을 누리며 지도자들이 권세를 얻는 것이요
  7. 옛 영화를 유지하여 대적들의 조롱을 피하는 것이요
  8. 칭찬을 받아야지 업신 여김을 받지 않는 것이요
  9. 더러움을 가려서라도 수치를 당하지 않는 것이요
  10. 보물을 지키는 것이요
  11. 먹을 것이라도 풍성한 것이다.

삶의 기쁨을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서 구하지 않는다. 삼자의 위치에서 보면 슬퍼도 싸다. 그러나 나를 돌아보고, 한국교회를 바라보면 이 슬픔이 나에게 한국교회에 닥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시인은 이게 다 죄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노래한다. 하나님과의 기쁨의 교제은 어디가고 입술에 풀칠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처지가 되었다. 오호 통재라!

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 유씨부인은 세상 사람이 귀히 아니 여기는 바늘이 부러졌는데도 슬퍼 조문을 지었다. 한국교회의 소문도 애가를 부르게 한다. 나의 삶은 어떤가? 누군가 조문을 부르지 않을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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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퍼도 슬퍼도 자신의 죄때문이라는 것을 아니, 자신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는 것을 아니 하나님께 감히 부르짖지도 못한다. 기껏 신음 소리라도 내어서 구한다는 것이 일용할 양식도 아니고 겨우 입에 풀칠이라도 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피골이 상접한 몰골의 이스라엘. 나라의 찬란함도 공주로서의 화려함도 없어졌다. 옛 영화를 기억하는 것 조차도 비아냥거리가 되었다. 지도자들은 도망가고 자녀들은 포로로 잡혀갔다. 이게 다 수치를 옷에 묻히고도 씻지 않은 결과다. 금고의 보화까지 빼앗기고 길거리의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우리도 옛 영화를 기억하기 전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해야 한다. 옷에 묻은 수치를 씻어내야 한다. 죄가 하나님을 떠난 것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말씀에 뿌리 박고 열매를 맺지 않으면, 열매 없는 가지되어 잘리우고 만다. 애가 부를 날이 멀지 않다.

예레미야보다 더 슬프다. 그래도 희망이 있다.

사도행전을 마치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에 관하여 말씀하신 사건으로 시작하고 바울이 로마에서 하나님나라를 전파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친 일로 마무리 되는 사도행전 71일간의 여정이 끝났다.

ㅁ성령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이야기였다. 예수님 승천 후 남은 제자들이 하나되고, 가난한 성도와 부자 성도가 하나되고,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이 하나되고, 유대인과 사마리아 성도들이 하나되고, 유대인과 이방인 성도들이 하나되고, 비헬라인, 원주민에게까지 지경이 넓어졌다.

복음을 믿는 사람도 있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박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 사이에는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이 있었다. 나에겐 모든 겸손과 눈물이 복음의 역동성보다 강하게 다가왔던 71일간의 여정이었다.

전혀 우월하지 않은 복음.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해 박해 받는 자, 핍박 중에도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자들의 이야기였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나라 이야기였다.

사도행전 28:16-31

바울 일행은 로마에 들어갔다. 바울은 감옥이 아니라 군인 한명의 감호아래 셋집에 머물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바울은 피곤이 채 가시기도 전에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울은 자신이 결박당한 이유를 이스라엘의 소망 때문이라고 하였다. 로마에 사는 유대인 유력자들은 바울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고 문안하였다. 다만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유대인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어떤지 듣고자 하여 초청에 응하였다고 하였다.

바울과 유대인 유력자들은 날짜를 정해 다시 모였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바울은 하루종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나라를 증언하였고 구약성경말씀으로 예수님을 믿으라고 설복하였다. 당연히 바울을 가르침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로마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도 바울의 강론은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바울은  유대인들의 (부정적) 반응에  ‘하나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 진 줄 알라 그들은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들으리라’라고 말했다.

바울은 두해동안 셋집에 머물렀다. 바울은 자신에게 오는 사람들을 맞이 하여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쳤다.

드뎌 71일의 사도행전 묵상을 마쳤다.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에 관한 일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시작하여 바울이 하나님나라를 전파한 것으로 맺는다.

예수님의 가르침부터 바울의 전파까지 하나님나라를 , 복음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바울의 복음전파가 뭔가 대단한 것처럼 포장되었던 인상이 싹 사라졌다. 바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함을 배운다. 계획은 사람이 하여도 하나님께서 일을 이루어 가신다. 그래서 말씀은 듣기만 해서는 안되고 듣고 행해야 한다. 보혜사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고,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말씀을 순종할 수 있게 도와 주신다.

사도행전 28:1-15

사도행전 마지막 장이다. 바울 일행은 멜리데 섬에서 구조되었다. 그 섬에는 원주민들, 즉 헬라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살았다. 이들에게도 복음의 능력이 전해졌다.

모닥불에서 독사가 나와 바울의 손을 덥석 물었다. 원주민들은 바울이 죽을 죄를 지었다고 수근 거렸다. 그러나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바울은 멀쩡했다. 원주민들은 바울을 신이라고 말했다. 마가복음 16장 18 절의 성취다.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신의 자녀가 되었으니 신이 되었다는 표현이 틀린게 아니다.

이 일로 바울은 멜리데 섬의 가장 높은 사람 보블리오 집에 초청되어 보블리오의 부친을 열병과 이질로부터 고쳐 주었다. 그 섬의 다른 사람들도 바울에게 고침을 받았다. 언어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복음의 능력이 하나님 말씀만큼 중요하다.

로마로 갔다.

갑자기 드는 생각. 하나님의 뜻은 바울의 제안 처럼 미항에서 겨울을 나는 것도, 선장과 선주의 생각처럼 뵈닉스에서 겨울을 지내는 것도 아니었을 수 있다. 주님은 순풍에 미항을 떠나게 하시고 유라굴라 광풍으로 (겨울동안) 뵈닉스에서 지체하지 않고 로마로, 로마로 배를 쫓아내셨다. 사람이 계획을 세우나 일을 진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이 일로 (멜리데 섬에서의 경험) 으로 비헬라인에게도 (야만, 원주민으로 번역되지만 헬라어를 모르는 사람들로 이해하면 좋다) 복음전파의 필요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스페인이 바울에게 ‘땅 끝’이 되지 않았을까? 언어적 땅 끝이다. 멀리가지 않아도 매일 경험하는 땅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