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4:1-10

야고보서 4:1-10

1-3 싸움과 분쟁의 원인은 욕정에서 나온다. 욕심을 내다 얻지 못하면 살인하고, 시기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면 싸우고 분쟁을 일으킨다. 하느님께 (지혜)를 구하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 하느님께 (지혜)를 구했는데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다. 4-5 절조 없는 사람들! 이 세상과 짝하면 하느님과 등지게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 세상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느님과 원수가 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질투하실 만큼 사랑하신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6 성서에는 또 하느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을 주신다는 말씀도 있다.7 그러므로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를 대항해야 한다. 악마를 대항하면 악마가 우리를 떠나 달아날 것이다. 8 하느님께 가까이 가야한다. 그 만큼 하느님이 우리에게 다가 오신다. 죄인이라면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하고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은 순결한 마음 가져야 한다. 9 (죄에 대해)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울어야 한다. 웃음을 슬픔으로 기쁨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바꾸어야 한다. 10 주님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어야 한다. 그래야 주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신다.

야고보소 4:1-10
//야고보는 믿음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받은) 지혜를 동일시하며, 한편으로 싸움과 분쟁은 믿음/지혜와 대비 되는 것으로 언급한다. 싸움과 분쟁의 원인을 욕심이라고 하니 결국 욕심이 믿음/지혜의 상대어다. //따라서 하나님께 구해도 얻지 못하는 이유를 욕정으로 구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믿음/지혜 없이 구하는 것이 욕정/욕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우리)의 간구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뜻대로 구한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지혜/뜻대로 구하면, 곧 믿음으로 구하면 당연히 응답받는다. 말씀의 성취이기 때문이다. //욕정을 따라 기도한다면, 그것은 나의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바꾸려는 교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교만을 싫어하신다. 하나님의 뜻보다 나의 뜻이 앞서는 것은 세상 가치관이 지향하는 바다. 그러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세상과 짝을 짓게 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총을 베푸신다. //세상 욕정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록 하나님과 멀어지게 된다. 세상 욕정과 멀리할 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고, 그 만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악마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절조 있는 삶이다. 그러나 우리 맘대로 쉽게 안 되니, 성도라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으로 괴롭고 슬프고 애통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우리가 죄를 씻고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피가 필요하다는 것을 겸손이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께 나가는 유일한 길이 예수다. 예수 안에 거해야 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하나님께만 나아갈 수 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과 같이 높여 주신다.

야고보서 3:13-18

야고보서 3:13-18

13 야고보는 믿음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지혜를 동일시 한다. 꾸짖지 않고 후히 주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지혜는 온유한 마음과 착한 행실로 드러내야 한다. 14- 16 마음 속에 고약한 시기심과 이기적인 야심이 있어 공연히 잘난 체하고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하늘로부터 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세속적이며 동물적이며 악마적이어서, 하는 행실도 시기와 이기심으로 공동체를 분란시키고 온갖 더러운 행실을 행하기 마련이다. 17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는 순결하고 평화롭고 점잖고 고분고분하고 자비와 착한 행실을 하며 편견과 위선이 없다. 18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평화를 심어서 정의의 열매를 거둔다.

야고보서3:13-18

//믿음과 하나님으로부터 받음 지혜는 같다. 믿음에 올바른 행함이 따르듯이, 지혜에도 온유한 마음과 착한 행실이 따른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를 대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기와 이기심으로 공동체를 분란시키고 온갖 더러운 행실을 행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의 산물이 아니며 믿음도 아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는 순결하고 평화롭고 점잖고 고분고분하고 자비와 착한 행실을 하며 편견과 위선이 없다고 한다. 야고보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행복하고,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행복하고,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행복하고,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말씀을 하나님의 지혜라고 적용한 것은 아닐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평화를 심어 정의의 열매를 거둔다는 구절에서도 정의를 구원의 열매로 보는 야고보의 시각을 확인하게 된다. ////믿음은 지혜, 곧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드러나야 한다. 가장 확실한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가장 확실한 길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두는 것이다.

야고보서 3:1-12

야고보서 3:1-12

1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아라. 가르치는 사람들은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된다. 2 우리는 모두 실수하는 일이 많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 몸을 잘 다스실 수 있는 완전한 사람이다. 3 말은 입에 자갈을 물려야 고분고분해진다. 자갈을 물려야 말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4-8 큰 배를 작은 키로 조종하듯이 이와같이 혀도 인체에서 작은 부분이지만엄청나게 허풍을 떤다. 아주 작은 불씨가 큰 숲을 불살라 버릴 수 있다. 혀도 불과 같이 온 몸을 더럽힐 수 있다. 혀는 악의 덩어리요 결국 지옥불에 타버리고 말 것이다. 사람은 동물들을 길들일 수 있지만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혀는 휘어 잡을 수 없는 악한 것이다. 혀에는 사람을 죽이는 독으로 가득차 있다. 9 우리는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양하기도 하고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한다. 같은 입에서 찬양도 저주도 나온다. 이래서는 안 된다. 같은 샘 구멍에서 단 물과 쓴 물이 함께 솟아 나올 수는 없다. 무화과나무에 올리브 열매가 달릴 수 없고 포도 덩굴에 무화과가 달릴 수 없다. 짠 물에서 단 물이 나올 수 없다.

야고보서 3:1-12
//신행일치/언행일치가 믿음이라고 했다. 선생이 되지 말라는 이유는 선생들처럼 말만하고 실천하지 않는 존재가 되지 말라는 의미다. 믿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죽은 믿음이듯, 가르치기만 하고 본이 되지 않으면 선생일 수 없다. 선생은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지식을 익혀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예체능계에서는 어느 선생님으로부터 사사 받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이론만이 아니라 체득해서 배우는 내용이 더 귀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언행일치도 중요하지만 말(언)자체도 중요하다. 어떤 말을 하느냐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 언행일치라고 사악한 말을 하고 지키는 것은 안 될 일이다. 사악한 말을 했다면 뉘우치고 돌이켜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에 실수가 많다. 혀를 제어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은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을 내뱉는다. 그렇다면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이 깨끗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삼갈 수 밖에 없다.
//바울이라도 선을 행하기 원하는 자신에게 악이 함께 있다며 자신을 곤고한 사람이라고 탄식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바울이라도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긴다고 고백하지 않는가? 하물며 우리랴! 한 입으로 찬양과 저주를 한다. 그렇다고 이것을 마땅히 여겨서는 안 된다. 육신의 생각 대신 영을 따라야 한다. 그래서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하고,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는 보혜사 성령의 음성에 따라야 한다. 혀를 제어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길이다.

야고보서 2:14-26

야고보서 2:14-26

14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행동으로 나타내지 못하는 믿음은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15-16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 하고 말만 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17 믿음도 이와 같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이다. 18 행동으로는 믿음을 보여줄 수 있지만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을 보여줄 수는 없다. 19 행동이 없 믿음은 마귀들이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고 무서워 떠는 것과 마찬가지다. 20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1-23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친 행동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를 관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은 믿음과 행동이 일치했습니다. 행동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 하느님을 믿었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성경말씀 그대로 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하느님의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24 그러므로 사람은 믿음만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을 아십시오. 25 창녀 라합도 정탐꾼을 대접하고 보낸 행동으로 말미암아 올바를 사람으로 인정받은 것이 아닙니까? 26 영혼이 없는 못이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행동이 없는 믿음도 죽은 믿음입니다.

야고보서 2:14-26
//믿음의 유무는 행함으로 알 수 있다. 나무의 좋고 나쁨을 열매로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열매가 없다면 죽은 나무나 마찬가지듯, 행함이 없다면 죽은 믿음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행함으로 믿음을 인정받았다. 언행일치. 아니 신행일치로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라는 별칭도 얻었다. 친구란 어떤 존재인가? 의리, 곧 신의가 있는 사람이다. 신의는 반드시 행함으로 증명 된다.
//두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께 예라고 대답을 하고 순종하지 않은 아들과 아니오라고 대답하고 뉘우쳐 순종한 아들을 생각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답이 나온다. 대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함(순종)이 부자관계를 완전하게 한다. 부자유친이다.
//라합의 믿음은 무엇일까? 여리고성 사람들은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소문에 모두 마음이 녹았었다. 라합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모두 마음이 녹을 정도였으면 그들에게도 믿음이 생길 법하지 않은가? 그러나 믿음대로 행한 사람들은 라합 일가 밖에 없었다. 사실을 아는 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다. 감정의 변화만을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다. 믿음에는 합당한 행함이 따라오게 마련이다. 녹은 마음이 하나님 뜻에 순복할 때야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은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질문을 하게 한다. 그리고 주어진 답에 대한 우리의 순종이 살아 있는 믿음이다.

야고보서 2:1-13

야고보서 2:1-13

1 주님이신 영광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사람들을 차별해서 대우해서는 안 된다. 2-4 사람들을 차림새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 특벼한 호의를 보이고, 가난해 보이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차별대우요 불순한 생각의 결과다. 5 하느님은 이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택해 믿음을 부요하게 하시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해 주신 하나님나라를 차지하게 해주신다. 6 그러니 우리는 가나한 사람들을 업신여기면 안 된다. 오히려 부자들이 우리를 압박한다. 부자들이 우리들을 법정으로 끌고간다. 7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자들도 부자들이다. 8 우리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한 최고의 법을 지켜야 잘 한다고 칭찬받는다. 9 그러나 차별 대우를 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요 계명을 어기는 일이다. 10 누구든지 계명을 다 지키다가도 한 조목을 어기면 계명 전체를 범하는 것이 된다. 11 간음하지 않았어도 살인하면 결국 계명을 어긴 것이다. 12 우리는 우리를 자유케 하는 법에 따라 심판을 받을 사람들이다. 그러니 우리를 자유케 하는 법에 따라 말하기도 행하기도 해야 한다. 13 무자비하면 무자비한 심판을 받는다. 그러나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

야고보서 2:1-13
구원의 가장 큰 표징은 정의라고 했다. 정의는 하나님 앞에서 더러움이 없고 정결한 경건이 공동체적으로 들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정의로워야 한다. 야고보는 믿음이 정의로 드러나는 예로 사람을 옷차림으로 차별하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옷차림이라고 말했지만 핵심은 빈부차이로 사람을 대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빈부차이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공동번역은 불순한 생각이라고 번역했지만 개역개정은 악한 생각이라고 번역한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첫번째를 다시 소환해보자. 가난한 사람이 천국을 소유하는 복을 누린다. 심령마저 가난할 정도로 빈곤하다면 하늘나라의 행복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부하면 천국에 들어가기 쉽지 않다. 정의를 실천하며 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압제하면서는 천국 백성으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부자청년도 소환해보자.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지켰다고 자부해도 정의롭지 않으면, 곧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고 예수를 따르는데 주저하고 세상근심을 하게 되면 계명을 어긴 것과 같다.
//정의로움은 자비로 드러난다. 우리가 가난하지 않다면 자비로워야 한다. 자비로워야 자비를 입는 복을 누리기 때문이다. 자비를 입는 복이 곧 천국을 소유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부자는 아니지만 확실히 가난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나도 더 자비롭게 살아야 한다. 사회적 약자 편에 서야 한다. 정의는 외쳐야 할 구호가 아니라 살아내야 할 삶이다. 정의를 구현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기득권자가 기득권을 포기하고 약자에게 자비를 베풀 때라고 생각한다. 자비가 심판을 이긴다는 것은 자비로운 자가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자비를 입는 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