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19:129-144

시인이 주의 증거라는 표현을 반복할 정도로 주의 말씀은 말에서 그치지 않는다. 확실한 증거가 따르기에 시인은 놀랄 수 밖에 없고 시인은 영혼까지 주의 말씀을 지킨다고 노래한다.
주의 말씀은 빛이다. 말씀의 빛이 비치면 우둔한 자도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해할 수록 사모하게 되는 것이 주의 계명이다. 주의 계명에 갈급하게 된다.
말씀의 빛은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비친다. 이 빛의 조명을 받는 것이야 말로 은혜를 받는 것이다.
은혜받은 자는 주님의 길을 따른다. 주님의 길을 벗어나게 하는 그 어떤 죄악도 시인을 주관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만큼 유혹이 많은 세상이다.
세상유혹은 반대로 말하면 박해다. 시인은 이 박해로부터 구해달라고 간구한다. 그래서 주의 법도를 지킬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무도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 그러나 주님의 빛, 주님의 빛되신 말씀의 조명을 받을 수는 있다. 시인은 주님의 율례를 배우는 것이 곧 주님의 빛에 비췸을 받는 것이요, 그 때 주님이 주님의 얼굴을 자기에게 향하신다고 노래하는 것을 아닐까?  주님의 말씀만이 우리 마음을 청결하게 한다.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본다고 가르치셨다.
주의 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에 대해 한편으로 분노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리게 된다. (하나님의 얼굴을 느낀) 시인이 주님의 마음을 노래하는 것이다.

주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다. 행위대로 갚으신다.
주님의 약속은 의롭고 주님은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신다.
그런데 대적들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니 어쩌랴. 시인은 몸이 달아 오른다.
주의 말씀은 심히 순수하다. 시인이 주의 말씀을 사랑하는 이유다.
불순한 세상은 시인을 미천하게 평가하고 멸시하나 시인은 주의 법을 떠나 살 수 없다. 순수한 주님의 약속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주님의 의는 영원한 의요 주의 법은 진리다.
그래서 시인은 고난 가운데서도 즐거워 한다.
주의 약속이 영원히 의롭다는 것을 깨닫고 사는 것이 영생이다.

시편 119:113-128

시인은 두마음을 품지 않는다. 아니 두마음을 품는 자들을 미워한다. 시인은 오로지 주의 법을 일편단심으로 사랑한다. 야고보는 두 마음을 품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시인의 마음을 풀어준다.
시인은 재물이 피난처가 될 수 없음을 알았다. 주님만 피난처요 방패라고 노래한다. 시인은 끊임없이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동일시한다. 주의 말씀을 바라는 것은 곧 주님의 말씀을 바라는 것이다.
시인은 행악자들을 떠나 주님의 계명을 지키겠다고 다짐한다.
주의 말씀이 생명길이요 수치를 당하지 않을 소망임을 알기에 그 길을 완주하도록 기도한다.
주님의 도우심 없이는 구원의 길을 완주할 수 없기에 주님의 율례들을 주의 도우심으로 (이정표로) 삼는다.
주의 율례를 떠나는 자들로부터 주님께서도 떠나시는 것을 본 시인은 행악자들의 속임수의 결국이 허무함임을 알았다.
주님은 모든 악인들을 찌꺼기 같이 버리신다. 저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바람에 밀려 요동치는 물결같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임마누엘의 증거가 있다. 주의 말씀을 사랑하는 이유다.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주님 앞에서 시인도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 주의 심판을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주님의 증거를 사랑할 수 밖에 없다.)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주님 앞에서 시인의 살 길은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이었다. 정의와 공의를 행함으로 핍박을 받을 때 핍박자로부터 지켜달라고 기도한다.
정의와 공의를 행할 때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조롱하는 오만한 자들의 입을 마물게 해달라고 시인은 주님의 복을 구한다.
시인이 구하는 복은 구원이요 주의 말씀이요 곧 주님이시다. 임마누엘이다. 시인이 학수고대하는 바다. (이 구원을 우리는 보고 누리니 감사하다.)
시인은 여전히 부족한 자신을 안다. 그래서 주의 인자하심을 바란다. 주께서 행할 바를 친히 가르쳐 달라고 구한다.
주인의 뜻을 잘 이해하는 종이 되게 해달라고 구한다.
주의 법이 무엇인지 모르는 행악자들이 주의 법을 폐했으니 주님이 다시 주의 법을 세워달라고 시인은 간구한다.
시인은 주님이 시인을 통해서 일하시고 주님의 법을 다시 세우심을 알았다 그래서 시인이 주의 계명을 재물보다 더 사랑하고 지킨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시인은 범사에 모든 주의 법을 폐하지 않고 지키며,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한다.

// 주님은 주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키는 순종하는 자들을 통하여 일하신다.

시편 119:97-112

시인은 오늘도 하루종일 주의 법을 작은 소리로 읊조린다. 주야로 묵상한다.
시인에게 임마누엘이란 주의 계명과 함께 하는 것, 즉 주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임마누엘이 원수들보다 시인을 지혜롭게 한다고 노래한다.
시인은 임마누엘의 증거로 주야로 주의 말씀을 읊조리리는 것이다. 임마누엘의 주님이 선생되어 주셔서 시인을 가르친다.
주의 법도에 순종하는 시인에게 주님은 함께 하시고 친히 행할 길을 가르쳐 주시니 노인들보다도 명철하다.
명철중의 명철은 모든 악한 길에 발을 딛지 않는 것이다.
철저하게 임마누엘의 주님께 배우고 찰라라도 한눈팔지 않고 주의 규례들을 지킨다고 노래한다.
주의 말씀의 맛이 꿀보다 더 달다고 노래한다.
주의 말씀이 시인을 명철하게 하니 당연한 고백이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명철은 거짓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시인이 명철하게 된 것은 빛되신 주의 말씀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주의 말씀은 등대처럼 갈 방향도 알려 주시고 한걸음 한걸음 발밑도 비춰주는 빛이다.
시인은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에서 빛되신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따라 가기로 다짐한다.
고난이 매우 심하지만 빛되신 주님을 푯대로, 빛되신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르면 산다는 소망이 시인에게는 확실하다.
주의 말씀대로 살게 하시는 주님께 감사하며, 한편으로는 생명의 양식인 주의 공의로운 말씀을 또 배운다.
시인은 생명과 주의 법의 동전의 양면이라고 노래한다. 생명이 있는 곳에 주의 말씀이 있고 주의 말씀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다. 그러나 시인은 생명의 위기를 느끼며 산다. 그만큼 세상에서 주의 말씀을 지키며 살기 어렵기 때문이리라.
그렇다. 악인들은 시인을 해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본다. 시인은 주의 법도들을 지키므로 (임마누엘,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대비한다.
주의 법도를 지킨 삶이 시인이 받은 복이다. 이 복들을 세어 보는 것이 시인에게는 즐거움이다. 이 복을 늘려가는 것이 시인의 바람이다.
시인은 하늘에 복을 쌓는다.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시편 119:81-96

주의 구원을 사모하는 것과 주의 말씀을 바라는 것은 같은 것이다. 즉 구원이란 주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시인은 영혼이 피곤할 정도로 주의 구원을 사모하고 주의 말씀을 바란다고 노래한다.
시인은 주의 말씀이 곧 주의 위로라고 노래한다. 주의 위로는 주의 구원이다. 결국 임마누엘이다. 주님은 주의 말씀을 바라는 자들을 구원하시고 위로하신다.
주의 말씀대로 사는 삶은, 주의 구원을 바라는 삶은 오리무중의 길을 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안개등을 켜고 조심스럽게 주님의 길을 따라 가야한다. 주님의 길을 벗어나서는 안된다.

인생은 칠십이고 강건해야 팔십이다. 요즘은 백세인생을 노래한다지만 길지 않는 인생길이다. 시인은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도 소망한다.
저들은 주님의 법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다. 주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큰 소리 치는 교만한 자들이다. 저들은 주님의 길에 웅덩이를 파서 시인이 따라가는 주님의 길을 방해한다.
저들은 주의 계명을 따르는 자들을 이유없이 핍박한다.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인의 도움은 주님밖에 없다.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저들의 핍박이 심하나 시인은 그래도 주의 법도들을 버릴 수 없다고 노래한다.

주의 인자하심이 시인을 살릴 것이라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주의 약속이 주의 인자하심이기 때문이다.
주의 약속은 영원하다.
주의 약속은 미쁘다. 창조주가 하신 약속이다.
모든 만물이 창조주의 종이다.

시인은 주의 약속을 소망하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노래한다. 고난 중에도 멸망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이유라고 노래한다.
자신을 지켜준 주의 말씀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노래한다. 주의 말씀이 삶의 이유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시인은 주님의 것이다. 주님이 구원하셔서 주님이 함께하심을 기대한다. 임마누엘! 주의 약속이다.
악인들은 여전히 시인을 멸하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으나 시인은 주의 약속을 피난처로 삼는다.
세상에 시인이 완전한 피난처로 삼을 곳은 없다. 오직 넓고 넓은 주의 계명으로 피해야 한다. 주의 계명을 따라 살아야 한다.

오리무중의 길을 걸을 때 빛되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게 하소서.

시편 119:65-80

주님과의 언약은 주님이 주님의 종을 선대하시는 것이다. 주의 계명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주님의 선하심에 의지하여 믿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시인은 말씀에 대한 통찰력과 지식을 구할 수 밖에 없다.

시인은 심지어 고난마져도 주님의 선한 인도하심임을 노래한다. 고난을 당하지 않았으면 주의 약속에서 빗나갔음을 몰랐을 것이라고 고백한다. 고난을 통해 잘못된 길을 걷고 있음을 알았으니 이제 다시 주의 말씀대로 걷겠다고 한다.

주님은 선하시다. 주님의 행위는 선하시다. 시인이 배우고자 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선하심이다. 세상이 주님 외에도 선한 것이 있다고 거짓으로 우리를 꾀어도 시인은 그럴수록 주님의 법들을 지키겠다고 약속한다.

세상은 (마음도 비만에 빠져) 탐욕도 선하다고 가르치나 시인은 절제의 다이어트를 가르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한다. 그래서 고난마져도 유익이라고노래한다. 고난이야말로 탐욕에 빠지지 않게 하는 구명조끼다. 주의 법을 읊조리는 기쁨을 천천의 금은보다 좋다고 노래하는 이유다.

주님이 나의 소유자다. 나를 지으셨다. 주님의 계명들이 나의 설명서다. 주를 경외하는 자들은 시인이 주님이 지으신대로, 주님의 설명서대로 행하는 것을 기뻐한다. 왜냐하면 주님은 행한대로 갚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심판은 철저하게 행한대로 갚으신다. 그래서 의로우신 주님은, 주님의 선하심을 베푸시기 위해 고난을 통해서라도 주님의 백성를 돌이키신다. 그러니 고난은 주의 백성을 향한 주님의 성실하심이다.

따라서 고난은 주의 인자하심을 드러내심이요, 시인에게는 위로가 된다. 고난은 주의 긍휼하심으로 주어진 것이요 시인을 살리는 방법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것을 깨닫게 하는 주의 법을 즐거워 한다.

세상은 주님 외에도 선한 것이 있다고 거짓교훈을 가르치나, 그들은 결국 수치를 당할 것이다. 주님의 인정하심을 받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실 것이다. 그러나 주의 법도를 읊조리며 묵상하는 시인은 의인들의 (주를 경외하는 자들의) 회중에 들어가게된다. 주를 경외하는 자들과 함께 주의 증거들을 선포하게 된다.

그래서 시인은 “내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간구한다. 심판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시는 것보다 더 큰 수치가 있을까?

형통보다 고난이 주님의 길로 인도하는 이정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