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1:23-32

마태복음 21:23-32 (공동번역)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께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하느냐? 누가 이런 권한을 주었는지 물었다. 예수께서는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아 세례를 베풀었는지? 하늘이 준 것인지 사람 준 것인지? 반문하시며 그들이 대답하면 자신도 대답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들은 요한의 권한을 하늘이 주었다고 대답하면 왜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할 것이고, 사람이 주었다고 하면 모두들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으니 군중들이 가만 있지 않을 터였다. 그들은 의논 끝에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도 그러면 대답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음의 비유를 들려주셨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다. 먼저 맏이에게 가서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라고 말했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다고 대답했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둘째에게도 가서 같은 말을 했다. 둘째는 가겠다는 대답만 하고 가지는 않았다.] 예수께서 이 둘중에 아버지의 뜻을 받든 아들은 누구인지 물으셨다. 그들은 맏아들이라고 대답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세리와 창녀들이 그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세례자 요한이 올바른 길을 가르쳐줄 때, 올바른 길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끝내 뉘우치지 않고 믿지 않았다.

https://quietwaters.blog/2023/03/16/

//예수님은 권위를 두아들의 이야기로 풀어나가신다. 아버지의 권위는 아버지라는 지위에 (혹은 신분에) 있지 않다. 아들이 순종할 때 권위가 있다. 불순종할 때는 아버지라는 지위는 있어도 권위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시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때야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한다는 것이 믿음이다. 권위는 권위자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는 바로 권위자에 대한 이 믿음이 없었다. 세례 요한에 대한 믿음을 말씀하시는것 같지만 실상은 세례 요한을 보내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의의 도’로, 다시말해 하나님의 뜻대로 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리와 창녀들은 세례 요한이 의의 도로 왔음을 믿었다고 하신다. 이들은 작은 자들이다. 작은 자들이 믿은 것을 보고 큰 자들인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마땅히 자신들의 믿음 없음을 뉘우치고 믿었어야 했는데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머무르고 말았다. 그래서 작은 자들인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신다. 여전히 아직은 들어갈 기회가 있는 듯 보이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뉘우치지 않았다. 뉘우침이 없는데 어찌 믿음이 있으랴.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나라에 가까워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마태복음 21:12-22

마태복음 21:12-22 (공동번역)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바로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셔서, 거기에서 팔고사고 하는 사람들을 다 쫓아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리리라’ 했는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책망하셨다.
예수께서는 성전 뜰 안에 있던 소경들과 절름발이들이 나아오자 그들을 고쳐주셨다. 아이들은 이 모습을 보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외쳤다,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아이들의 외침에 화가 치밀어서 예수께 아이들이 하는 말이 들리냐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들린다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주께서 어린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주를 찬양하게 하시리라’ 하신 말씀을 읽어본 일이 없느냐고 그들에게 물으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떠나 성 밖에 있는 베다니로 가셔서 밤을 지내셨다. 이튿날 아침, 예수께서 성 안으로 다시 가셨다. 가는 길에 시장하시던 예수께서 무화과 나무 쪽으로 가셨다. 그러나 잎사귀만 무성하지 열매가 없었다. 예수께서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무화과 나무에게 말씀하셨고, 무화과 나무는 곧 말라버렸다. 제자들은 무화과 나무가 바로 말라버린 이유를 예수께 물었다. 예수께서는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면 이 무화과 나무에서 본 일을 할 수 있고 산을 옮겨 바다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에 믿고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벌거벗은 임금님에 나오는 아이들처럼, 성전 안의 아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다윗의 자손 메시야로 알아보았다. 그러나 말씀을 맡은 율법학자들과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면 구하는 것을 다 받을 것이다. 나는 믿는다는 것을 항상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적용한다. 따라서 의심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한다면 구하는 것은 다 받는다.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구한다는 의미다. 그러면 다 받는다는 약속이 허언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https://quietwaters.blog/2023/03/15/

마태복음 21:1-11

마태복음 21:1-11 (공동번역)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러 올리브산 벳바게 마을에 들어섰다. 예수께서 두 제자를 맞은 편 마을로 보내 어미 나귀와 나귀 새깨를 풀어 끌고 오라고 하셨다. 누가 무슨 말을 하면 주님께서 쓰신다고 대답하라고 하셨다. (마태는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라고 기록한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지시한 대로 어미 나귀와 새끼 나귀를 끌어다가 그 위에 겉옷을 얹으니, 예수께서 올라타셨다. (어미 나귀? 새끼 나귀?) 큰 무리가 자지들의 겉옷을 길에다 펴고, 다른 사람들은 나뭇가지를 꺾어 길에다 깔았다. 그리고 앞선 무리와 뒷선 무리가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고 외쳤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시자 온 도시가 들떠서 예수가 누군지 물었다. 사람들은 예수를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나신 예언자라고 말했다.

//숫자 2를 좋아하는 마태. 다른 복음서와 다르게 여리고 소경도 두 사람, 예루살렘 입성 때 나귀도 어미 나귀, 새끼 나귀 두마리다. 어미 나귀와 새끼 나귀를 끌고 왔는데 예수께서 어느 나귀에 타셨는지는 구체적으로 기록하지는 않는다. 새끼 나귀겠지. 마태는 유난히 예언자를 시켜서 하신 말씀의 성취라는 강조하는데, 아마도 ‘둘’이라는 숫자는 사실적 표현보다는 꾸밈을 받는 말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 표현이 아닌가 한다. 마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 입성할 때 환호한 무리도 앞 뒤 두 군중으로 나눈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를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야로 환영/영접하는 모양새지만, 한편으로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처럼 예수를 그저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예언자 정도를 받아들인다. 그러나 어느쪽이든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며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던 여리고 소경과 달리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신들이 바라는 메시야, 자신들이 원하는 예언자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진정한 제자는 주님이 쓰시겠다면 자기 것을 전적으로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한다. 메시야는 나(우리)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부적 같은 존재가 결코 아니며, 내(우리) 귀에 달콤한 말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주객이전도 되어서는 안 된다.

https://quietwaters.blog/2023/03/14/

마태복음 20:17-34

마태복음 20:17-34 (공동번역)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불러 조용히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사람의 아들은 대사제와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사형을 받을 것이고, 이방인들의 손에 넘겨져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어머니를 통해 예수께 주님의 나라가 서면 자기 두 아들이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예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에 그들이 요청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는 하느냐고 물으시며 자신이 마시게 될 잔을 그들도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들이 마실 수 있다고 대답 하자 예수께서는 그들이 자신 잔을 마시게 될 것이지만 좌우 정승자리에 앉는 특권은 아버지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고 답하셨다. 이말을 들은 열 제자가 야보고와 요한 형제에게 화를 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모으시고,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르지만 제자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 값을 치르러 온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일행이 여리고를 떠날 때 큰 군중이 예수를 따라왔다. 소경 두 사람이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사람들이 두 소경에게 떠들지 말라고 꾸짖어도 막무가내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다. 예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들을 불러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들은 눈을 뜨게 해달라고 주님께 요청했다. 예수께서는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들의 눈에 손을 대셨고, 그들은 곧 눈을 뜨고 예수를 따랐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보좌와 자리를 생각했다. 급기야 야고보와 요한은 어머니를 통해 예수께 한자리씩을 청탁했다. 다른 제자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하늘나라에서는 첫째도 꼴찌도 없다는 앞선 가르침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언행이었다. 제자들이야 말로 눈뜬 장님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는 강제로 지배하고 권력으로 내리 누르는 세상의 통치와 다르다고 제자들을 가르치셨다. 하늘나라는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자신이 섬김을 받으로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심지어 목숨을 바치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자비의 나라다. 여리고에서 소경 두 사람을 고쳐주신 사건도 예수께서 자비를 베푸시는 사건이다. 자비를 입기 위한 자격이 따로 있지 않다. 막무가내라도 자비를 입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자비가 베풀어진다. 그리고 자비를 입은 사람은 예수를 따른다. 육신의 눈만 뜬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을 뜨기 때문이다. 하늘나라, 곧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기 시작한다.

https://quietwaters.blog/2023/03/13/

마태복음 20:1-16

마태복음 20:1-16(공동번역)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 [어떤 포도원 주인이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인력시장에 나갔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을 품삯으로 정하고 포더원으로 보냈다. 주인이 아홉시쯤 장터에 나가보니 할 일 없이 노는 사람이 있어 한 데나리온을 품삯으로 정하고 포도원으로 보냈다. 주인은 열두시와 오후 세시에도 장터에 나가, 노는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 주기로 하고 포도원으로 보냈다. 그리고 다섯시에도 나가 빈둥거리는 사람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날이 저물어 포도원 주인은 관리인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품삯을 주라고 했다. 오후 다섯시에 온 사람들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이른 아침부터 와서 일한 사람들은 더 받을 줄 알았는데 역시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그들은 오래 일한 자신들이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며 주인에게 투덜거렸다. 주인은 그들에게 약정한 대로 품삯을 지급했다고 말했다. 한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정했었다고 말했다. 주인은 자신이 마지막에 온 사람들에게 후하게 대한 것이 그들의 비위에 거슬리는지 물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꼴찌가 첫쩨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

//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나라. 이것은 서열이 뒤집힌다는 뜻이 아니다. 공평해진다는 뜻이다. 높은 산은 낮아지고 골짜기들은 메워진다는 뜻이다. 그러니 차별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포도원 주인이신 하늘 아버지의 뜻이다. 그래서 하늘 나라는 모두에게 일용할 양식이 보장되는 나라다. //오는날 이 땅의 경쟁사회는 이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선착순이다. 그래서 앞서지 못하고 뒤쳐지면 게으르다고 노력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그리고 앞선 만큼 보상을 더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공평하다고 신봉한다. 과연 그런가? 차들 타고 앞서 달리는 사람은 뒤에 뛰어오는 사람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기득권을 내려 놓고 함께 걸어봐야 한다. 느려도 함께 걷는 것이 꼴찌가 첫째되고 첫째가 꼴찌 된다는 뜻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