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을 척화파 고관들은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는 노략물을 얻음 같이 자기의 목숨의 건지리라’로 들렸다. 명분을 중요시 하는 척화파들은 예레미야를 주화파로 몰아부쳤다.
척화파 고관들의 바람은 아리러니하게도 평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선지자라면 백성의 평안을 구해야 하는데 오히려 재난을 구하니 (이런 예레미야도 평안에 아멘 했었다, 그러나 선지자는 백성의 뜻을구하는 자가 아니요 주님의 뜻을 대언하는 자가 아닌가?) 예레미야는 척화파들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시드기야는 척화파들의 명분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척화파들은 명분을 앞세워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집어넣었다. 시드기야는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번뇌했을 것이다.
예레미야에 대한 개인적 구원의 손길은 엉뚱한 곳, 왕궁 내시 구스인 에벳멜렉으로부터 왔다. 주님은 이방인이요, 내시인 에벳멜렉을 사용하셨다. 그도 척화파들의 행동이 악하다는 것을 알았다. 정치적 종교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원수를 굶겨죽이는 것은 악한 것이다라고 시드기야 왕에게 충언했다.
시드기야 왕은 에벳멜렉의 말을 듣고 예레미야를 구하라고 명한다. 에벳멜렉은 헝곂과 낡은 옷으로 밧줄을 만들어 내려보내 예레미야를 끓어 올렸다.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로 옮겨져 척화파로부터 보호받았다.
// 구스인 내시는 씨없는 자다. 씨를 뿌릴 수 없는 자이기도 하지만, 이방인이니 말씀이 없는 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에벳멜렉이 말씀을 맡은 자, 유다의 고관들보다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와 말씀에 따른 삶이 있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 말씀을 맡은 예레미야도 살기 위해서는 씨없는 자 내시의 말에 순종해야 했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를 갖는가?
// 명분과 실리는 공존할 수 없는가?
// 예레미야는 마치 요셉이 구덩이에서 건져냄을 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린 것 처럼, 구덩이에서 건짐을 받아 시위대의 마당에 갇혔다. 주님과 동행하는 자가 누리는 형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종종 다르게 이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