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9-18

마태복음 6:9-18 (공동번역)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예수께서는 우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얼굴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단식한다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그 기색을 드러내면이미 받을 상을 다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단식할 때 오히려 얼굴을 씻고 기름을 발라 단식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고, 아버지께 보이라고 가르치신다.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공동체적이다. 우리가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다. 우리가 우리 아버지의 다스림을 받겠다는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선서하는 기도다. 우리가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공동체의 양식을 구하는 기도다. 따라서 당연히 공동체에 속한 형제자매들의 상황을 돌아보고 책임지겠다는 기도다. 공동체 내에서 서로의 빚을 탕감해 주겠다는 서약의 기도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 시민권은 하나님의 자비를 입을 때 유지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나라 공동체를 깨뜨리려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공동체를 깨뜨리는 것이야 말로 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서로를 용서하는 사람들이다. 용서보다 하나님의 형상을 잘 드러내는 성품은 없다. 주기도문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라는 가르침의 연장이다. //남에게 보이려고 금식한다는 것은 공동체를 깨는 행위다. 믿음에 차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공동체를 깨는 것이며, 이미 자기 상을 이미 받은 것이다. 하나님나라에 이런 사람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마태복음 6:1-8

마태복음 6:1-8 (공동번역)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부터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다. 칭찬을 받으려고 자선을 베푸는 위선자들은 자기 상을 이미 다 받은 자들이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숨겨야 한다. 그래야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기도할 때도 남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아라. 남에게 보이게 기도하면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기도 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 주실 것이다. 기도할 때에 이방인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하느님께서 들어주시는 줄 안다. 그들을 본받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구하기 전에 벌써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다.

//자기 상을 이미 받은 사람들과 하늘 아버지로부터 상을 받을 사람들로 나눠진다. 자기 상을 이미 받은 사람들은 하늘 아버지로부터 받을 상이 전혀 없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들은 마지막날에 수치를 당할 것이다. //금년 나의 주제는 ‘자비’다. 자선은 상대적으로 쉽다. 동전 몇닢이면 할 수 있는 것이 자선이요,  자선은 눈에 보이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칭찬받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자선이다. 그러나 자비는 어렵다. 빚을 탕감해주고,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축복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비는 칭찬받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기도도 있다. 바로 감사 기도다.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바리새인이 드린 기도가 감사기도다. 그러나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감사기도라면 타령에 불과하다.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다 기도는 아니다. 우리가 진정 감사해야 할 기도제목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다. 세리처럼 죄인임을 고백해야 한다. 죄인임을 고백하는 기도라면 공적으로 해도 괜찮을 것이지만 (공동체가 도울 수 있으니) 굳이 들어내놓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은밀히 기도해도 하늘 아버지께서 들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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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33-48

마태복음 5:33-48 (공동번역)

예수님의 가르침은 문자주의를 넘어선다. ‘거짓 맹세를 하지 말고, 주님께 맹세한 것은 다 지키라’는 계명을 두고 예수께서는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사람이 맹세로 바꿀 수 있는게 없다고 하신다. 대신 주님이 하라고 하신 것은 ‘예’하고 순종하고 주님이 말라고 하신 것은 ‘아니오’하고 순종하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말씀에 토를 다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신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계명에 대해서는 아예 앙갚음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오히려 오른뺨을 맞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라고 가르치신다.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 내주라고 하신다.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같이 가주라고 하신다.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말라고 하신다. 절처하게 이타적이다. (앙갚음은 주께 맡기는 것이 성경적 원리다.)
예수께서는 한 술 더 떠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는 계명에 대해 원수까지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신다. 그래야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앞에서 예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행복을 누린다고 말씀하셨다. 화평의 대상에 당연히 원수도 포함된다. 하나님께서 선한 사람과 악인 모두에게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주신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형제들끼리만 인사를 한다면 받을 상이 없다. (유대인들이 짐승 취급한) 세리들도 이방인들도 이정도는 한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우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신다. 완전한 사람은 차별없이 사람을 대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자비을 베풀어야 한다.

이타적인 것도 쉽지 않은데, 원수에게까지 자비로워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도 완전하라고 하신다. 예수 안에서만 가능하다. 임마누엘을 구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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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21-32

마태복음 5:21-32 (공동번역)

일점 일획도 없어지 않고 다 이루어질 율법의 말씀을 어떻게 완성할 수 있는지 예수께서 가르쳐주셨다. 결코 문자주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살인하지 마라’는 계명을 예를 드시면서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 형제를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 형제 더러 미친놈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살인하는 자와 다를 것이 없다고 가르치신다. 그러니 제사(예배)보다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와의 화해가 우선이라고 말씀하신다. 누가 고소하면 법정으로 갈 문제가 아니라 먼저 화해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화해해야 한다. 심판날까지 가면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간음하지 마라’는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예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고 가르치신다. 눈이든, 오른손이든 몸의 한 부분이 죄를 짓게 하면 빼어버리고 찍어버려서 몸의 한 부분을 잃더라도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그렇다고 죄를 짓게 한다는 핑계로 일심동체인 아내와 이혼해서는 안 된다. 아내가 음행한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면, 오히려 그것이 간음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도 천국에서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예수님의 첫 가르침처럼 가난하고 애통하고 겸손(온유)하고 굶주리고 목마르면서도 자비하고 정결한 마음을 갖고 화평하고 박해를 받더라도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 하늘나라의 삶을 맛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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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13-20

마태복음 5:13-20 (공동번역)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은 짠맛이 있다. 짜지 않은 소금은 아무 데에도 쓸데없어 내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 등경 위에 얹어두어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밝게 비추게 한다. 우리도 우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오시지 않았다.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어도 율법은 일 점 일 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하고 경고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소금이다. 그렇다면 짠 맛을 내야 한다. 짠 맛이 없으면 소금이 아니다. 그렇다면 소금에서 내버려져 밟힐 뿐이다.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잃은 사람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그들을 모른다고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특성은 무엇인가? 앞에서 말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가난하고 애통하고 겸손(온유)하고 굶주리고 목마르면서도 자비하고 정결한 마음을 갖고 화평하고 박해를 받더라도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빛이다. 그렇다면 비추어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빛의 근원은 아니다. 빛의 원천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인은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성자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 그것이 착한 행실이다. 곧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행실이다. //착한 행실로 사람들을 비추기 위해서는 말씀대로 살아내야 한다. 율법주의가 아니라 사랑주의다. (성서 원본 없이 다양한 역본으로 말씀을 읽는 우리에게 일점 일획은 허사다.) 따라서 보혜사 성령의 인도에 따라 말씀을 읽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랑으로 적용해야 한다. 스스로에게 먼저 적용해야 하고, 공동체적으로도 적용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옳게 살고, 사람들에게 착한 행실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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