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 :12-26

사도행전 1:12-26의 말씀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갠적으로) 뭔가 어수룩해 보이는 말씀의 적용과 순종이다. 열둘의 열배가 모였다. 일백이십. (가장 적당한 공동체 크기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들/이/ 기도가운데 말씀을 듣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룟 유다의 빈자리를 맛디아로 채운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기 전에도 성령하나님은 역사하신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이 기도 가운데 (엄밀하게 말하면 예배의 삶 가운데) 이루어진다. 기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듣는 통로고,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길이다. 기도는 봉사와 직무의 시작과 끝이다. 성도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가장 기본적인 삶이 기도, 즉 말씀을 듣고자하고, 깨닫고자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예배적 삶이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니라. 각자가 아닌 ‘더불어’가 ‘오직 기도’ 보다 중요하다. /그들이/(복수) 이 말씀듣고 순종하고자 그들이 기도했다.

새해에는 기도의 폭이 넓고 깊어지면 좋겠다.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는 모임도…

작년 마지막 묵상의 핵심은 시 103:22 [나를 지으신 주님, 나를 다스리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온 맘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온 몸으로 (주의 말씀을 행함으로) 주님을 송축합니다.] 였고,

어제 새해벽두 묵상의 핵심은 [성령님은 내가 말씀을 (하나님나라의 일을) 잘 이해하도록 가르치시고 순종하도록 도우신다.] 였다.

다른게 없다. 듣고 순종해야 한다.

사도행전 1:1-11

새해 아침. 치앙마이에서 사도행전으로 시작합니다. (행1:1-11)

누가는 복음서를 예수님의 승천 기사로 마쳤다. 그리고 사도행전을 십자가 후 예수님께서 친히 부활을 증거하시며 사십일 동안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 일을 말씀하셨다고 시작한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승천기사로 끝맺으니 친히 부활을 증거하시며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 일을 말씀하신 사십일이 겹치는 기간이다.

// 겹치는 기록, 즉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나라의 일이 중요하다.

예수님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4:26)라고 약속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 일을 가르치셨는데 제자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일에 여전한 관심을 보였다. 예수님은 성령이 임하시면, 보혜사가 오시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하나님나라 일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그리고 승천 하셨다.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아침마다 말씀 앞에 나오는 이유는 성령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기위해서가 아닌가. 증인이 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증인이 되리라 하셨으니 하나님나라 일을 배우고 성령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에 순종하라신다.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롬14:26)이라고 하나님나라 일을 깨달았다. 심지어 갈라디아서 5장에서는 육체의 지배를 받아 먹고 마시는 사람은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 경고한다.

건강도 최고가 아니고 돈도 최고가 아니다. 성령님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 최고다. 성령님은 내가 말씀을 잘 이해하도록 가르치시고 순종하도록 도우신다. 여전히 세상나라에서도 잘되려는 나에게 하나님나라의 일이 우선이라고 하신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게 또 잘) 먹고 마시는 게 (웰빙이) 복이라면 버려야할 인사다. 괜히 영육간에 강건하세요라고 영을 덤으로 끼우지 말라고 하신다. 겉사람은 낡아져야 하고 속사람만 새로와져야 한다.

‘새해 성령 안에서 의와 평화와 기쁨을 누리세요’

시 103:15-

한해가 이렇게 저뭅니다.

15 인생은 마르는 풀이요 시드는 꽃과 같습니다. 한해 한해 겉사람은 후패합니다. 16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만 바람같은 나를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17 주님 사랑 안에 거해야 영생하며, 주의 의를 자손에게 물려 주어야 합니다. 18 그래서 주님의 약속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19 주님이 세우시고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 20 하나님나라 백성들은 (천사들처럼) 말씀을 듣고 순종함으로 주님을 찬양할 능력이 있습니다. 21 대장되신 주님의 군사되어 주님의 명령에 충성하는 것이 왕되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22 나를 지으신 주님, 나를 다스리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온 맘과 (주님의 말씀을 듣고) 온 몸으로 (주의 말씀을 행함으로) 주님을 송축합니다. (시 103)

한해가 이렇게 저뭅니다. 맘은 조금 더 주님과 가까와 진 한해였지만 몸은 여전히 게으른 한해였음을 반성합니다. 새해에는 나를 지으신 주님의 나라 백성으로 온맘과 온몸으로 충성하길 다짐합니다.

빌립보서 2:5-11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5-8)

우리가 품어야 할 ‘이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이’ 마음은 머리에만 머무는 것도 가슴에까지 내려 온 것도 아닌 손과 발까지 내려가 ‘순종’으로 실천된 마음이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형체를 가진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셨고 가장 낮게 사셨다.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영존의 단절인 죽음까지 순종하셨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예수의 이름 (9-11)

(이러므로) 성부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높이셨다. 천하 모든 사람들로 하여름 예수의 이름에 무릎꿇게 하셨다. 그리고 천하 모든 사람들의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받아들여 성부 하나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너무나 어렵다. 영이 형체를 가지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구속함을 당하는 것이다. (상상할 수 없으니 표현도 안된다.) 바울은 기껏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라고 적용했다. (고전 9:19)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사람을 속박하는 것에 자신도 속박시키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물론 영원히 그 속박에 거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이름은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은) 하늘에 속한 사람은 (이 땅에서) 죽으면 영원한 삶을 산다. 그러나

우리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순간 우리 마음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을 수 없게 된다.

‘나의 이름을 높여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아니다.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이렇게 적용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 3:30)

나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에베소서 2:11-18

평강의 왕

매일성경이 성탄의 의미를 묵상하라고 선택한 본문이다. 이방인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유대인과 하나됨을 역설한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됨, 할례자와 무할례자의 하나됨. 먼 데 있는 자와 가까운 데 있는 자의 하나됨.

그리스도는 둘 사이의 막힌 담, 하나님께로 나가지 못하게 했던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기 위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다. 그리고 자기 육체로 막힌 담을 허셨다. 이제 ‘이 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새사람으로 지어져 가야 한다. 할례자/무할례자, 너와 나가 아니라 한 새사람, 우리라고 하신다.  그리스도는 ‘이 둘’이 한 몸으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하나님과 화목 (교제)하길 원하신다. 먼 데 있는 자나 가까운 데 있는 자나 ‘이 둘’이 하나 ‘우리’가 되어 한 성령 안에서 성부 하나님께 나아가길 원하신다.

예수님이 평강(평화, 화평)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다고 우리는 노래한다.  그리스도 주님은 화평이시다. 성도사이와 성도와 성부 하나님 간의 화평을 이루신다. 그리고 우리로 먼 데 있는 사람, 가까운 데 있는 사람들에게 평안을 전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은 성부하나님께 순종하셔서 화평으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우리도 예수님께 순종하여 그리스도로 옷입고 땅 끝까지 (평화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화평! 성탄절에 울려퍼져야 할 노래다.

음!

그러나 세상은 거꾸로 간다. ‘이 둘’이 셋으로 넷으로 각각으로 흩어지는 세상에 산다. 너희는 세상의 정의라 너희는 세상의 공의라. 정의가 맛을 잃고, 공의의 빛을 가리고…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