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6:1-7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도 아니고 그냥 쇠도끼 이야기.

예언자 수련생 (선지자 제자들) 중 하나가 수련원 증축을 위해 요단강 가에서 나무를 베다가 빌려온 쇠도끼를 요단 물에 빠뜨렸다. 도끼를 빠뜨린 수련생이 함께 일하러 왔던 엘리사를 향해 빌려온 도끼를 물에 빠뜨렸다고 하자 엘리사는 어디에 빠졌는지 묻고, 그 위치를 보고받자 쇠도끼가 떠오르는 이적으로 쇠도끼를 건져주었다.

선지자의 동행이 모든 문제를 근원적으로 차단하지 않는다. 여전히 어려운 문제는 생긴다. 그러나 선지자의 동행으로 제자는 문제를 바로 보고할 수 있고 선지자도 문제의 근원을 바로 알 수 있다. 쇠도끼가 떠오르는 이적은 물론 주님이 하시는 일이다. 열왕기의 기자는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도끼가 빠진 위치를 확인할 때만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리라고 불렀다.

주님과 동행하는 인생도 마찬가지다.

열왕기하 5

나아만의 주인이 바뀌었다. 그의 주인은 아람 왕이었다. 자신의 나병을 낫기 위해서도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한편 그 자신도 여럿을 거느린 주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의 말에 순종하여 나병이 깨끗이 낫자 하나님의 사람에게 돌아와 ‘당신의 종’ 이라고 자신을 낮추었다. 열왕기 기자는 철저하게 엘리사라는 이름 대신 ‘하나님의 사람’ 이라고 기록해서 나아만의 주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바뀌었음을 강조한다.

나아만의 신분이 바뀐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아람의 군대장관으로 아람 왕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삶의 주인은 주 하나님으로 바뀌었다. 나병환자에서 평안의 삶을 산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종들에게도 경청한 (온유한) 나아만은 노새 두마리에 실을 흙(땅)만 받았지만 하나님나라를 받은 것이다.

또 한사람 엘리사의 종 게하시의 주인도 맘몬으로 바뀌었다. 맘몬을 주인으로 바꾸자 평안 대신 거짓이 게하시를 주장했다. 결국 게하시는 나병환자로 살게된다.

평안하냐? 고 물으신다.

열왕기하 5:1-14

열왕기 기자는 나아만을 아람 왕의 군대장관으로 크고 존귀한 자, 큰 용사이나 문둥병자라고 소개한다. 주목할 것은 나아만을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라고 소개한 것이다.

주인이 (아람왕이) 나아만을 크고 존귀한 자로 세워준 이유를 기자는 나아만이 아람을 구원한 전쟁영웅 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또한 주 하나님의 섭리아래 이루어졌음을 빼먹지 않았다.

아람을 구원한 전쟁영웅 나아만은 종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는 경청하는 마음의 소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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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말씀을 듣는 것 만큼이나 아래로부터 듣는 것도 중요하다. 여종의 이야기를 나아만이, 나아만의 이야기를 아람왕이 들어주었다.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롭다.

나아만에게는 충성해야 주인인 아람 왕이 있었다. 그는 주인에게 경청했을 것이다. 열왕기 기자는 나아만이 아람을 구원한 전쟁영웅으로 아람 왕에게 존귀함을 받았다고 기록하면서, 이 역시 하나님의 섭리임을 빼먹지 않았다.

나아만의 경청하는 성품은 아랫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신하들뿐만 아니라 포로로 잡아온 여종의 이야기도 경청했다. 이 경청하는 성품이 나병환자였던 나아만을 낫게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는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들의 말도 경청한다.

 

열왕기하 4:44

“여호와의 말씀이 그들이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그가 그들 앞에 주었더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먹고 남았더라.”(왕하 4:43,44)

머리 속의 믿음이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한참 걸린다. 가슴으로 내려온 믿음이 손과발로 전달되는 것은 정말로 쉽지 않다.

내가 먹고 남기고 창고에 쌓아두는 생명없는 삶이 아닌 그들이 (이웃이) 먹고 남기는 생명있는 삶을 살라고 하신다.

좋지 않은 (독이든) 먹거리도 몸에 좋게 바꾸실 것이요, 적은 양의 먹거리도 풍성하게 하실 것이다. 우리 주님은 물로 포도주를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셨다.

주님의 말씀대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열왕기하 4:27

“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그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이르되 가만 두라 그의 영혼이 괴로워하지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하니라.” (왕하 4:27)

자신의 품에서 자신의 아이가 죽었으니 그 어미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평안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글자 그대로 영혼이 괴로왔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들은 평안을 구하나 평안은 댓가없이 주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참 평안을 줄 수도 없다. 소위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어쩔 수 없다. 주님 앞에서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오히려 영혼까지 괴로와 하는 사람을 품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도리다. 우선은 함께 괴로와 하는 수 밖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4:27)

오늘도 보혜사 성령님께 겸손히 도움을 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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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모든 문제에 항상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숨기신 것도 있다. 그러니 오늘도 보혜사 성령님께 겸손히 도움을 구해야 한다. 우선은 괴로움을 받아 주어야 (이해 못해도) 한다. (게하시처럼) 우선 물리치고자 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