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8:18-9:6

하나님을 알기 싫어하는 이유는 거짓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를 내었다고 전도자는 깨달음을 정리한다. (전7:29) 사람의 꾀는 악인의 꾀일 수 밖에 없다. 단순하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인데 사람이 꾀를 내어야 한다는 것은 이웃을 속이고 하나님 말씀 듣기를 싫어한다는 반증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우리가 속이는 일 가운데 있다고. 서로 속이는 일을 하다보니 하나님 알기를 싫어한다고. 역으로 풀면 우리가 사랑하는 일 가운데 있다면 하나님 알기를 즐겨하게 될 것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멀쩡히 계신데 우리는 간음하고 반역한다고 고발한다. 서로 속이고 비방한다. 서로를 믿지 말라고 말한다. 지치도록 악을 행한다. 악이 이어진다. 끝이 없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탄식하신다. ‘나를 알지 못하는구나.’ ‘나를 알기 싫어하는 구나.’

오죽하면 예레미야가 하나님께서 머무시는 시온을 떠나 광야로 가겠다고 할까? 억장이 무너진다.

// 결혼할 때 반지 안에 호세아 6:3를 새겼다. 하나님을 알자고. 힘써 하나님을 알자고. 하나님 앞에서 살자고.

렘 7:16-28

오직 내가 명한 것은 나에게 순종하라는 것, 그러면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것, 내가 그들에게 명하는 그 길로만 걸어가면, 그들이 잘 될 것이라고 한 것뿐이지 않았더냐? [렘 7:23새번역]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개역개정]

나는 내 말을 들으라고만 하였다. 그래야 내가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고 하였다. 잘되려거든 내가 명하는 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고 하였을 뿐이다. [공동번역]

우리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고 한다. 문제는 끝만 듣는 것이다. 개역개정이나 새번역이나 역접관계로 문장을 맺는다고 하여도 ‘잘된다’, ‘복’이 끝을 장식한다. 그러다보니 ‘순종’은 조건절에 포함된다. 자연스럽게 잊혀진다. 공동번역은 ‘내가 명하는 길을 따라 걸어야 한다’로 끝을 맺고 ‘잘되려면’이 조건절에 포함된다. 그냥 번역의 차이인데 오늘 아침에는 따져보게 된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와 “복 받으려면 예수 믿어라.” 계속 되뇌이면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만 그런가?

오늘도 하나님은 노하신다. 순종은 없으면서 복 받기만 원하는 백성들에게. 제사로 순종을 대신하려는 백성에게 ‘순종’하라 하신다.

렘 7:1-15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하나님나라에서 살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다.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것은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않으며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나라에서 살 수 있다고 하신다. 십계명의 첫번째가 마지막에 언급된다. 예레미야 때도 이웃 ‘사랑’이 (구약에서는 주로 ‘인자’라 표현된다.) 하나님사랑과 동치다.

그런데 ‘성전신앙’에 빠져 있는 백성들은 무익한 거짓말에 의존한다. 그래서 계명을 어기면서도 감히 구원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구원을 요한복음 1장 12절로 끝내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행사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장 13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에서서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내 아버지가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버지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아버지 뜻대로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접하고 그 이름을 믿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답은 같다.

긍휼이 많으시고 노하기는 더디시며 인자하심이 크다는 하나님의 성품에 의지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이지, 우리의 패역함을 상쇄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성전신앙을 붙잡고 있던 사람들에게 ‘실로의 성막’을 기억하게 하신다. 우리는 ‘무너진 성전’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 예배하러 가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The Old is Better

The old is better.

하나님께서 패역한 유다에게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고 가라고 명하시나 그들의 대답은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다’였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친히 파숫군이 되셔서 ‘자명종’이 되어주시겠다는데도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라고 반응한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또 ‘들으라’라고 하신다. 나라들아, 무리들아, 땅이여 들으라. 재앙을 선포하신다.

나는 바른데 교회는 타락했다라고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진노로 함께 진노하면서 예언할 자격도 없다. 그냥 마음이 아프다. 각교단의 총회에서 들려오는 소리며, 뉴스의 한구석에 빠지지 않는 교역자들의 음행이며, 심지어 선교지에서도 동일한 행음 소식이 들리니 마음이 무너진다. 풀무질을 통해서도 정결케 되지 않는 죄에서 나만 우리 교회만 면책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렸다고 하신다. 닥친 재앙이 그 증거다.

이제라도 옛 길, 선한 길이 어디 있는지 알아보고 그길로 가야하는데, 하나님의 자명종 소리에 깨어나야 하는데…

딤전 4:1-16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모든 일에 유익이 있으며 이 세상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생명까지 약속해 줍니다. [딤전 4:8 현대인의 성경]

 

육체의 훈련과 경건의 훈련의 차이점은 이 세상에서의 삶뿐이냐 아니면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생명까지냐로 확연히 구분된다. 물론 이 세상에서의 삶도 ‘약간’과 ‘모든 일’로 엄청난 차이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문제는 경건은 다분히 영적이어서 그 열매를 눈으로 보기 어렵다. 또 경건은 영성과 또 다른면이 있다. 주어진 말씀에 대한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내주하시는 성령하나님께 순종해서 깨달은 바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입에 할렐루야 아멘이 없어도.

 

졸업식날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