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9:22-35

출 9:22-35

//우박재앙이 내렸다. 19절에서 무릇 들에 있어서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것들에게는 우박이 그 위에 내리리니 그것들이 죽으리라 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오늘 본문에서 우박이 그것들을 치고 꺾었다는 표현은 나오지만 그것들이 죽었다는 표현은 없다. 창세기의 ‘정녕 죽으리라’를 문자적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리라. 하나님의 심판에는 자비가 있다. // 바로는 우박재앙에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옳고 자신과 이집트가 나빴다고 시인한다. 자신이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악인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의 고백이 아니라 입발린 소리였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박이 그치자 바로는 다시 마음이 뒤틀려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지 않았다. 바로의 신하들도 바로 편에 섰다. 신하들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이가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입발린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입바른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출애굽기 9:13-21

출애굽기 9:13-21 (공동번역)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아침 일찍 일어나 파라오 앞에 나가서 히브리인들의 하느님 야훼의 말씀이라 하고 이렇게 전하여라. ‘나의 백성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여라. 내가 이번에는 온갖 재앙을 너와 너의 신하들과 너의 백성에게 내려 온누리에 나 같은 신이 없음을 너에게 기어이 알리리라. 이제 나는 손을 들어 너와 너의 백성을 질병으로 쳐서 땅위에서 쓸어버릴 수도 있지만, 까닭이 있어 너를 남겨두리라. 그것은 너에게 나의 힘을 나타내어 이 땅위에서 나의 이름을 두루 떨치려는 것이다. 그런데 너는 아직도 나의 백성을 업신여겨 내보내려 하지 않으니, 내일 이맘때 나는 우박은 억수로 퍼부으리라. 이집트에 나라가 선 뒤 오늘까지 일찍이 보니 못했던 우박을 내리리라. 이제 너는 사람을 보내어 너의 가축뿐 아니라 들에 있는 것을 안전한 데로 모아들여라. 들에 남아서 미처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나 짐승은 쏟아지는 우박에 맞아 모조리 죽으리라.’] 파라오의 신하들 가운데서 야훼의 말씀을 두려워한 자들은 제 종과 가축들을 집으로 모아들였으나 야훼의 말씀을 허술히 여긴 자들은 들에게 있는 종과 가축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출9:13-21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바로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쳐서 쓸어버릴 수도 있지만, 바로를 남겨 두시는 이유를 바로에게 하나님의 힘을 나타내어 온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두루 떨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도 바로는 듣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의 신하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 하는 자들은 모세가 바로에게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허술히 여긴 자들과 그 결과는 분명 다를 것이다. //성도도 마찬가지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듣기만 하는 자는 어리석으며.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롭다고 말씀하셨다. . //지금까지의 재앙을 겪었다면 (삼세번이 아니라 곱절인 여섯번의 재앙을 겪었다.)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된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 바로의 신하들 중에는 지혜로운 자들 있었다. 그들은 재앙을 피할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허술히 여긴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재앙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 된다는 것을 믿으며 사는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의 약속, 예수의 말씀이 성취된다는 것을 믿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약속 말씀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한다.

출애굽기 9:1-12

출애굽기 9:1-12 (공동번역)

야훼 히브리인의 하느님께서는 모세을 통해 바로에게 말씀하신다. [나의 낵성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여라. 만일 네가 그들을 내보내지 않고 그대로 붙잡아 두려고 한다면 야훼의 손이 들에 있는 너의 가축들, 말과 나귀와 낙타와 소와 양떼를 쳐서 무서운 병이 들게 할 것이다. 그러나 야훼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축을 이집트인들의 가축과 구별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것은 하나도 죽지 않게 할 것이다. ] 야훼께서는 내일 이 땅에서이 일을 이루시겠다고 때를 정하셨다. 이튿날,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다. 이집트인들의 가축은 다 죽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의 가축은 한 마리도 죽지 않았다. 파라오는 사람을 보내어 이스라엘인들의 가축은 하나도 죽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런데도 파라오는 고집을 세워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지 않았다. 야훼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셨다. [가마솥 밑에 붙은 그을음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쥐어라 그리고 파라오 앞에가서 모세가 그것을 공중에 뿌려라 그 그을음이 먼지가 되어 이집트 온 땅에 퍼져나가 이집트 사람과 가축은 종기가 나서 곪아터지게 되리라.] 그들은 가마솥 밑에서 그을음을 긁어 모아가지고 파라오 앞에 나섰다. 모세가 그것을 공중에 뿌리자 사람과 가축은 종기가 나서 곪아터지게 되었다. 마술사들까지도 온 이집트에 번진 종기에 걸려 모세 앞에 나서지도 못했다. 그러나 야훼께서 파라오로 하여금 억지를 부리게 하셨으므로 그는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야훼께서 이미 말씀하신 그대로였다.

출9:1-12
//다섯째 여섯째 재앙.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한다 라는 잠언 29:2 말씀이 떠오른다. 바로가 악인이라는 것은 단순히 포악해서가 아니다. 잠언 29:7에 답이 나온다. 악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줄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이다.) 바로가 백성의 처지를 아랑곳 않는 똥고집을 부렸다는 것이 바로 바로가 악인이라는 증거다. 바로는 이집트인들의 가축이 죽어나가고 백성과 남은 짐승들이 종기로 고생을 해도 아랑곳없이 억지를 부렸다. 이보다 더 악할 순 없다. //이집트 마술사들이 이미 술수를 못부리는 것은 물론이고 마침내 재앙도 피해갈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만은 종기 재앙으로도 직접 치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이런 경우는 재앙이 개인적으로 닥치지 않은 것이 복이 아니라 더 큰 재앙이다. 바로도 종기에 시달렸다면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때로는 여러가지 곤란이 기쁨(복)이 된다. 야고보는 여러가지 시련을 당할 때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라고 권면한다. 바울의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겪는 상심은 회개할 마음을 일으켜 구원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로가 자기 고집에 빠지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셨다. 이보다 더 무서운 심판이 있을까?

출애굽기 8:25-32

출애굽기 8:25-32 (공동번역)

마침내 파라오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 ‘가서 너희 신에게 제사를 드려라 그러나 이땅에서 한발짝도 나가서는 안 된다.’ 하고 말했다. 모세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 제사드릴 때, 이집트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것을 바치게 될 것인데, 그러면 이집트인들이 보는데서 부정한 것을 바치다가는 이집트인들 손에 죽지 않겠느냐며 반문했다. 모세는 우리는 그분께서 명하신 대로 광야로 사흘 길을 나가 우리 하느님 야훼께 제사를 드려야겠다고 파라오에게 말했다. 파라오는 나가는 것을 허락했다. 다만 멀리가면 안 된다고 덧붙이고 어서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했다. 모세는 파라오에게서 물러나는 길로 야훼께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등에가 파라오와 파라오의 신하와 백성에게서 내일까지 모두 떠나게 해달라고 빌겠으니 변덕을 부려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어 야훼께 제사를 드리게 할 수 없다는 말을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모세는 파라오 앞에서 물러나와 야훼께 기도했다. 야훼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등에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파라오는 이번에도 고집을 부려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지 않았다.

출 8:25-35
//가서 너희 신에게 제사를 드려라. 바로는 마침내 이스라엘의 하나님(신)이 더 강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제사는 이집트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기 때문에 이집트에서는 제사를 드릴 수 없다고 말했다. 바로는 할 수 없이 이스라엘 백성이 나가는 것을 허락했다. //고대 근동의 제사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인데, 이때는 아직 모세가 제사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기 전이었는데, 이스라엘의 제물과 이집트의 제물이 크게 달랐을까?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백성이 제사를 드릴 때, 무엇을 왜 부정하게 여겼을까? 야곱이 이집트에 들어갈 때 고센 땅에 거주지로 받은 것과 연관이 있을까? 농경사회 이집트는 가축을 먹거리보다는 (인도처럼)농경의 도구를 숭배했을 수 있고, 반대로 이스라엘에게 가축은 먹거리로 도축거리에 불과했을 수 있다. (가인과 아벨에게도 이런 차이가 있었을까?) //하여간 바로는 등에(파리)가 없어지자 다시 고집을 부렸다. 우리의 신앙도 바로처럼 우리 고집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어려울 때만 주님을 찾는다면…ㅠㅠ 그래서 야고보가 역설적이게도 시험을 당하면 기뻐하라고 교훈하는지도 모르겠다.

출애굽기 8:16-24 (공동번역)

출애굽기 8:16-24 (공동번역)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아론에게 지팡이를들어 땅의 먼지를 치라고 일러라. 그러면 이집트 땅 어디에서나 먼지가 모기로 변할 것이다.] 모세와 아론은 그대로 하였다. 아론이 손에 지팡이를 들고 이집트 땅의 먼지를 치자 먼지가 모기로 변하여 사람과 짐승들에게 달려들었다. 이집트 땅의 먼지는모두 모기로 변하였다. 이집트의 마술사들도 마술을 부펴 그같이 해보려고 했으나 되지 않았다. 모기가 사람과 짐승들에게 달려들었다. 마술사들은 파라오에게 이것은 신이 직접하는 일이라고 고했으나 파라오의 마음은 야훼께서 말씀하신대로 굳어져서 들으려하지 않았다.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너는 아침 일찍이 물가로 나가라. 파라오가 그리로 나올 것이니 그에게 야훼의 말씀이라고 이렇게 일러라. ‘나의 백성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여라. 만일 나의 백성을 내보내지 않으면 내가 등에를 보내어 너와 너의 신하들과 너의 백성을 쏘고 너의 집 안에도 들끓게 하리라. 너희 이집트인이 사는 집이나, 너희가 서 있는 땅은 남은 구석 없이 등에 천지가 되리라. 그날 나의 백성이 사는 고센 땅에만은 등에가 날아들지 못하게 하여 너로 하여금 나 야훼가 이 땅에 있음을 알게 하리라. 이와 같이 나는 나의 백성을 너의 백성과 구별할 터인데 이러한 증거가 내일 일어나리라.’]
야훼께서 말씀하신 대로 행하셨다. 숱한 등에가 파라오의 궁궐과 신하들의 집에 날아들었다. 그리하여 이집트의 온 땅은 등에 등쌀에 쑥밭이 되었다. 마침내 파라오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 가서 이스라엘의 신에게 제사를 드리라고 말했다. 단 이집트를 떠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출8:14-24, 25, 27

//‘공동번역에서 ‘나의 백성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여라’를(20절) 개역개정에서는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하고 번역한다. 곧 예배는 섬김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는 네번째 재앙, 곧 등에(파리) 재앙에서 마침내 ’가서 너희 신에게 제사를 드려라‘ (25절) 하고 모세와 아론을 불러 말했다. 예배를 제사로 이해했다. 바로(사람)의 관점에서는 제사 외에는 신을 섬기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모세도 예배 대신에 제사라는 단어로 바로의 말에 대답했으나, 모세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하려하나이다’ (27절) 라며 제사의 본질이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하는 것(예배)이라고 말한다. //세번째 모기(이) 재앙부터 이집트 술사들은 더 이상 따라하지 못하고 신만이 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네번째 등에(파리) 재앙부터는 이스라엘 거주지 고센땅이 재앙지역에서 제외 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신들과 세상 백성으로부터 구별된다. ////예배란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에 순종하는 삶이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면한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진정한 예배라고 가르친다. 오늘도 삶의 현장에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간하도록 성령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아멘

** 예배하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아바드’이다. 아바드는 ‘일하다’를 의미한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한다는 점에서 ‘섬기다’ 라는 의미도 지닌다. 대상이 땅이면 땅을 섬기다, 즉 경작하다가 되고, 대상이 가축이면 가축을 섬기다, 즉 가축을 돌보다가 되며, 대상이 하나님이면 하나님을 섬기다, 즉 예배하다로 의미가 확장된다. (생각을 깨우는 히브리어 365, 김근주 19번째 단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