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5:21-34

마가복음 5:21-34

21-24a 예수님 일행은 배로 다시 건너왔다. 큰 무리가 예수께로 모여들었다. 그 중 회당장 야이로가 있었다. 야이로는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자기 집에 와서 딸에게 안수해서 살려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예수께서 야이로와 함께 출발했다.

24b-34 무리들도 예수를 뒤따랐다. 그 중에 열두 해동안 혈루증을 앓아 온 여자가 있었다. 많은 의사들을 찾아 재산을 다 탕진하기까지 치료를 받았으나 아무 효력이 없었다. 오히려 악화되었다. 이 여자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낫겠다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여자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러자 출혈의 근원이 마르고 여자는 몸이 나은 것을 느꼈다. 예수께서는 자기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셨다. 그래서 돌아서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는지 물으셨다. 제자들은 무리가 많아 누군가 예수께 접촉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손을 댄 여자를 둘러 보셨다. 여자는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예수께 나아와 사실대로 아뢰었다. 예수께서는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안심하고 가거라. 그리고 이 병에서 벗어나서 건강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갈릴리 저편 거라사 사람들이 재물을 좇아 예수를 배척했다면, 갈릴리 이편 유대사람들은 치유를 좇아 예수를  따랐다. 이편이든 저편이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회당장 야이로는 달랐다. 죽을 병에 걸린 딸아이의 구원을 요청하러 예수께 나아왔다.굳이 집으로 오지 않고 말씀만으로 하인을 치유해 달라는 백부장과 비교하면 믿음이 크지는 않지만 야이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기에 딸의 구원을 간청했다. //마가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하는 다른 사람을 끼어 넣는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는 여자다. 여자는 병을 낫기 위해 이미 자신의 소유 전부를 팔았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몸도 병들고 사회적으로도 부정한 자로 고립되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 여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도 나을 수 있다고 믿었다. 마가는 여기서도 ‘낫는다’라는 단어 대신 ‘구원받다’ 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그리고 믿음대로 행동했다. (믿음은 믿는 것에 대한 순종이다.) 예수께서도 “네 믿음이 너 구원하였다” 하고 여자의 믿음에 화답하셨다. //이 두 사건은 예수를 그저 굉장한 순회 치유자로 보는 무리들에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게하는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다. //치유와 구원. 구원은 치유보다 낫다. 치유는 한시적이지만 구원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야이로의 딸의 치유와 혈루병 여인이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마나 해도 나음을 입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대목에서 마가는 굳이 ‘나음’ 대신 ‘구원’이라는 단어를 썼다. 구원없는 나음과 나음없는 구원. 선택할 수 있다면 당연히 후자다. 구원없이는 안식이 없기 때문이다. 안식이란 하나님과 잇대어 사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https://quietwaters.blog/2020/03/12

마가복음 5:1-20

마가복음 5:1-20

1-10 예수님 일행이 탄 배는 거라사 마을에 도착했다. 곧 악한 귀신들린 사람 하나가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맞이했다. 그 사람은 사람들이 더 이상 제어할  없었다. 쇠사슬로 묶어 놓아도 소용이 없었다. 그 사람은 무덤 사이나 산 속에 살면서 소리를 지르며 자해하곤 했다. 그러던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왔던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닊까? 제발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애원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이미 (멀리서) 그 사람에게 “악한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명하셨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의 이름을 물으셨다. 그는 “군대”라고 이름을 말했다. 자신들의 수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들을 그 지역에서 내쫓지 말아달라고 예수께 간청했다.

11-20 마침 그곳에 큰 돼지 떼가 있었다. 귀신들이 예수께 자신들을 돼지들에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간정했다. 예수께서 허락하시자 악한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거의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바다 쪽으로 내리달아 바다에 빠져 죽었다.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마을로 달아낫 사람들에게 이 사건을 전했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러왔다. 그들은 군대 귀신들린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이 들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처음부터 그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이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 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예수께 자기 동네를 떠나 달라고 간청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를 때, 귀신 들렸던 사람이 예수와 함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예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그에게 집에가서 가족에게 주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큰 은혜를 전하라고 하셨다. 그는 떠나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데가볼리에 전파했다. 듣는 사람들이 다 놀랐다.

//예수님은 우연히 거라사 마을로 가시지 않았다. 멀리서 군대귀신들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이미 명하셨다는 것이 그 증거다. 귀신 들린 사람은 적어도 이 천 귀신들에게 사로잡혔으니 스스로 예수 앞에 나오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이방 지역이 아닌가? 그래서 예수께서 친히 찾아가셨다. (그 예수께서 나에게도 (우연히가 아니라 친히) 찾아 오셨다.) //이렇게 군대귀신 들린 사람은 은혜를 받았다. 그러나 군대 귀신들린 사람의 마을 사람들은 굴러 온 은혜를 차버리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귀신에 사로잡혀 살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만몬신에 빠져  살았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듣고도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알아가기위해, 알고 있는 재물을 포기하지 못했다. (예수께서는 천국은 자기 소유 전부를 팔아서라도 사야할 가치가 있다고 비유로 말씀하셨다. ) //임마누엘은 물리적으로 (시공간적으로) 예수와 함께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귀신 들렸던 사람은 물리적으로 예수와 함께 하기를 원했지만 예수께서는 받은 은혜를 전하게 하셨다. 그 사람은 예수의 말씀에 순종했다. 임마누엘은 말씀에 순종할 때 누리는 복이다.

https://quietwaters.blog/2020/03/11

마가복음 4:35-41

마가복음 4:35-4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 저쪽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셨다. 예수 일행은 무리를 남겨두고 갈릴리 반대쪽으로 갔다.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갔다. 그런데 갈릴리를 가로지는 동안 거센 바람이 일어나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물이 배에 가득찼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풍랑으로 죽게 되었는데 어떻게 태평스럽게 주무시냐며 예수를 깨웠다. 예수께서 일어나 바다에게 ‘고요하고 잠잠하여라’ 하고 꾸짖으셨다.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바다는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왜들 무서워 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분이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까지도 그에게 복종하는가?’ 하고 수군거렸다.

//마가는 사건마다 예수께서 하나님(신)의 아들이심을 드러낸다. 갈릴리 바다에서 광풍을 잠잠케 하신 이번 사건도 마가가 1장 1절에서 선언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다. 예수와 이 정도 함께 했으면 제자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믿어야 했다. 제자들이 광풍에 죽게 되었다고 두려워 떤 이유는 제자들이 여전히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증거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과 믿음이 없는 것은 동의어다.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믿음이다. // 믿음이란 임마누엘이다. 그러나 한 배에 타고 있어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다면 그런 믿음은 아무 소용없다. 다시한번 제자들이 좋은 땅이요, 예수님과 같은 배에 탔다는 것이 제자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은혜임을 깨닫게 된다. (같은 배에 있다고 안도해서는 안 된다. 물리적 임마누엘은 한시적이다. ) 다윗처럼 성령을 거두지 말아 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https://quietwaters.blog/2020/03/10

마가복음 4:26-34

마가복음 4:26-34

26-29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땅은 마음 밭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밭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를 맺도록 하는데 마음 밭의 역할은 없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능력때문이다. 바울은 씨를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해석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이다. 성도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싹으로 순종을 시작하지만, 순종이 쌓이면 이삭이요 충실한 곡식으로, 그리고 익은 열매가 된다. //복음의 씨는 뿌려져야 한다. 길가인지 돌밭인지 가시덤불인지 옥토인지 판단하느라 씨를 뿌리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옥토인지 아닌지는 열매로 알면 된다. 말씀의 능력에 의지해야 한다.

30-32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 한알과 같다. 씨는 눈으로 보기에는 미약하다.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은 씨다. 그러나 심긴 후에 자라서 풀보다 커지고 큰 가지를 내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맡큼 크게 자란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늘을 만들어내야 한다. 공중의 새들은 무엇을 의미할까? //겨자씨라도 (말씀을 하나라도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뿌려져야 하는 이유는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나에게 뿌려지고 싹이나고 자라서 커지면 이웃을 위한 그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크기만 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빛은 작은 나에게서도 큰 그늘을 만들어 내실 수 있다. 

33-34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는 알아 들을 수 있는 쉬운 이야기다. 그렇지만 해석은 다양할 수 있다. 예수께서 비유를 해석해 주시지 않으면 예수님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말씀을 읽을 때 나의 해석이 아니라 보혜사 성령하나님의 도우심을 절실하게 구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복음의 씨를 뿌리라고 하신다. 사람들을 길가인지 돌밭인지 가시덤불인지 좋은 밭인지 함부로 헤아리거나 차별하지 말고 씨를 뿌리라고 하신다. 우리는 모든 곳에 뿌리면 된다. 자라게 하시고 열매맺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https://quietwaters.blog/2020/03/09

마가복음 4:13-25

마가복음 4:13-25

예수께서는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비유를 설명하신다. [씨를뿌리는 사람은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길가에 뿌려지는 것들이란 이런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말씀이 뿌려질 때에 그들이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그 말씀을 빼앗아 간다. 돌짝밭에 뿌려지는 것들이란 이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들 속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하고, 그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진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들이란 달리 이런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그 밖에 다른 일의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서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지는 것들이란 이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등불을 침상아래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둔다고 말하신다. 빛은 숨겨 둔것, 감추어 둔 것을 드러내고 나타낸다. 그러니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어라 하고 말씀하신다. 말씀을 그냥 듣지 말고 새겨들어라 하고 말씀하신다. 새결 들은 만큼 새겨들을 말씀을 더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  (새겨들은 말씀을) 가지 사람은 더 받을 것이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라고 하신다.

//열매를 바라지 않고 씨를 뿌리는 사람은 없다. 하늘 농부는 말씀의 씨를 뿌린다.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없이 말씀의 씨를 뿌린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서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다. 열매 맺는 사람이 따로 있다. 그런데 곱씹어보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사탄이 말씀을 빼앗아 가고, 환난과 박해가, 유혹과 욕심이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막는다. 그렇다면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사탄이 가까 할 수 없는 사람들, 환난과 박해에도 담대한 사람들, 유혹과 욕심을 이기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불가능 하다. 그래서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예수 안에서만 가능하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수 밖에 없다. 예수께 가까이 했던 사람들이 비유에 대한 설명을 들었듯이,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에게 보혜사 성령께서 가르쳐주시고 기억나게 해주신다. 한 번 옥토는 영원한 옥토가 아닐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면 열매는 무엇인가?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예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하고 말씀하셨다. 말씀이신 예수께서 이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성도도 이렇게 살아내야 한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께서 사는 것이 열매를 맺는 것이다. 다른 열매는 없다. //말씀을 새겨 듣는 자에게 말씀을 더 주실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새겨듣지 않으면 길가에 뿌려진 씨처럼 사탄이 말씀을 빼앗아 갈 것이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말씀을 새겨 듣는 것이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밖에 없다.

https://quietwaters.blog/2020/03/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