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26:2:5

고린도전서 1:26:2:5 (공동번역)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여러분 중에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또는 가문이 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습니까?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을 택하였으며,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또 유력한 자들을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서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니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하느님 앞에 자랑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와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께서 주시 우리의 지혜이십니다. 그분 덕택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해방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에도 기록되 있듯이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십시오.”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나는 유식한 말이나 지혜를 가지고 하느님의 그 심오한 진리를 전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는 동안 예수 그리스도,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 약하였고 두려워서 몹시 떨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말을 하거나 설교를 할 때에도 지혜롭고 설득력있는 언변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과 그의 능력만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에 바탕을 두지 않고 하느님의 능력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고전:1-26:2:5
//하나님의 부르심은 세상 가치관과 다르다고 바울은 말한다. 세상은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가문이 좋은 사람을 찾는다. 똑똑하고 능력있고 금수저라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어리석다고 하는 사람, 무능력하다고 하는 사람, 그리고 근본도 모르는 흑수저들을 부르신다. 어리석고 무능하고 멸시받는 흑수저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마땅하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만 자랑하려고 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자랑해야 자신들에게도 자랑거리가 생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우리 자신의 이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가도록 예수와 한 몸이 되게 하셨다. 예수와 한 몸이 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길이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곧 구원(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이다.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 일이다. 세상 가치관을 따르는 일을 해놓고 하나님께서 다 하셨다고 헛소리 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유식한 말이나 지혜로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려고 하지 않았다. 언변과 지식에 뛰어난 고린도 사람들과 논쟁을 해서는 하나님의 진리를 온전히 전할 수 없기에 바울은 두렵고 떨렸다고 고백한다. 논쟁은 믿음 대신 분열만 조장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전했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이란 곧 하나님의 힘(능력, 열심)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복음의 핵심이다. 세상 가치관을 따라 살면 어리석으며 무능력하며 하나님의 아들(자녀)일 수 없다. 십자가는 세상가치관을 거스리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이 믿음이다. 임마누엘이 믿음이다.

고린도전서 1:18-25

고린도전서 1:18-25 (공동번역)

멸망할 사람들에게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 성서에도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없애버리고 똑독하다는 자들의 식견을 물리치리라.” 하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제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또 이 세상의 이론가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지혜로운 경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소위 어리석다는 복음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다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

고전1:18-25
//18절에서 십자가의 이치가 하나님의 힘/능력이라고 선포한다. 24절에서 예수가 곧 메시아며 하나님의 힘/능력이며 하나님의 지혜라고 선포한다. 곧 그리스도 예수가 십자가의 이치이며 하나님의 힘/능력이다. //힘(능력)이란 말(이론)이 아니라 실현(구현력)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언변과 지식에 넉넉하고 모든 은총을 받았다고 하는 말은 칭찬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중의적 의미이기도 하다. //유대인들이 찾는 기적이나 그리스인들이 찾는 지혜는 모두 자기 입맛에 맞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수 많은 기적/표적을 보이셨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예수의 기적은 그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었다. 그들이 안식일을 거스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던 이유다. 그리스인들에게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부활을 모르는 사람들이 죽음을 구원으로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저주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 하나님은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고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길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힘)을 드러내셨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하다.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실함이 믿음이다.

고린도전서 1:10~17

고린도전서 1:10~17(공동번역)

형제여러분,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호소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의견을 통일시켜 갈라지지 말고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굳게 단합하십시오. 내 형제 여러분, 나는 클로에의 집안 사람들한테 들어서 여러분이 서로 다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여러분은 저마다 “나는 바울로파다.” “나는 아폴로파다.” “나는 베드로파다.” “나는 그리스도파다.” 하며 떠들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갈라졌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것이 바울로였습니까? 또 여러분이 바울로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단 말입니까? 나는 여러분 가운데서 그리스보와 가이오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은 것을 하느님게 감사드립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내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아무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기는 스테파나 집안 사람들에게도 세례를 베푼 일이 있으나 그 밖에는 아무에게도 세례를 베푼 기억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

고전1:10-17
//언변과 지식에 뛰어나고 많은 은사를 받은 고린도교회는 여러 파벌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거두절미하고 바로 그들에게 같은 말과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단합하라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언변과 지식에 뛰어나면 자기 주장이 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인다. 교회 안에서도 유유상종이다. 그러나 성도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해야 하는 관계다. //바울은 자신이 세례를 베푼 사람들을 열거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자신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바울파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다. 나아가 자신이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은 세례를 베풀기 위함이 아니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한다. //바울은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만다고 말한다. 언변과 지식과 은사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드러낼 수 없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 한다. 성도는 각자도생이 아니라 공동체로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로 단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도라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해서 같은 말, 같은 생각, 같은 뜻으로 단합해야 한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우리의 생각을 그리스도에게 복종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1-9

고린도전서 1:1-9 (공동번역)

하나님의 뜻으로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로가 우리 교우 소스테네와 함께 고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각처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함께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뿐만 아니라 각처에 있는 모든 성도들의 주님이십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총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내려주시기를 빕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여러분이 받은 하느님의 은총을 생각하면서 나는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갖추게 되었고 특히 언변과 지식에 뛰어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에 깊은 확신을 가졌으며 모든 은총의 선물을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시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도 여러분이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끝까지 굳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진실하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당신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게 해주셨습니다.

고전 1:1-9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사도도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도 된다. 물론 사도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다. 따라서 고린도전서는 아버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를 누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곧 교우가 서로 주고받은 편지다. 발신자는 바울과 소스데네며, 수신자는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성도다. 오늘날 성경을 읽는 우리도 수신자의 자격을 갖춘다. //소스데네? 사도행전 18장에 나오는 유대인 회당장 소스데네? 바울로 인한 소동 때문에 법정에서 매를 맞은 사람? 그로인해 그는 유대교 지도자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인물이다. 바울이 소스데네 이름을 언급함으로 자신과 고린도교회는 악연이 아니라 편지를 써야할 필요가 있는 관계라는 것을 어필하는 것 같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통로다. 일반은총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지 않고도 받지만 은혜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는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는 단순히 은혜의 통로가 아니다. 같이 사는 (교제하는) 존재다. 임마누엘이야 말로 은혜중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임마누엘이 아니라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받은 은총이라고 떠벌여도 아무것도 아니다. 임마누엘이 곧 구원이기 때문이다. //임마누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사귐이다. 이 사귐이 없다면 마지막 심판날에 살아남을 수 없다. 예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고 말씀하시면 모든 것이 도루묵이 되고 만다. 이보다 더 큰 낭패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날을 고대하며 사는가? 진심으로 묻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날을 고대하며 산다면 말씀으로 매일 그리스도 예수와 교제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스도 예수와의 사귐/교제가 고린도전서의 주제가 아닐까 한다.

출애굽기 18:13-27

출애굽기 18:13-27 (공동번역)

이튿날 아침, 모세가 백성들의 소송을 재판하기 위하여 재판석에 앉았다. 백성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모세 둘레에 서 있었다. 모세의 장인은 모세가 백성을 다스리느라고 애쓰는 모습을 보고 말하였다. “백성을 이렇게 다스리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둘러서 있는 이 백성을 왜 혼자 앉아서 다 처리하는가?” 그러자 모세는, “하느님께서 판가름해 주셔야 할 일이 생기면 저에게로 옵니다. 무슨 일이든지 생기면 저에게로 옵니다. 이웃끼리의 문제를 제가 재판해 주고 하느님께서 지키라고 주신 규칙도 알려주어야 합니다.” 하고 설명하였다. 모세의 장인이 그에게 충고하였다. “이렇게 해서야 되겠는가? 자네뿐 아니라 자네가 거느린 이 백성도 아주 지쳐버리고 말겠네. 이렇게 힘겨운 일을 어떻게 혼자서 해내겠는가? 이제 내가 한마디 충고할 터이니 들어보게. 아무쪼록 하느님께서 자네를 도와주시기 바라네. 자네는 백성의 대변인이 되어 그들이 제시하는 소송들을 하느님 앞에 내어놓게. 그리고 그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알려주어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르쳐주게.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참되게 살며 욕심이 없고 유능한 사람을 찾아내어 배것을 다르시레 세워주는 것이 좋겠네. 천명을 거느릴 사람, 백명을 거느릴 사람, 오십명을 거느릴 사람, 심명을 거느닐 사람을 세우게. 언제나 그들을 시켜 백성을 다스리게 하고 큰 사건만 자네에게 가져오도록 하게. 작은 사건은 모두 그들에게 맡겨두게. 그들과 짐을 나누어 자네 짐을 덜도록 하게. 자네가 이와 같이 일을 처리한다면, 이것이 곧 하느님의 뜻에도 부합되고 자네 일도 다 감당할 수 있어 이 백성이 모두 만족해서 집으로 돌아갈 것일세.” 모세는 장인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하였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유능한 사람들을 골라내어 백성의 지도자로 삼았다. 천명을 거느릴 사람, 백명을 거느릴 사람, 오십명을 거느릴 사람, 십명을 거느릴 사람을 세워 늘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들은 어려운 일은 모세에게 가져왔지만 사소한 일들은 모두 자기네가 다스렸다. 얼마 있다가 이드로는 모세의 배웅을 받으며 제 고장으로 돌아갔다.

출18:13-27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충고. 가르치는 일이든 재판하는 일이든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워 짐을 나누어 처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고 백성들도 만족시키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드로의 이런 지혜는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드로는 (보조)지도자의 자격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참되게 살며 욕심이 없고 유능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전제가 하나님(신)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이드로는 모세와 출애굽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야훼’ 라는 하나님(신)의 이름 직접 사용하지만 일반적인 대화에서는 그냥 하나님(엘로힘)을 사용한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직 ‘야훼’ 하나님에 대해 잘 모르는 시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자라면 하나님(신)을 두려워해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공동번역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여 참되게 살며 욕심이 없고 유능한 사람을 보조 지도자로 세우라고 했는데, 개역개정에서는 능력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일을 미워하는 자라고 번역한다. ‘유능한과 능력있는’은 위치가 바뀌었고 ‘참되게는 진실하며’로 ‘욕심없고는 불의한 일을 미워하는’과 짝을 이룬다. 그렇다면 불의한 일을 미워한다는 것은 곧 욕심이 없다는 뜻이다. 재판관, 지도자는 욕심이 없어야 한다. 뇌물에 대한 유혹에 빠지기 쉬운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최종 심판자이신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우리는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보조 지도자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존재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돌아갔다. 모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이방 제사장인 장인 이드로에게 이집트 왕궁에서도 배우지 못한 행정능력을 배웠다. 일반은총적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은 민족적 국지적 하나님(신)을 뛰어넘는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은 기독교의 하나님(신)을 초월한다. 따라서 외부에서 교회에 유입된 것이라도 창조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치관이 반영된 것이라면 지혜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창조주 하나님을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경건이다. 불신앙이다. 하나님은 종교보다 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