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92:1-15

시편 92:1-15

시편 90편을 노래한 시인은 마지막절에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라고 두번이나 간구했다. 그런데 시편 92편을 노래한 시인은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92:4)기뻐 외친다고 고백한다. ‘우리의 손’과 ‘주의 손’, 그 크기가 다름은 분명하다. 우리가 아무리 백세인생을 노래한들, 영원토록 지존하신 하나님과는 비교할 수 없다.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에 감사하는 시편기자의 노래는 시편 1편을 떠올린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1:4~6/92:9). 그러나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다(1:3/92:12-14). 시인은 시냇가를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마이라고 더 구체화 한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면 늙어도 고목이 되지 않고 열매를 맺는 생명력을 유지한다.

물론 하나님의 집 마당이라고 온갖 비바람이 닥치지 않는 곳은 아닐 것이다. 낮에는 뜨거운 해와, 밤에는 추위와 싸워야 한다. 그러나 91편에서 노래했듯이 사면초가의 재앙이라도 하나님의 집 마당에 있는 시인을 해치지 못한다. 하나님의 집 마당에서는 ‘사람이 낸 꾀’ 대신에 정직함, 정의와 공의가 선포된다. 내 ‘꾀’ 대신 정의와 공의가 선포되는 그곳이 하나님의 집 마당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곳, 곧 하나님의 나라다. 주님의 손이 행하시는 곳이다. 모사재인 성사재천

시편 91:1-16

시편 91:1-16

주님께서 시인에게 ‘너는 가장 높으신 분의 보호를 받으면서 살며, 너는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아래 머무를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자, 시인은 다음과 같이 화답하며 노래한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내가 의지할 하나님!
주님은 나를 사냥꾼의 덫에서 빼내 주시고 죽을 병에서 건져주시는 분.
주님은 주님의 깃으로 나를 덮어주시고 주님의 날개 아래로 나를 품어주시며, 나를 지켜 주는 방패와 갑옷이 되시는 분.
나는 밤의 공포도 낮의 화살도 무서워하지 않으리.
흠암의 염병도 백주의 재앙도 두려워하지 않으리.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나에게는 재앙이 없으리. 오히려 악인들이 보응 받는 것을 보게 되리라.

나는 가장 높으신 분이신 주님을 피난처로 삼았으니,
나에게는 어떤 불행도 찾아오지 않으리, 나의 집에는 어떤 재앙도 닥치지 않으리
주님은 천사들을 보내셔서 나의 가는 길을 지켜주시리
오히려 사자와 독사들을 짓밟과 다니게 하시리.

주님께서 시인의 노래를 들으시고 다음과 같이 화답하신다.

시인이 나를 간절히 사랑하니 내가 그를 구원하겠다.
시인이 나의 이름을 알고 있으니 내가 그를 높여주겠다.
시인이 나를 부를 때에 내가 응답하고 시인이 고난을 받을 때에 내가 그와 함께 있겠다.
시인을 건져주고 (구원하고) 시인을 영화롭게 하겠다.
내가 시인을 만족할 만큼 오래 살도록 하고 주님의 구원을 시인에게 보여 주겠다.

//가장 높으신 분의 보호를 받으며 살고, 전능하신 분의 그늘 아래 머물러 있어도 환난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님을 피난처요 요새요 의지한 분이라고 노래한다. 주님과 함께 있어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기도 하는 것이 인생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이 노래하듯 임마누엘은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재앙으로부터 보호받는다. 오히려 천사들의 도움으로 세상을 이긴다. 시인은 주님을 피난처로 삼자 담대해 진다. 이런 시인을 주님은 구원하신다. 구원이라 주님과의 교제다. 임마누엘이란 주님과의 교제다. 주님을 부를 때 주께서 응답하시고, 고난 날에 주님이 함께 해 주심이 구원이다. 바울의 교훈대로 “하나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신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구원이다.

https://quietwaters.blog/2017/08/30/

시편 90:1-17

시편 90:1-17

시인은 주님이 우리의 거처였다고 노래한다. 임마누엘! 창조주 하나님, 시간 너머의 하나님,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노래한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우리는 죄인이다. 우리가 죄를 숨기려고 해도 주님 앞에서는 환히 드러난다. 주님이 우리 죄에 대해 노하시면 우리의 일생은 사그라진다. 인생 칠십년 팔십년 살아도 수고와 슬픔뿐 아닌가? 그것도 주마등처럼 쏜살보다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인생이다. 주님의 진노의 위세를 아는 사람은 없다. 인생이 찰라라는 것을 안다면, 심판의 그날이 도둑이같이 온다는 것을 아는 지혜가 있다면 주님의 자비를 구할 수 밖에 없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희노애락을 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 땅에서의 괴로움은 주님 안에서만 즐거움으로 바뀐다. 이 임마누엘의 즐거움이야 말로 자자손손 유산으로 남겨 주어야 할 하나님의 일하심이며 하나님의 영광이다. 시편 23편에서 시인이 노래를 마무리한 것처럼 주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주님의 집에 거하는 것이다. 임마누엘이 주님의 은총이다. 우리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견고/영원 하려면 주 안에 있어야 한다. 주님을 우리의 거처로 삼아야 한다. ‘모사인재 성사재천’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25:30-38

예레미야 25:30-38

주님께서 떠나가셨다!
그 땅이 폐허가 되었다. 외형적으로는 압박하는 자의 칼에 의해서, 내면적으로는 주님의 분노 때문에, 총체적으로는 주님께서 떠나셨기 때문이다. 주님이 돌리시는 거부할 수 없는 ‘진노의 포도주 잔’을 돌이키는 유일한 길은 역설적이게도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요나 때, 니느웨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매달리는 길 밖에 없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대한다면, 당연히 이웃에게 인자해야 한다. 보이는 형제부터 사랑해야 한다. 요한은 첫번째 편지 3:14에서 성도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이유를 ‘형제사랑’이라고 말한다. 주님은 사랑이 없는 곳에 계시지 않는다.


주님께서 떠나가셨다!
사실 유다 백성이, 뭇 민족이 주님을 떠난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선포하셨다.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모세는 이 말씀에 의지해서 원망과 불평의 백성들을 위해 몇번이고 중보했다. 요엘도 요나도 이 하나님을 알았다. 시편의 시인들도 이 구절로 노래했다. 하나님의 선포에 반응해야 한다. 주께로 돌이키지 않으면 주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신다. 주님께서 떠나가신다. 주님의 부재가 지옥이다. 사랑이 없는 곳이 지옥이다.

예레미야 25:15-29

예레미야 25:15-29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다. 주님의 손에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아 뭇 민족에게 마시게 하라고 명하신다. 뭇 민족이 포도주를 마신 후, 주님은 그들을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게 하실 것이다.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다. 먼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의 주민들에게, 그 땅의 왕들과 고관들에게. 그래서 그 땅은 폐허가 되었고 사람들의 놀라움과 빈정거림과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예레미야는 이집트 왕 바로와 그의 신하와 고관과 그의 모든 백성과 이집트에 사는 여러 족속과 우스 땅의 모든 왕과 블레셋 땅의 모든 왕과 아스글론과 가사와 에그론의 주민과 아스돗에 남아 있는 주민과 에돔과 모압과 암몬과 두로와 시돈과 지중해 건너편 해안지방의 왕들과 드단과 데마와 부스의 주민과 관자놀이의 머리카락을 짧게 깍은 모든 족속과 아라비아, 사막, 시므리, 엘람, 메대의 모든 왕과 북쪽의 원근 각처의 모든 왕에게 주님의 포도주 잔을 주어서 차례로 마시게 했다. (이 모든 민족에게 주님의 말씀을 예언했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마지막으로 세삭 왕에게도 주님의 말씀을 전했다. 주님은 이 모든 민족 사이에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모든 민족은 마시고 취하고 토하고 쓰러져서 죽을 것이다. 주님께서 주시는 진노의 포도주 잔을 거부할 수 없다고 하신다. 주님이 임재하시는 상징적인 예루살렘에서부터 재앙이 내리기 시작하는데, 주님의 이름을 모르는 뭇 민족들이 무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이 뭇 민족 사이에 전쟁을 일으켜서 모든 주민을 벌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진노의 포도주 잔을 전하라. ‘진노의 포도주 잔’은 결코 복음이 아니다. 더군다나 거부할 수 없는 진노의 포도주 잔이라면 더욱 그렇다. 예레미야는 이 진노의 포도주 잔을 예루살렘과 유다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전해야 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진노의 포도주 잔을 전하는 것을 피해 달아났었는데 예레미야의 심정은 오죽했으랴. 그러나 요나가 달아났던 이유가 니느웨를 향한 진노의 소식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바뀔 것이 뻔하였듯이, 예레미야가 전하는 진노의 포도주 잔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이기지 못하니 복음이 된다. 다만 니느웨 사람들이 그랬듯이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도 불순종하면 재앙이 내리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고도 무사하기를 바랄 수 있으랴. //그러나 사람의 힘만으로는 진노의 포도주 잔을 피할 수 없다. 우리 대신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신 예수를 알아야 한다. 예수 안에 있어야 한다. 임마누엘 뿐이다. 임마누엘은 우리가 전해야 할 ‘진노의 포도주 잔’을 복음으로 바꿔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