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2:1-10

사사기 2:1-10 (공동번역)

야훼의 천사가 길갈에서 보김으로 올라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너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었고, 너희 조상들에게 주겠다고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이렇게 이끌어들였다. 나는 너희와 맺은 계약을 영원히 깨뜨리지 않으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이 땅 주민과 계약을 맺지 말고 그들의 제단을 헐어버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어찌 이럴 수 있느냐? 내가 다짐한다. 나는 그들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않으리라. 그들은 너희를 잡는 그물이 되고 그들의 신은 너희를 옭아매는 올무가 될 것이다. “
이스라엘 온 백성은 야훼의 천사가 하는 말을 듣고 일제히 목놓아 울었다. 그 곳을 보김이라 부르는 데는 이런 사연이 있다. 거기에서 그들은 야훼께 제사를 드렸다. 여호수아의 명령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은 흩어져 갔다. 유산으로 돌아온 자기 땅으로 가서 저마다 그 땅을 차지하였다. 여호수아 생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줄곧 야훼를 섬겼다. 여호수아가 죽은 다음에도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해주신 큰 일을 목격한 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은 줄 곧 야훼를 섬겼다. 눈의 아들, 야훼의 종 여호수아는 백십 세에 죽었다. 사람들은 그의 상속지인 에브라임 산악지대 가스산 북편 딤낫헤레스에 그를 묻었다. 그의 세대에 속한 사람으로서는 그가 죽어 조상에게로 돌아간 마지막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야훼를 모르는 새 세대, 야훼께서 이스라엘에게 어떤 일을 해주셨는지 모르는 새 세대가 비롯되었다.

삿2:1-10
//여호수가가 죽었다. 하나님의 일을 목격한 장로들도 죽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는 새 세대가 비롯되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 당신이 언약/계약 당사자이심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계약을 깨뜨리지 않겠다고 하신다. 그러니 이제는 계약이 깨진다면 순전히 이스라엘 백성의 책임이 된다. // 만약 계약이 깨진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계약 당사자가 누구신지 모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ㅠㅠ 다른 핑계를 댈 수 없다. 가나안 땅을 유산으로 상속받아 차지했으면 누구에게서 어떻게 상속받았는지 역사를 알아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은 조상대대로부터 물려받은 땅처럼 당연시 했던 모양이다. 상속에서 중요한 것은 땅이 아니라 땅문서다. 땅문서가 없느면 도루묵이다. 세상에서는 시효취득권을 주장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나라에서는 못한다.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도 기억해야 하는데… 새 세대는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니 하나님께서 하신 일도 모르게 되었다. 개인적인 간증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적 간증이 더욱 중요하다. 작금의 한국 교회가 잃어가는 것이 공동체적 간증이 아닌가 한다. 예수를 모르는 세상이 되어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정작 교회가 예수를 모르고 예수께서 하신 일을 모르는 게 문제다.

사사기 1:22-36

사사기 1:22-36 (공동번역)

요셉 가문이 베델을 치러 올라갈 때에도 야훼께서 함께 하셨다. 일찍이 루즈라 불리던 베델 성을 요셉 가문이 정탐하게 되었다. 정탐꾼들은 그 성에서 나오는 사람을 붙들고 성으로 들어가는 길이 어디냐고 물으면서 길만 알려준다면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사람은 정탐꾼들에게 성으로 들어가는 길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그 성을 칼로 무찌르면서도 그 사람과 그의 온 일가는 죽이지 않았다. 그 사람은 헷족이 사는 지방으로 가서 한 성을 세우고 그 이름을 루즈라 하였는데 이날까지도 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므나쎄 지파는 벳스안과 거기 딸린 촌락들, 다아낙과 거기 딸린 촌락들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또 도르와 거기 딸린 촌락의 주민, 이블르암과 거기 딸린 촌락의 주민, 므기또와 거기 딸린 촌락의 주민도 몰아내지 못하여 그 당에 온 가나안족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강력해지면서 가나안족을 아주 몰아내지 않고 부역을 시켰다.
에브라임 지파는 게젤에 자리잡고 사는 가나안족을 몰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가나안족이 그들과 섞여 살게 되었다.
즈블론은 키트론 주님과 나할롤 주민을 몰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 가나안족을 섞여 살게 하다가 부역을 시킥 되었다. 아셀 지파는 아꼬와 시돈 주민을 몰아내지 못하였다. 또 아흘랍, 악집, 헬바, 아빅, 그홉도 차지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아셀 지파는 그 땅 주민인 가나안족과 섞여 살았다. 그들을 몰아내지 못했지 때문이었다. 납달리 지파는 벳세메스 주님과 벳아낫 주민을 몰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땅 주민인 가나안족과 섞여서 살았다. 그러다가 벳세메스와 벳아낫 주민에게 부역을 시키게 되었다. 단 지파는 아모리족에게 밀려 산악지대로 쫓겨 들어가 평지에는 내려올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되었다. 아모리족은 헤레스 산과 아얄론과 사알빔에 그대로 살았으나 마침내 요셉 가문에게 눌려 부역을 살게 되었다. 에돔족의 한 쪽 경계선은 아크라삠 비탈에서 시작하여 셀라로 해서 위쪽으로 뻗쳐 있었다.

삿1:22-36
//요셉 지파가 벧엘에 올라갈 때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가 요셉 지파가 루즈라고 불리는 벧엘 성을 무찌를 수 있었던 이유다. 그런데 진멸시키지 않았다. 뒷부분에 나오는 그들을 몰아내지 못하였다의 단초다. //여리고 점령 때 정탐꾼들을 도와준 라합과 라합 가족이 구원받았듯이, 요셉 지파가 벧엘을 치러 올라가는 길을 정탐꾼에게 안내해준 사람도 가족과 함께 구원을 받았다. 그들은 헷족속 마을로 이주해 정착했다.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방법은 이렇듯 피턴이 있다. //벧엘에서 구원을 받은 가족이 헷족속이 사는 마을로 이주해서 새로운 루즈를 건설했지만, 정작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의 주민들을 몰아내는 대신에 그들에게 부역시켜 부려먹었다. 이집트에서 노예로 부역살이를 하며 맺힌 한을 풀려고 했던 것일까? 하여간 주민을 몰아내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의 욕심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제는 임마누엘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를 세상 것에 눈을 팔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철병거를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잊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를 보며 물위를 걷다가 풍랑을 보고 물에 빠진 것과 같다. 오늘은 가나안 주민을 부역자로 부리기 위한 탐심으로 임마누엘을 누리지 못한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다. 임마누엘을 누리지 못하면 약속의 땅에 들어가 산들 아무소용이 없다.

사사기 1:11-21

사사기 1:11-21 (공동번역)

그들은 다시 드빌 주민을 치러 갔는데, 드빌은 일찍이 키럇세벨이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거기에서 갈렙은 키럇세벨을 점령하는 사람에게 자기의 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고 했다. 갈렙의 동생 크나즈의 아들인 오드니엘이 그 곳을 점령하고 악사를 아내로 맞아 갈렙의 사위가 되었다. 악사가 시집으로 떠날 때가 되어 오드니엘은 악사를 시켜 장인에게서 땅을 얻으려고 하였다. 악사가 나귀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갈렙은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저를 네겝 지방으 시집보내시면서 아무 선물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악사가 샘을 달라고 하자 갈렙은 윗샘 아랫샘을 주었다. 모세의 장인 호밥은 켄 사람이었는데, 그는 유다 자손들과 함께 종려나무 도시로부터 올라와 아랏 남방에 있는 유다 사막에 이르러 아말렉족과 어울려 살았다. 유다 지파는 동기인 시므온 지파와 함께 진군하여 스밧에 자리잡고 사는 가나안족을 무찌르고 전멸시켰다. 그래서 그 도시의 이름을 호르마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유다 지파는 가자와 그 일대, 아스클론과 그 일 대, 에크론과 그 일대는 차지하지 못하였다. 야훼께서 함께 하시어 유다 지파는 산악 지대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평지에 자리잡은 사람들은 아직 몰아내지 못했는데, 그들에게 철병거가 있기 때문이었다. 모세의 지시대로 헤브론은 갈렙이 차지하였다. 갈렙은 거기에서 아낙의 세 아들을 몰아냈다. 베냐민 자손은 예루살렘에 자리잡은 여부스족을 몰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여부스족이 베냐민 자손과 함께 이날까지 예루살렘에 사는 것이다.

삿1:11-21
//여호수아가 죽었다. 출애굽 1세대 중에는 오직 갈렙만 살아있다. 그는 기득권을 요구하지 않았다. 가나안족을 무찌르도록 유다지파가 선봉으로 선택된 이면에는 갈렙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을 것이다. 갈렙은 좋은 땅을 거져 얻지 않고 친히 싸워서 차지했다. 저자는 갈렙이 마침내 아낙의 세 아들을 몰아냈다고 적는다.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장인 호밥은 아마도 모세의 처남으로 해석되는 것이 더 적합하다. 곧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아들(후손)이라고 번역해야 자연스럽다. 갈렙도 호밥도 혈통적으로는 유다의 자손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렙은 유다 지파의 지도자로 우뚝섰다. 호밥도 유다 자손 중에 이름을 올렸다. 하나님나라는 확실히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몰아내는데 실패했다. 예루살렘 지역에서도 여부스족을 몰아내지 못했다. 예루살렘은 나중에 다윗 때가 되어서야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었다. 사사기 저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유다 지파가 산악지대를 차지했다고 기록한다. 그렇다면 평지에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셨을까? 사사기 저자는 그 이유를 평지에는 철병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눈에 보이는 병거 때문에, 함께 계시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몰랐던 것이다. ㅠㅠ //믿음의 눈을 떠야 한다. 믿음의 눈이란 임마누엘이다. 갈렙은 하나님과 함께 했기에 아낙의 세 아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유다 자손 모두가 다 갈렙과 같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에 우리도 신실하게 반응하게 하소서.

사사기 1:1-10

사사기 1:1-10 (공동번역)

여호수아가 죽은 뒤, 이스라엘 백성은 어느 지파가 가나안족을 치러 앞장서 올라갈 것인가를 야훼께 물었다. “유다지파가 올라가거라. 내가 이제 이 땅을 그들의 손에 부친다.” 이러한 야훼의 분부를 받고 유다 지파는 동기인 시므온 지파에게 제안하였다. “우리에게 몫으로 돌아온 지방으로 너희도 함께 올라가 가나안 사람들을 치자. 그리하면 우리도 너희에게 몫으로 돌아간 지방으로 함께 진군하리라.” 이리하여 시므온 지파도 함께 진군하게 되었다. 유다지파가 쳐 올라가는데, 야훼께서 가나안족과 브리즈족을 그들의 손에 부쳐주셨으므로 베젝에서 일만 명이나 무찔렀다. 그곳 베젝에서 그들은 아도니베젝과 접전하여 가나안족과 브리즈족을 무찔렀던 것이다. 도망치는 아도니베젝을 뒤쫓아가서 사로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자, 아도니베젝이 이렇게 탄식하였다. “내가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르고 내 상 밑에서 부스러기를 주워먹게 한 왕이 칠십 명이나 되더니, 하느님께서 내가 한 대로 나에게 갚으시는 구나.” 그는 예루살렘으로 끌려가 거기에서 죽었다. 유다 자손은 예루살렘을 쳐서 칼로 무찔러 점령하고는 그 성에 불을 놓았다. 그리고 나서 유다 자손은 산악 지대와 네겝 지방과 야산 지대로 내려가 거기에 사는 가나안족을 쳤다. 다시 유다 지파는 가나안족이 사는 헤브론으로 진군하였는데, 헤브론은 일찍이 키럇아르바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거기에서 그들은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무찔렀다.

삿1:1-10
//여호수아가 죽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약속의 땅을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어느 지파가 앞장설지 하나님께 물었고 유다지파가 선택되었다. 유다지파가 차지하기 위해 올라가 땅이 베섹 땅이었다. 아도니베섹은 베섹땅의 주인, 곧 왕이었다. 아도니베섹의 탄식.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그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주변 나라들에 대해 포악한 왕이었다. 그가 무찌른 왕이 일흔 명이나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아도니베섹에게 포악으로 갚으셨다. 아도니베섹은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신) 앞에 섰기에 이런 탄식을 할 수 있었다. 만약 아도니베섹이 참 하나님을 미리 알았더라면 주변 일흔 왕들에게 포악을 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도니베섹은 일흔번씩이나 승리했다. 일흔은 완전수 일곱에 완전수 열을 곱한 수다. 승률 100%다. 그러나 세상 임금은 영원한 승리를 누릴 수 없다. 마지막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패하고 말았다. 단 한 번 패했을 뿐인데, 여전히 승률이 98%가 넘지만, 그래도 소용이 없다. 마지막 전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마지막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오직 예수 안에 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데 예수 안에 거하지 않고서는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6:1-24

고린도전서 16:1-24 (공동번역)

이제는 성도들을 돕기 위한 헌금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내가 갈라디아 여러 교회에 지시한 것을 여러분도 따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간 다음에야 비로소 헌금하느라고 서두르지 말고 여러분은 일요일마다 각각 자기 형편에 따라 얼마씩 미리 저축해 두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가서 여러분이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내 소개 편지와 여러분의 성금을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게 하겠습니다. 만일 나도 예루살렘에 가야한다면 함께 가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마케도니아에 들를 일이 있으니 거기에 먼저 들렸다가 여러분에게로 가겠습니다. 거기에 가게 되면 얼마 동안 여러분과 함께 지낼지도 모릅니다. 혹시 겨울을 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내가 가려는 곳으로 길을 알선해 주십시오.
나는 지금 지나는 길에 여러분을 잠깐 만나보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얼마 동안 여러분과 함께 지낼 생각입니다. 그러나 오순절까지는 이 곳 에페소에 머물러 있겠습니다. 여기에는 나를 적대하는 사람들이 많기는 하지만 내가 큰 일을 할 수 있는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디모테오가 그리고 가거든 아무 불안 없이 여러분과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나처럼 주님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그를 업신여기지 말고 그가 무사히 나에게 돌아올 수 있도로고 잘 주선해 주십시오. 나는 그가 돌아오기를 교우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교우 아폴로에 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다른 교우들과 함께 여러분한테 찾아가라고 간곡히 부탁했지만 그는 지금 갈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적절한 때가 오면 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늘 깨어 있으십시오.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씩씩하고 용감한 사람이 되십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처리하십시오.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또 한가지 권할 것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스테파나의 가족은 아카이아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성도들을 위해 몸바쳐 일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사람들과 또 그들의 노고를 같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순종하십시오. 나는 스테파나와 포르두나도와 아카이고가 나에게 와준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여러분을 보고 싶어하던 내 허전한 마음을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그들은 나와 여러분의 걱정을 덜어주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어야 합니다.
이 곳 아시아의 여러 교회가 여러분에게 문아합니다. 아퀼라와 브리스카가 자기 집에 모이는교회와 함께 주님의 이름으로 특별히 문안합니다. 그 밖의 모든 교우들의 문안도 받아주십이오. 여러분은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이 인사는 나 바울로가 직접 씁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마라나타! (주여, 어서 오소서!) 주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은총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고전 16:1-24
//헌금에 대한 바울의 언급에서 우리는 공적헌금의 가장중요한 목적이 구제임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으로 보낸다는 대목에서 구제는 지역교회를 너머 어려움에 처한 전세계적 교회에 대한 성도의 마땅의 의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개교회주의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 하나의 교회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 //13절에서 바울은 또 늘 깨어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씩씩하고 용감한 사람이 되라고 권한다. 개역개정에서는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번역한다. 다윗이 솔로몬에게 유언한 “힘을 내어 대장부가 되어라” 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이것을 성차별적 권면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믿음에 굳게 서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두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14절에 모든 일을 사랑으로 처리하라고 권한다.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씩씩하고 용감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에 관해서는 13장에서 이미 살펴봤다. //바울은 또 스데바나 가족처럼 성도를 위해 몸바쳐 일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돕는 사람들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친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를 따라 성도를 돌보는 지도자들은 마땅히 인정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는 성도들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주를 사랑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