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28-37

열왕기상 1:28-37

다윗이 밧세바를 불렀다. 다윗은 주님의 이름으로 솔로몬이 다윗의 왕위를 계승할 것에 대한 약속을 오늘 이행하겠다고 말했다. 밧세바는 다윗 왕의 만수무강을 빌었다. 다윗은 사독과 나단과 브나야를 불러 솔로몬을 자신이 타던 노새에 태워 기혼을 내려가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고, 솔로몬으로 하여금 자신을 대신하여 임금의 자리에 앉히라고 명령했다. 다윗은 솔로몬을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치자로 임명한다고 선언했다. 군대장관 브나야가 다윗이 말한 바가 주님의 뜻하신 것이기를 바란다고 화답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윗과 함께 계신 것처럼, 솔로몬과도 함께 계셔서 솔로몬의 자리가 다윗의 자리보다 더 높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나단의 대면보고를 받은 다윗 왕은 (깊은 영적인 잠에서) 깨어났다. 사무엘이 자신에게 기름을 부었던 그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을 것이다. 그렇다 왕위는 대관식(사람의 추대)보다 기름부음(하나님의 선택)이 먼저다.
// 다윗, 사독, 나단 이 세사람은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에 비하면 브나야는 평신도 전문인이다. 다윗이 솔로몬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절차를 명하자 사독이나 나단이 아닌 브나야가 화답했다는 것은 나에게는 무척 인상적이다. 기름부음을 받은 위치는 아니었지만 성경은 그를 [‘여호야다’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알고 계심’)의 아들 ‘브나야’ (‘여호와께서 세우셨다’)]라고 반복해서 그 이름을 기록한다. //하나님께서는 왕으로,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하나님의 일에 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직책이나 직함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알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세워주셔서 쓰임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세워 주시는 하루!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나부터)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되기를 바라는 주일 아침이다.

열왕기상 1:11-27

열왕기상 1:11-27

다윗은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자라는 주님의 평가가 떠오른다. 그는 하나님과 대화하던 사이였다. 직접적인 대화를 끊어진 후에도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우둔해지는 다윗의 영성을 지켜주셨다. 그런데 다윗이 칩거에 들어갔다. 다윗은 아비삭의 시중을 받으면서 나단의 대면보고마저 받지 않고 죽을 때를 기다리는 듯 했다. 아도니야가 실세였다.
나단은 스스로 왕이 되겠다는 아도니야의 국정농단?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그는 다윗의 왕위는 하나님께서 세워주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다윗이 밧세바에게 솔로몬이 자신의 뒤를 이어 왕위에 앉히겠다고 맹세한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그저 다윗이 원하는 바였다면 나단은 그때 바로 잡았을 것이다.) 나단은 다윗의 약속이 하나님 앞에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도니야의 국정농단에 대한 대면보고를 시도한다.
어쩌면 아비삭은 나단의 대면보고를 막기 위해 아도니야를 지지하는 신하들이 심어 놓은 문고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왕의 침실에 접근할 수 있는 밧세바를 내세웠다. 그리고 드디어 다윗 왕의 침실을 열었다. 밧세바와 나단은 이구동성으로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된 것이 다윗의 뜻이 아니라면 반역이요, 자신들은 숙청의 대상이라고 보고한다. 아도니야의 초청을 받지 못한 자신들이야 말로 다윗의 종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아도니야의 국정농단이 다윗의 뜻인지 아닌지 알려달라고 결단을 촉구한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끊어지면 천하의 다윗이라도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사건이다. 중요한 자리에 있다면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가 있어야 하고, 또 하나님 안에서 공동체적 교제가 필요하다. 그리고 선배든 후배든 영적인 멘토가 반드시 필요하다. 주변에 나의 영적인 문제를 언급해 주는 사람이 없다면, 나에게 영적인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나의 영성이 심각하게 파괴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열왕기상 1:1-10

열왕기상 1:1-10

다윗이 늙어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았다. 따뜻하지 않았다는 것은 성욕을 잃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다고 이해하면 좋겠다. 하나님께 묻지 않으니 하나님을 모르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신하들은 젊은 처녀를 데려다가 다윗을 시중들게 했다.
2)세째 압살롬이 죽어 왕위 계승 0순위가 된 네째 아도니야는 자기가 왕이 될 기회로 삼았다. 요압과 아비아달이 아도니야를 포섭해 그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3)사독과 브나야와 나단과 다윗을 따르던 장군들은 아도니야에게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도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주도권은 이제 아도니야에게 넘어간 듯 보인다. 그러나 아도니야는 다른 왕자들은 초청하면서 솔로몬을 부르지 않았다. 어리다고 얕보았을까? 이 교만이 아도니야에게는 비극의 씨앗이 된다.

//다윗의 통치는 하나님의 다스림의 상징이다. 그런데 더이상 따끈따끈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다시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물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사귐을 잃었으니 죽은 것과 마찬가다. 성욕회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먼저다. 그런데 다윗 주변의 신하들도, 왕위 계승 0순위 아들 아도니야도, 심지어 제사장과 예언자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곧바로 구하지 않았다. 비극의 시작이다. ㅠㅠ 이스라엘의 왕위는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늙어 다 죽게된 다윗은 잊어 버렸고 신하들은 무시했고 아도니야는 미처 알지 못했다. //주님과의 교제가 아침마다 새롭지 않다면, 주님과 교제가 따끈따끈하지 않다는 증거다. 다시 주님 말씀 앞에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실 때, 내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나는 따끈따끈하지 않던가? 요즘은 어떤가 자문한다.

https://quietwaters.blog/2017/05/01/

시편 94:1-23

시편 94:1-23

복수(심판)하시는 하나님!

시인은 하나님을 복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노래한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노래한다. 시인은 오만한 자, 악한 자, 사악한 자들이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노래한다.

오만하고 악하고 사악한 자들은 주님의 백성을 짓밟으며 괴롭힌다. 과부와 나그네와 고아들을 살해한다. 하나님을 보지도 생각지도 못하는 우상의 하나로 치부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자들보다 미련한 자들은 없다. 시인은 이들이먀 말로 어리석다고 노래한다.

생명이 없는 우상과 달리 하나님은 들으시며 보신다. 생명의 원천이시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시다. 사람의 속 생각이 허무함을 아신다. 하나님의 책망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야 말로 복이 많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꾸짖음에 청종하는 사람에게 주님은 평안을 주신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을 주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영원히 주님의 소유로 삼아주신다.

누구나 심판대 앞에 설 날이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행한대로 심판하신다. 마음이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정의를 따라 살 것이다.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을 위하여 이들에게 대항한다. 주님은 이들을 도우신다. 변호하신다. 주님의 도움이 없다면 (의인이라도,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에) 이미 죽은 목숨이다. 그러나 환난 날에도 주님의 사랑(인애와 자비하심)이 의인을 붙잡아 준다. 시인의 마음이 번거로울 때에도 주님의 위로가 시인을 달래 준다.

(그러나) 악인은 주님과 함께 할 수 없다. 주님과 어울릴 수 없다. 의인을 해하려고 노리는 악인들에 대항해서 의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주님께로 피하는 것 뿐이다. 주님이 나의 요새 나의 하나님(신), 나의 반석이시다. 악인은 주님의 벌을 피할 수 없다. 주님은 그들을 없애 버리실 것이다. 주님은 그들을 없애 버리실 것이다. 망할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책망하시고 하나님의 법을 가르쳐 주시는 사람이야 말로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노래한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꾸짖음을 달게 받고,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사람이 주안에서 평안을 누린다. 주의 백성이 누리는 복이다. 만사형통이 복이 아니라, 임마누엘이 복이다.

시편 93:1-5

시편 93:1-5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흔들리지 않는다.
주님의 나라가 영원부터 견고하기 때문이다.
거세게 흐르는 세상의 조류가 우리를 삼키려한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은 세상의 조류보다 더 크고 아름답다.
그 증거는 주님의 집 마당에 서 있는 나무들이다. 주님은 주님의 집을 거룩한 나무들로 단장하신다.

//거룩한 나무들이 이룬 숲, 곧 의인들의 회중이 하나님의 나라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나라다. 주님은 주님의 집을 거룩한 나무들, 곧 의인들로 단장하신다. 함께 주님의 집에 뿌리 내린 신실한 믿음의 친구들로 인해 감사하다. 나의 삶이 거룩한 나라의 한 부분을 장식함에 감사할 뿐이다. //세상의 조류를 거스릴 힘은 주님의 집 마당에 심어질 때 나온다. 다른 곳에 뿌리를 내리면 뽑히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뿌리를 깊게 내릴 수 있다. //사실 세상 조류가 너무 거세다. 기독교라는 거대 담론은 이미 무너졌다. 그래도 사랑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종교적 열심이 아니라 사랑으로 버텨야 할 때다. 성도가 형제사랑, 이웃사랑을 실천해야 하나님의 진리가 다시 세워질 것이다. 그 힘은 세상조류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주님의 능력을 바라보는 데서 나온다. 시인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시8편)하고 노래한다. //시인이 주님의 능력의 크고 아름다움을 보았다면, 예수 안에 있는 우리가 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세상 사람들처럼 거센 세상 조류에 눈을 돌리는 순간, 우리도 베드로처럼 물 속으로 빠져들어갈 것이다. ‘ 주여 나를 구하소서’ 하고 주님을 보게 하소서. 예수께서 즉시 내미시는 손을 붙잡게 하소서. 의심하지 않고 주님의 크고 아름다움에 매료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