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3:11-26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나은 사람과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 개인의 경건과 능력에 주목하자 베드로가 반문했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언급하고, 부활하신 주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그 이름이 앉은뱅이를 고쳤고, 예수로 말미암은 믿음이 낫게하였다고 선언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의 이름이다. 예수로 말미암은 믿음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 당시 흔한 이름이었을 것이다. 주님만의 이름이 아니었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단순히 소망을 담은 예수라는 이름이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으로 메시야, 그리스도 예수가 되신 것이다. 소망이 이뤄진 것이다. 이 예수가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바로 그 그리스도 예수라고 밝혔다.

그러니 회개하고 돌이켜 죄사함을 받아 새롭게 되라고 한다. 새롭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 예수가 주인으로 오신다. 물론 이 과정들은 순차적이지 않다. 그리스도 예수가 오셔서 이 일을 이루신다.

세상이 왜 우리를 주목하는가? 어떻게 나의 경건이나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능력이 주목받도록 할 수 있을까? 자꾸 내가 세상적으로도 잘 되어야 한다는 유혹이 있다. 내가 경건하고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유혹. 그러나 내게 필요한 것은 경건의 모양이나 능력이 아니다. ‘경건의 능력’이다. 이것은 예수의 이름만으로 가능하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이것이 예수로 말미암은 믿음이다. 능력이 아니라 믿음이 요구된다.

사도행전 3:1-10

제 구시, 오후 세시에 맞춰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으로 갔다. 오순절 성령이 임한 집도 성전일 가능성이 크다. 그때는 제 삼시, 오전 아홉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다같이 모였을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방문한 세계 곳곳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한 것을 듣고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삼천명이 세례받고 공동체를 이룬 후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는데 이들은 어디서 모였을까?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누가는 기록했는데 성전 수용인원은 몇명이었을까? (연구에 의하면 0.42평방미터에 한명씩 서있는다면 성전지역에 약 25만명도 수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하여간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세시 기도시간에 성전으로 기도 (예배) 하러 가다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게 된 사람을 만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해 주었다.

사도들로 말미암아 나타난 기사와 표적(2:43)의 구체적인 예로 기록된 사건이다. 그러나 신앙공동체 내에서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2:44,45)가 기사와 표적의 예가 아니고 무엇이랴. 물질이 아니고 주님이 주인된 사람들의 삶이다.

베드로와 요한으로 말미암은 기적도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물질이 아닌 주님의 이름이어야 함을 교훈한다. 물질을 구하지 말라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가장 좋은 것은 물질이 아니라 성령님이다. 예수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주신다고 행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주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한다는 뜻이다. 그럴려면 주님을 알아야 한다.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성전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에게 억만금을 준다해도 그는 걷지도 뛰지도 찬양할 수 없다. 잘 먹고 잘 마실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나라는 먹고 마시는데 있지않고 의(걸었네) 와 평화(뛰었네) 와 기쁨(찬양했네)이다.

사도행전 2 :37-47

베드로의 강설을 듣고 사람들은 은혜가 아닌 찔림을 받았다. (은혜는 하나님 뜻대로 찔림을 받은 자에게 따라오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감동을 은혜로 착각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

찔림을 받은 (경건한) 사람들은 베드로와 사도들에게 물었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베드로는 회개하여 세례받고 죄사함을 받아서 성령을 받으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회개, 세례, 죄사함, 성령에 대해) 여러 말로 더 설명하고 구원을 받으라고 답했다. 그날 삼천명이 세례받고 신도가 되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고후 7:10앞)

이미 신자인 성도들도 찔림을 받아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해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를 교회로 지어 가시는 방법이다.

새롭게 신도가 된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셨고 제자들은 순종했다.) 서로 육적(떡을 나누고) 영적(기도)으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갔다.

43절부터는 초대교회의 생활상이다. (오후에계속)

사도행전 2:14-36

베드로가 다른 사도와 함께 서서 ‘새 술’ 에 관해 설명했다. 세상 곳곳에서 온 유대인들과 예루살렘 주민 앞에 섰다. 새 술에 취했다구요. 지금이 오전 아홉시니 술취할 시간이 아니라고 했다. 새 술이 아니라 요엘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하나님의 영(성령)이 부어졌다고 담대히 말했다. // 한두사람에게 성령이 한방울 한방울 임한 사건이 있어왔지만 이번에는 온 집에 가득했다.

충만히 부어진 성령이 깨닫게 해 주신것은 마지막 날, 심판의 날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약속이다. 베드로는 주님이 바로 이스라엘이 못박아 죽인 예수라고 소개하고, 생명의 길 되신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고 강설했다. 이 부활의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하셨다고 구약 다윗에게 하신 약속과 다윗이 부른 노래를 인용했다.

베드로와 제자들의 입에서 나온 하나님(나라)의 큰 일은 성령만의 사역일까? 아니면 (치밀한) 준비의 결과일까? 둘 모두라고 하신다.

사람이 너희를 회당이나 위정자나 권세 있는 자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눅12:11-12)

다만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거룩하게 대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진 희망을 설명하여 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답변할 수 있게 준비를 해 두십시오(벧전 3:15 새번역)

사도행전 2:1-13

예수님 승천 후 열흘이 지난 오순절 /그들이/ 다같이 한곳에 모여있었다. /그들이/ 앉은 온 집에 성령이 가득 임했다. /그들이/ 서로 볼 수 있도록 (성령이) 각각 임했다. /그들이/ 다 거룩한(성) 영으로 채워졌다. /그들이/ 다 성령의 (능력으로) 지배를 받아 다른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했다. 그 때

세계 곳곳에서 예루살렘에 순례 온 유대인들이 있었다. 이들이 각각 자기나라 말로 /그들이/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놀랍고 신기해서 서로 이렇게 물었다. “갈릴리 출신 사람들이 어떻게 우리 각 나라의 언어로 말할 수 있지?” 이들은 자기네 나라의 언어로 그들이 하나님의 큰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는 것에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이들은 당황스러운 나머지 그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말했다.

성령 강림은 그들 (제자들) 사이에서는 들을 수 있었고 볼 수 있었다. 바람소리로 들렸고 불꽃으로 보였다. 결정적 증거는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마지막 증거가 기도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는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게 진짜 놀라운 것은 제자들이 (배운적이 없는 나라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일을 말했다는 것이다. 승천 직전까지 이스라엘의 일(세상 일)에 관심을 갖고 있던 그들이 하나님나라의 일에 대하여 말했다는 것이다.

나도 새 술에 취하고 싶다. 그래서 크마애를 잘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하나님의 큰 일’은 크마애를 잘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이 하신다. (아직도 크마애를 버벅거리는 핑계인가) 반박할 수 없는 핑계라고 하더라도, 오순절 성령강림의 초자연적인 역사의 정점은 (방언의 은사가 아니라) 제자들이 ‘하나님(나라)의 큰 일’을 말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령이여 내 입을 열어 ‘하나님(나라)의 큰 일’을 말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