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51:45-53

나의 백성아! 나의 백성아! 나의 백성아! 가슴을 울리는 주님의 부름을 귀로 듣는다면 어떨까?

주님은 주님의 백성들에게 바벨론에서 나와 각기 주님의 진노를 피하라고 경고하신다. 바벨론 패망 소식으로 마음을 나약하게 하지 말라고 하신다. 바벨론 편에 서서 싸우지 말라는 경고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지 말라고 하신다.

바벨론의 패망은 주님이 바벨론의 우상을 벌하시는 것이다. 주님과 주님의 백성들이 동일시 된다면 마찬가지로 바벨론 백성과 바벨론 우상도 동일시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벨론의 우상들이 벌받는 것을 바벨론 온땅이 치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백성 모두가 죽는다고 말한다. 천지 모든 만물이 주님이 바벨론의 패망을 기뻐 노래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바벨론은 망치가 되어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굴복시켰다. 이제 바벨론이 굴복당할 차례다. 그러니 바벨론의 망치에서 살아남은 자들아 머뭇거리지 말고 바벨론에서 떠나라고 하신다. 바벨론에서 떠나 주님을 생각하고 예루살렘을 (주님의 나라를) 마음에 두라고 하신다.

예루살렘이 어떤 곳인가? 평안하다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하다가 바벨론에게 수치를 당한 곳이다. 주님의 백성들이 창피함을 당한 곳이다. 그런데도 주님은 다시한번 예루살렘을 마음에 두라고 하신다. 수치와 창피는 이제 바벨론 차례라고 하신다. 바벨론이 하늘 높은 곳에 피난처 요새를 쌓아도 소용이 없다. 결국의 멸망의 산을 쌓는 것에 불과하다. 주님의 말씀이다. 어김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하늘 높은 곳이 아니라 하늘의 하나님께 피난처를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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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인권의 날이라 캄보디아는 쉰다. 12월에 있는 단 하루 공휴일이다. (불교국가라서 성탄절은 공휴일이 아니다.)
 
오늘 본문은 ‘나의 백성아’로 시작한다. ‘나의 백성아’만 반복해서 읽고 또 읽고. 가슴으로 울리는 주님의 음성이 귓전에도 울려지길 소망하면서. 읽고 또 읽고.
 
바벨론은 하늘까지 닿을 듯한 요새를 쌓아 피난처를 삼아보겠지만 주님이 보내는 심판자를 막을 수 없다. 결국 바벨론이 (힘과 부요람으로) 쌓은 요새는 멸망의 산이 되고 만다. 주님은 나의 백성에게 바벨론에 끌려 싸움터에서 방패막이가 되지 말고, 대신 예루살렘을 마음에 두라고 하신다. 영화로왔던 성전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바벨론에게 당한 수치를 기억하라고 하신다. 예루살렘에 마음을 두라는 것은 주님의 경고와 약속을 기억하라는 뜻이리라. 불순종은 패망이요 순종하는 자에게만 소망이 있다는 뜻이리라.
 
(렘51:45-53)

예레미야 51:33-44

(만국이 의지하던) 어미 바벨론이 딸 바벨론이 되었다. 바벨론은 만국을 이끌 선도부로 사용되었는데 교만이 하늘에 치달았다고 주님은 평가 하신다. 바벨론의 교만을 주님은 나를 먹으며, 멸하며, 주님의 것으로 배를 채우고 주님을 쫓아 내었다고 표현한다. 심지어 폭행과 학대를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자신과 주님의 백성을 동일시 하신 것이다. 11절에서 주님은 주님의 성전을 위하여 보복하신다고 말씀하시는데, 결국 구약에서도 주님의 백성과 주님의 성전은 같은 의미다. 다시말해 주님이 주님의 백성과 함께 하신는 것, 임마누엘이 곧 성전이다. 성도들의 모임, 교회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인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의 백성들은 바벨론의 악행을 행한대로 갚아달라고 주님께 송사할 것이고 주님은 백성들의 송사를 들으실 것이다. (바다같이) 많은 물가로 축복하셨던 주님은 바벨론을 사람이 살 수 없도록 그 근원까지 말라버리실 것이다.

더 이상 열방은 바벨론을 어미처럼 의지하지 않을 것이다. 무너진 바벨론에 의지할 민족들은 없을 것이다.

예레미야 51:20-32

바벨론은 자신의 행위대로, 분쇄하고 분쇄하고 분쇄한대로 심판받는다. 그들이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서라고 이해하면 좋지 않을까?) 모든 악을 행한대로 주님께서 갚으신다고 말씀하신다.

바벨론의 멸망을 노래하면서 바벨론을 멸망의 산이라고 부른다. 산은 사람들이 의지하는 곳이다. 시편 121편 기자도 도움을 구하기 위해 산(들)을 향하여 눈을 든다고 노래한다. 그러나 시편기자의 결론은 우리가 아는대로 도움은 오직 천지의 창조주 주님으로부터만 나온다. 바벨론은 결코 사람들의 의지가 되는 산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멸망의 산이다.

분쇄하고 분쇄하고 또 분쇄하는데 사용되었던 망치 바벨론은 황무지가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어김이 없다. 메대가 새 망치가 되어 바벨론을 칠것이고 바벨론은 황폐해져서 더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될것이다. 바벨론의 군사들은 결국 바벨론이 함락되었다는 말밖에 달리 바벨론 왕에게 전할 말이 없을 것이다.

// 우리의 삶은 마라톤이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딤후 4:7)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는 우리의 왕에게 패망이 아니라 완주를 보고해야 한다. 완주하면 주실 면류관을 바라봐야 한다. 모든 것을 다 분쇄할 것 같았던 막강한 망치인 바벨론 (부와 힘)을 바라보고 달려가면 그 결국은 멸망이다.

예레미야 51:11-19

오 드디어 새로운 선도부가 언급된다. 메대 왕이다. 앞장에서는 (50:33)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을 학대한 것이 죄목 중 하나였는데, 11절에서는 주님의 성전을 위하여 보복하신다고 말씀하신다. 억지해석을 하자면 구약에서도 주님의 백성과 주님의 성전을 동일시 할 수 있지 않을까?

주님은 메대를 내세워 바벨론을 멸하시기로 계획하시고 (예언하시고) 어김이 없이 이루신다. 많은 물가는 주님의 축복을 받은 땅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게 받은 재물을 흥청망청 쓰니 파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신다. (많은 물가에서[축복의 땅에서] 많은 물소리에[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니) 바벨론은 메뚜기 떼 같이 무수한 적군들의 소리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주님은 창조주시다. 그에 반하여 우상은 생기가 없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만든 우상 때문에 창피를 당할 것이다. 우상들은 헛것이다. 조롱거리다. 심판의 날 사람이 만든 신상, 즉 우상들도 함께 멸망할 것이다.

다만 주님의 택한 백성은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다. 창조주 주님이 주님의 백성을 친히 선택하셔서 소유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호적에 이름을 올려주신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만군의 주님’이라고 하신다.

// 주님의 이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붙이는 이름은 소용이 없다. 주님은 내가 이름을 지어 부를 수 있는 우상이 아니시다. 천지뿐만 아니라 나도 지으셨다. 멸망의 상대어는 영생이다. 영생은 주님을 아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알게 해 주시는 분인 성령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내가 주님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님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 관계가 영원한 것이 영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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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바벨론이 주님의 백성을 학대하자) 선도부를 메대로 바꾸기로 하셨다. 주님은 선도부 바벨론을 많은 물 가에 살도록 (풍요롭게 살도록) 축복하셨다. 그러나 바벨론은 재물을 흥청망청 써서 탕진하고 말았다. 주님은 바벨론이 파산했다고 선언하신다. 많은 물은 주님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물 소리에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많은 물이 주는 물질적 축복을 탕진할 날이 멀지 않다. 주님의 뜻대로 가난한 사람,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면 파산이 가깝다. 흥청망청 사용하지 않고 창고를 지어 쌓아두려고 계획해도 오늘밤에 영혼을 찾으시는 주님이시다…. (렘51:11-19)
 
우리는 주님의 분깃이다. 주님의 소유라고 하신다. 주님이 창조주요 만군의 주님이시다. 아멘

예레미야 51:1-10

주님은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부추기신다. 바벨론을 치고 또 나를 대적하는 자 중에 있는 자를 치신다고 한다. 결국은 바벨론도 주님을 대적하는 자 중에 있다는 뜻이다. 주님은 다른 나라를 세워 바벨론을 키질 하시겠다고 하신다. 뭔가 남는게 있으려니 하지만 바벨론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온나라를 키질하여 말끔히 쓸어내겠다고 하신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바벨론. 시편 1편 기자는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한낱 바람에 흩날리는 쭉정이와 같다. 그러므로 악인은 심판을 받을 때에 몸을 가누지 못하며, 죄인은 의인의 모임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노래한다 (새번역). 바벨론이 그꼴이다.

바벨론의 패망중에 주님은 또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복음을 심어놓으신다. 이스라엘과 유다도 주님을 거역하(였)고 바벨론 땅에 포로잡혀와서도 죄가 가득하나 주님이 완전히 버리시지는 않겠다고 하신다. 죽음으로 갈라서지는 않겠다고 하신다. 다시말하면 주님이 남길 자를 남기신다는 뜻이다.

이들에게 바벨론에서 탈출하라고 하신다. 함께 벌받지 말라고 하신다. 음. 바벨론의 가치를 따르지 말라는 뜻이 강하다. 주님께서는 바벨론에게 행한대로 갚으실 때가 되었다고 하신다. 그러니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긴자에도 행한대로 갚으실 때가 올 것이니, 잘못된 행위에서 뛰쳐나와 진멸의 심판을 면하라고 소망을 주시는 것이다.

바벨론은 주님의 금술잔이었다. 주님이 주님의 백성을 벌하시는 도구였다. 선도부였다. 그러나 행한대로 갚으신다는 주님의 교훈은 간 곳 없고 자신의 힘만 자랑했다. 그러자 세상도 힘자랑에 취해버렸다.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주님의 역사는 다르다. 월드컵에서 독일이 대한민국에게 2:0으로 영패하는 것보다 더 확률이 낮지만, 지금의 미국이 망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바벨론은 갑자기 망해 무너질 것이다. (약육강식이 정의와 공의와 자비의 가치를 이길 수 없다.) 주님의 말씀은 어김이 없다. 오호 통재라, 바벨론은 통곡할 수 밖에 없다. 회복불능이라고 하신다. 약육강식이라는 교만병에 걸린 바벨론은 그 죄가 하늘에 닿았기 때문에 주님의 재앙도 하늘부터 내려온다.

바벨론의 멸망을 주님의 공의를 드러낸 사건이라고 한다. 따라서 시온에서 우리 주님의 일, 즉 주님의 공의가 무엇인지 선포하자고 예레미야는 노래 한다. 우리도 공의를 노래해야 한다.

// 바벨론에서 도망쳐 바벨론과 함께 벌받지 말라고 하신다. 도망치라는 명령은 단순히 지리적으로 피난가라는 것이 아니다. 바벨론의 가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상 가치에서 도망쳐야 한다. 예를 들어 자녀교육을 위해 한국을 떠난 가족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민간 곳에서도 아이들을 학원으로 돌린다면 무슨 소용인가? 바람에 나는 겨나, 요동치는 물결이나 두 마음을 품어서 그렇다. 주님도 따라야하고 세상도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아니 일의 결국을 알고도 두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주님으로 우리 마음을 정해야 흔들리지 않는다. 그대 세상의 선도부를 한번 해보려나? 주님은 행한대로 갚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