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19:14-20:6

마골밋사빕

아니나 다를까 공동번역에서는 ‘사면초가’로 번역했다. ‘마골밋사빕’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성전총감독이었던 임멜의 아들 제사장 바스훌에게 준 이름이다.  바스훌은 도벳에서의 예언을 성전들에서도 외치는 예레미야를 잡아 칼을 채우고 가두었다가 풀어주었다. 예레미야는  갇혔다가 풀려났는데, 예레미야를 가두었던 바스훌 (자유)에게는 마골밋사빕 (포로) 라는 이름이 주어진 것이다.

‘마골밋사빕’은 문자적으로 ‘사방의 두려움’이란 뜻이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 ‘사면초가’라고 번역했다. 본문에서는  “내가 너로 너와 네 모든 친구에게 두려움이 되게 하리니”라고 주를 달았다. 공동번역의 ‘사면초가’가 적절한 번역인 듯 하다.

// 사면초가는 역설적으로 초왕 항우가 한왕 유방에게 포위당한 상황에서 나온 말이다. ‘진퇴양난’을 너머 사방에서 에워쌈을 당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소리가 들린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적군의 노래 소리가 아니라 아군의 노래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는데. 사방에서 초나라 병사들이 부르는 초가 소리에  항우는 “한나라가 이미 초나라를 빼앗았단 말인가? 어찌 초나라 사람이 (포로가) 저렇게 많은고?” 하며 결국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역발산(혜)기개세’라는 해하가를 남기고 마지막전투에서 자결한다. 그때가 31세의 나이라 한다.

바스훌에게 주어진 마골밋사빕역시 자유자 바스훌에게 포로됨을 예언한 것이다. 물리적으로 사방으로 에워싸는 것이 바벨론 군대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사방에서 예루살렘을 에워싸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메세지다. 성밖 도벳에서, 성안 성전 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 것이 두려움이 되는 것이다.

(한국교회도) 사면초가 상황이다. 적이 강한 것이 아니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는 평안의 메세지, 긍정의 신앙이 사방에서 들린다. 바벨론 강가에서 찬송을 울며 불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렘 19:1-13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사람이 토기장이의 그릇을 한 번 깨뜨리면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나니 이와 같이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읍을 무너뜨리리니 도벳에 매장할 자리가 없을 만큼 매장하리라”[렘 19:11]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옹기를 사서 하시드문을 나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서 말씀을 선포하고 가지고 간 옹기를 함께가 증인들 앞에서 깨뜨리라고 명하신다.

‘하시드문’은 공동번역에서는 ‘옹기 대문’이라고 번역한다. 깨진 질그릇을 내다 버리는 문이다. 예루살렘의 여러 성문중에서 ‘분문’ (똥문)이라고 불리는 문과 같다고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쓰레기장으로 열려 있는 문이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 혹은 힌놈의 골짜기는 ‘게(골짜기)헨놈(힌놈)’이다. 인신제사와 쓰레기 소각등이 이루어진 곳으로 (게헨나) 지옥의 대명사로 쓰였다고 한다.

오늘 구절을 자세히 보면 옹기를 깨뜨리는 것은 사람이다. 옹기는 토기장이의 그릇이다.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사람을 깨뜨리면, 사람은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다고 하신다. 이와 같이 불순종의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주민들을 죽음의 골짜기로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메세지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시지만 결국 하나님의 옹기를 깨뜨린 장본인은 사람 자신이다. 자신들이 허물과 죄로 깨어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깨어진 옹기를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다. 지옥같은 곳을 너머 죽음이다. 사람은 다시 완전하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하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분은 그분 그리스도 예수시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2:5]

렘 18:13-23

사람의 꾀란게 참. 율법을 가르쳐 줄 제사장이 있고, 지혜를 가르쳐 줄 현자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줄 예언자 (선지자)도 있다고 하나, 율법과 지혜와 하나님의 말씀의 근원인 하나님 대신 허무한 것에 분향하면서 (우상을 숭배하면서) 낸 꾀에 스스로 속는 삶이다. [렘 18:18]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등을 보이시고 얼굴을 보이시지 않으시니 제사장인들 율법의 정신을 어찌 알 수 있으며, 옳고 바름을 분별하는 지혜를 가진 자도 없고,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은 희귀하다 못해 끊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우상처럼 무감각해진 저들은 악으로 선을 갚는 행동을 서슴치 않는다. 예레미야는 그런 저들을 벌해달라고 기도한다. 예레미야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보복의 저주일까? 심판을 통하여 사람의 꾀를 의지하는 저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의 꾀를 이미 아심을 보여달고 간구한다. 그렇다면 이 역시 예레미야 개인적인 기도라기보다 ‘사람의 꾀’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는 간구가 아닐까?

선이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드러내는 것이요 악이란 하나님 대신 자신들을 드러내는 일이다. 당연히 악으로 선을 갚을 수 없다. 내 삶에 인내가 더 필요하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 12:21]

렘 17:1-11

유다의 죄는 지울 수 없는 주홍글씨다. (헤스터의 몸에 찍힌 것이 아니라 딤즈데일의 마음에 새겨진).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벌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죄는 다른게 아니다. 사람을 믿는 것이다. 자신을 믿고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저주가 기다린다. [렘17:1-5] 그리고 6-11절은 시편 1편을 떠올린다.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뢰한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더위와 가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매를 맺으며 잎사귀가 마르지도 않는다.

악인들의 마음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일정함이 없다.

하나님게서는 법에 따라 우리 행실대로 심판하신다.

의인들의 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 그러나

불의로 치부한 자는 의인에 끼지 못하고 악인의 길을 따라 망한다. 오 어리석은 자여!

 

렘 16:14-21

오늘 아침에는 쳐박아 놓았던 묵은 커피를 가져와서 갈았다. 사무실에 커피 향이 가득하니 좋다. 묵은 커피라 내려 마시기는 뭐하지만 향기는 찌든것 같지 않다.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출애굽, 포로지에서의 귀환만 아니라 우리 행위에 대한 분명한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살아계신 참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신다. 심지어 (악한 백성을 벌하시기 위해 도구로 사용하신) 열방도  이 일로 하나님의 능력을 알고 하나님 앞에 나올것이다.

백성의 회복과 열방의 회개. 백성의 회복도 회개의 열매고 열방의 회개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질서로 회복하는 것이니 다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낸다. 다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