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0:12-24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12)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이다. 송사를 처리할 재판관이 없다는 것은 무죄판결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상처에는 약도 없고 처방도 없다고 반복하신다. 소망이 없다. 목숨만 소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관계도 그렇다. 아무도 (하나님도) 더이상 사랑을 주지 않는다. 왜? (12-14)

악행이 많고 죄가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대적과 원수들이 악행과 죄로 받아야 할 징계를 백성과 자녀된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내렸다고 하신다. 그것도 잔인한 징계를. 하나님께서 내리신 징계니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소용없다고 하신다. 징계로 인한 고통은 모두 다 악행과 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행하신대로 보응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원수들도 징계하신다. 악행과 죄가 많은 백성들과 자녀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징계하시며, 징계의 도구로 사용한 원수들도 저들의 악행과 죄로 그대로 징계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15-16)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징계가운데 황폐한 곳에서 백성들의 상처를 고치신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의사도 재판관도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것이다. 상처로부터 새 살이 돋아나게 하여 고쳐주실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야곱 장막의) 포로들을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다시 사랑를 베푸실 것이다. 황폐했던 곳에 다시 성읍이 건축되고 사람들이 살게 될 것이다. (17-18)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풀어서 세워지는 성읍에서는 감사와 기쁨의 노래 소리가 나올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들을 번성하게 하실 것이다. 존귀하게 하시고 다시는 비천하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들은 예전처럼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굳게 설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벌을 받게 될 것이다. (19-20)

하나님나라가 가까왔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이 그들(백성) 중에 나올 것이라고 하신다. 그 주님이 하나님나라를 다스릴 것이다. 그 주님이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신다. 그리고 그 주님처럼 하나님과 가까이하며 교제할 자가 누구냐고 반문하신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신)이 되신다.  (21-22)

그러나 악행과 죄에 대한 징계가 그냥 철회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기까지 집행된다. 악행과 죄에 대한 징계는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마찬가지다. 끝날에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다. 그 때 가면 깨닫게 될 것이다. (23-24)

// 말씀으로 기록하게 하시고 성령으로 깨닫게 하셔서 우리는 그 때가 아니라 지금도 알 수 있다. 그 때가서 깨달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상처를 고치실 수 있으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고침을 받아야 하고 사랑 베푸심을 받아야 한다. 결국은 하나님께 순종이다. 애초에 하나님께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나라는 (건축)법에 따라 세워질뿐 아니라 정의의 법에 따라 백성들이 사는 곳이다.(18)

예레미야 30:1-11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일러 준 모든 말을 책에 기록하게 하신다. 기록은 두고두고 기억하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의 포로들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할 날이 있다고 하신다. 굳이 “내 백성 이스라엘과 유다”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이어지는 구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무서워 떤다.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심지어 남자도 해산의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겁에 질려있다. 슬프게도 이스라엘과 유다는 이런 환난의 날을 보내야 한다. 그러나 환난이 끝이 아니라고 하신다. 구원함이 있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환난 날에 이스라엘과 유다의 목에서 멍에를 꺾어 버리시고 포박을 끊으시겠다고 하신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다시는 이방인을 섬기지 않으리라고 하신다. (이방신이 아니라 이방인이라고 하신다.) 대신 야훼 하나님을 섬기며, 야훼 하나님이 세우신 왕 다윗의 자손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야훼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환난 날에도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말아야 할 이유는 구원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태평과 안락을 주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야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 임마누엘이 곧 구원이다. 이방은 멸망시키시고 이스라엘과 유다는 구하시겠다고 하신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유다라고 하여도 법에 따라 징계하신다고 하신다. 결코 무죄한 자로만 여기지 않으신다고 하신다.

// 기록된 말씀은 구원의 날이 있다는 것이다. 구원을 소망하라는 것이다. 읽고 또 읽어 구원의 날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뜻이다. 구원의 날에 대한 예언은 (그동안 예레미야는 유다를 대상으로 예언했는데, 아닌가?) 이스라엘과 유다를 포함한다. 나의 종 야곱이라고 부르신다. 결국 이스라엘과 유다는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한다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구원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신다.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할 것이라.’  구원은 결국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다. 구원받은 자도 법에 따라 (끊이없이) 징계를 받는 존재다. 그냥 무죄방면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람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어쩌면 징계가 아닐까? 성도가 통과해야 하는 길이다. 바울은 이어서 “여러분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겪은 바로 그 상심이 여러분에게 이루어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은 열심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게 되었고 의분이 생겼고 두려워할 줄 알게 되었고 그리워하는 마음과 헌신하려는 마음이 생겼고 악을 징벌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공동번역)라고 징계의 유익을 설명한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 18:13) 예수님도 죄인임을 인정한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하셨다.

임마누엘! 하나님과 함께 함이 구원이다.

예레미야 29:16-32

평안을 전하는 선지자들은 포로지에도 있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분명하게 지적한다. 저들은 거짓 선지자들이요 저들의 운명은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사람들 처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상하여 먹을 수 없는 나쁜 (몹쓸) 무화과 같을 것이다. 칼과 기근과 전염병은 불순종의 사람들을 따라 다닌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뿐만 아니라 재앙을 전하는 (참) 선지자들을 꾸준히 보내셔서 불순종에 대해 경고해 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15-19)

예레미야는 제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종용한다. 아니 달래는 것이 아니라 수위를 높여 경고한다. 거짓 선지자 아합과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왕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예언한다. 거짓 선지자 아합과 시드기야는 저주의 대명사가 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어리석게 행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어리석음이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며, 하나님께서 명령하지 않은 거짓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것을 알고 있었다.

예레미야는 느헬람 사람 스마야에게도 말한다. 스마야도 포로지에서 일어난 (거짓) 선지자다. 거짓 선지자는 포로지에서뿐 아니라 예루살렘에 편지를 써서 거짓 예언을 한다. 스마야는 예레미야가 가짜 선지자이니 책망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예레미야가 선지자 노릇을 한다는 것이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포로기간이  장구하니 포로지에서 집을 짓고 살며, 농사짓고 살라고 한 것을 트집잡았던 것이다. 이편지는 스마야가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 제사장에게 보낸 것이다. (골라야의 아들 아합과 함께 언급되었던 시드기야도 마아세야의 아들이었다. 같은 집안 사람인가?) 스바냐가 예레미야에게 편지를 읽어주자 이 편지에 대해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답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느헬람 사람 스마야를 보내지 않으셨다. (스마야는 소명을 받지 않았다.) 스마야는 너희에게 거짓 예언을 해서 너희로 믿게 했다. (스마야는 사명(말씀)도 받지 않았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패역한 말을 한 스마야와 그의 자손들을 벌하실 것이다. 스마야 가문은 살아 남을 자손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실 복된 일 (포로지로부터 귀환?)을 보지 못하리라. (칠십년 안에 스마야 집안 사람들은 다 죽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 (렘 29:23) 거짓 선지자 아합과 시드기야. 이웃의 아내와 간음한 것과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한 것은 동급니다. 간음한 목사와 소명도 사명도 없이 표절한 목사는 동급이라는 뜻이리라.

예레미야 29:1-14

얼마되지 않은 포로기간이었지만 벌써 이국에서 죽음을 맞이한 유다 장로들도 있었다. 그만큼 이민, 그것도 포로생활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에게 가장 간절한 소식은 무엇이었을까? 포로로부터의 귀환에 관련된 소식이었을 것이다. 고향땅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포로기간이 짧지 않을 것이라고 포로로 잡혀간 유다백성에게 편지하게 하신다.

포로지에서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그곳에서 농사짓고 그 소산물을 먹으라고 하신다. 그곳에서 가정을 꾸려 아이를 낳으며 번성하라고 하신다. 심지어 자신들을 포로로 잡아온 사람들과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고 하신다. 포로지가 평안해야 유다 백성들도 평안할 것이라고 하신다. 혹여 (거짓) 선지자와 점쟁이, 꿈쟁이들이 하는 말을 듣게 되면 그것을 믿지말라고 경고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서의 포로기간을 칠십년이라고 하신다. 칠십년이 차야 유다 백성들을 유다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포로기간이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고 하신다.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시지 않는다. 포로지에서도 하나님은 내게 부르짖으라고 하신다. 내게 와서 기도하면 기도를 들어주시고 온맘으로 하나님을 구하면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어디서든) 하나님은 우리들을 만나길 원하신다. 결국은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신다. 하나님을 만나는 자들로 하나님나라를 이루게 하신다.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다시 부르신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 세상에 항복하는 것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다. 하나님은 예배당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세상 한복판에서도 우리를 만나주신다. 천하 어디에서든지 우리가 온맘으로 하나님을 구하면 하나님을 찾을 수 있고 만날 수 있다. 세상 한복판에도 하나님께서는 편지를  보내주신다. 읽고 지켜야할 명령을 주신다.

우리는 세상에 산다. 이제는 세상의 포로다.  하나님께서는 포로지에서도 일상생활을 하라고 하신다. 종교적 열심을 강조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을 종교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집을 짓고 농사짓고 가정을 꾸리라는 것은 다분히 일상생활이다. 일상에서 하나님을 찾고 만나지 못한다면 결국은 죽은 종교다. 신앙이 아니다.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로 사랑을 행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길이다.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이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미래와 희망을 갖는다.

예레미야 28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 하나냐의 이야기를 말해준다. 시드기야 왕 사년 다섯째 달에 일어난 일이다. 하나냐는 하나님께서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으시고 바벨론 왕이 탈취한 성전의 모든 기구를 이년안에 되돌리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거기다가 바벨론으로 잡혀간 여호야긴과 모든 포로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분명히 말했다.

예레미야는 ‘아멘’으로 화답했다. 하나냐의 예언이 성취되면 얼마나 좋으랴! 예레미야 또한 이것을 바라는 바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많은  선지자들은 전쟁과 재앙과 전염병을 예언한다.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거의 없다고 말한다. 선지자는 그 예언의 말이 응한 후에야 참 선지자로 인정 받게 된다.

하나냐는 예레미야가 메고 있던 멍에를 빼앗아 꺾어버렸다. 그리고 다시한번 이년안에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멍에를 꺾어 버리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예레미야는 자기 길을 갔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하나냐에게 가서 바벨론의 멍에가 나무에서 쇠로 바뀔 것이라고 전하라고 하셨다. 모든 나라가 바벨론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심지어 들짐승도 바벨론에게 주셨다고 전하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냐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지 않았고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하나냐가 금년 안에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선지자 하나냐는 그해 일곱째 달에 죽었다.

//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여호와께서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 받게 되리다 (9)”

‘바벨론에 항복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가 예레미야의 주제다. 그리고 나의 묵상은 ‘세상에 항복하라 그리하면 교회가 살리라’로 적용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는 끊임없이 나로 고민하게 한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5)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치심은 평화를 예언하시는 것인지 환난을 예언하시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아 보인다.(분명한가?) 확실한 것은 주님이 세상이 이기셨다는 것이다. 문제는 주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평화를 당연시 하는 교회의 태도다. 주님의 가르침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한다는 것이다.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를 ‘평안하다 평안하다’로 대체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교회가 주류문화인 세상에서 (혹은 교회가 주류인줄 알고) 한동안 살아왔다. 그러나 서구 교회는 이미 주류문화의 자리을 잃고 말았다. 한국도 마찬가지고 (피)선교지에서는 당연하다. 환난을 당하고 있다. 주님은 싸우라고 하지 않으시고 담대하라고 하셨다. 소수자가 된 교회는 이제 심판자의 능력을 잃었다. 옳고 그름을 제시해도 듣는 이가 없다. 소명도 사명도 없는 사역자가 떠들면 더 그렇다.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은 옳은 것을 담대하게 행하는 것 뿐이다. 교회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를 낼만큼 교회가 옳게 행하고 있는가?) 옳은 일을 성실하게 정직하게 (담대하게) 하는 수 밖에 없다. 기한이 찰 때까지. 그러니 여전히 교회에 소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