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8:1-13

주님이 예레미야에게 주신 말씀을 척화파 고관들은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는 노략물을 얻음 같이 자기의 목숨의 건지리라’로 들렸다. 명분을 중요시 하는 척화파들은 예레미야를 주화파로 몰아부쳤다.

척화파 고관들의 바람은 아리러니하게도 평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레미야가 선지자라면 백성의 평안을 구해야 하는데 오히려 재난을 구하니 (이런 예레미야도 평안에 아멘 했었다, 그러나 선지자는 백성의 뜻을구하는 자가 아니요 주님의 뜻을 대언하는 자가 아닌가?) 예레미야는 척화파들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시드기야는 척화파들의 명분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척화파들은 명분을 앞세워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집어넣었다. 시드기야는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번뇌했을 것이다.

예레미야에 대한 개인적 구원의 손길은 엉뚱한 곳, 왕궁 내시 구스인 에벳멜렉으로부터 왔다. 주님은 이방인이요, 내시인 에벳멜렉을 사용하셨다. 그도 척화파들의 행동이 악하다는 것을 알았다. 정치적 종교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원수를 굶겨죽이는 것은 악한 것이다라고 시드기야 왕에게 충언했다.

시드기야 왕은 에벳멜렉의 말을 듣고 예레미야를 구하라고 명한다. 에벳멜렉은 헝곂과 낡은 옷으로 밧줄을 만들어 내려보내 예레미야를 끓어 올렸다.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로 옮겨져 척화파로부터 보호받았다.

// 구스인 내시는 씨없는 자다. 씨를 뿌릴 수 없는 자이기도 하지만, 이방인이니 말씀이 없는 자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에벳멜렉이 말씀을 맡은 자, 유다의 고관들보다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와 말씀에 따른 삶이 있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 말씀을 맡은 예레미야도 살기 위해서는 씨없는 자 내시의 말에 순종해야 했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를 갖는가?
// 명분과 실리는 공존할 수 없는가?

// 예레미야는 마치 요셉이 구덩이에서 건져냄을 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린 것 처럼, 구덩이에서 건짐을 받아 시위대의 마당에 갇혔다. 주님과 동행하는 자가 누리는 형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종종 다르게 이루어진다.

예레미야 37:11-21

애굽의 출정소식으로 바벨론 군대는 잠시 예루살렘 포위를 풀고 후퇴했다. 이것은 예레미야의 예언이 틀린 것처럼 보인다. 평화를 외치던 거짓선지자들이 예언이 응한 것처럼 보인다.

예레미야는 ” 평화를 예언하는 선지자는 그 예언의 말이 응한 후에야 그가 진실로 주님이 보내신 참 선지자로 인정 받게 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28:9)

이런 예레미야가 (무슨 이유였던 간에) 예루살렘을 떠나고자 하였으니 척화파 사람들은 주화파 예레미야를 바벨론으로 망명하려고 했다고 의심하여 잡아 가둔다.

이 와중에 시드기야 왕은 은밀하게 예레미야에게 다시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예레미야는 평화를 예언한 선지자들이 어디있느냐고 반문한다. 예레미야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확실한 말씀, 재앙의 예언을 다시 전한다. 그러면서 땅굴에 다시 가두지 말아달라고 간청한다. 시드기야 왕은 예레미야를 감옥 뜰로 옮겨주고 먹을 것도 주었다.

// 시드기야 왕은 끊임없이 평화의 예언을 듣고자 했다. 예레미야를 참 선지자로 알았기에 예레미야로부터 평화의 예언을 듣기를 원했다. 그러나 예언은 선지자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온다.
// 애당초 주님이 주신 예레미야가 전한 재앙의 예언은 해피앤딩의 예언이 아닌가? 그런데 재앙이라는 과정이 발목을 잡았다. 반대로 평안하다 평안하다는 예언은 예언이 아니다. 바람일 뿐이다.
// 선지자를 볼모로 잡고 먹을 것을 준다하여도 주님이 뜻을 바꾸실리 없다. 그러니 우리가 금식하며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주님의 뜻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다.

예레미야 37:1-10

다시 시드기야 왕. 아이로닉하게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유다 왕이되었다. 주님께서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친바벨론이 되어야 산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드기야 왕과 신하들은 반바벨론이 된다.

시드기야는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내 /우/리/를 위하여 /우/리/ 주님께 기도해달라고 부탁한다.

타이밍이 맞아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출정했고 예루살렘을 포위했던 바벨론 군대는 잠시 예루살렘을 떠났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응답은 이게 아니었다. 주님은 예례미야에게 시드기야 왕이 보내 온 사람들에게 “너희를 도우려고 왔던 바로의 군대는 자기 땅 애굽으로 돌아가겠고 갈대아 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르리라”라고 대답하게 하셨다.

주님의 기도응답은 변함이 없다. 주님을 /우/리/ 편이라고 우겨도 소용이 없다. /우/리/가 주님편이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고 하신다. 바벨론이 포위를 풀고 떠날 것이라고 자기 암시를 해도 소용이 없다고 하신다. 잠시 포위를 풀었어도 결국은 다시 돌아아 애워쌀 것이라고 하신다. 아니 설령 싸워서 갈대아인의 온 군대를 물리친 것 같아도, 패망한 갈대아 인들에 의해서라도 예루살렘성은 불살라질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은 뜻을 굽히지 않으신다. /우/리/로 /우/리/의 뜻을 굽히라고 하신다.

주님의 뜻을 바꾸려고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마치 애굽이 출정하여 바벨론이 철수했던 것처럼, 설령 상황이 꼭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시고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처럼 변할 수 있지만 주님이 뜻을 바꾸신 것도 기도응답도 아니다. 결국 애굽은 철수하고 바벨론은 더 큰 산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바벨론이라는 산을 움직이는 것은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이다. 그러니 우리는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구해야 한다.

예레미야 36:20-32

바룩에게 돌아가서 예레미야와 함께 숨으라고 말한 고관들은 바룩의 두루마리를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 두고 (두루마리를 보호하려는 의도였을까?) 왕에게 나아가 보고했다. 그러나 왕은 즉시 여후디를 보내 그 두루마리를 가져와 낭독시켰다.

말씀을 직접 들으려고. 천만에 말씀이었다. 여후디가 일정한 양을 읽어내려가면 읽은 만큼 두루마리를 칼로 베어 화로불에 던져 두루마리를 모두 태웠다. 말씀을 들으려는 태도가 아니라 말씀을 듣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왕과 신하들은 (재앙의) 예언을 듣고 마땅히 주님 앞에 두려워 떨며 자신들의 옷을 찢으며 회개의 자리로 나가야 하는데, 도리어 말씀의 두루마리를 찢어 태우다니. 신하들 중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왕께 두루마리를 불사르지 말도록 충언을 했지만 (주님의 말씀도 듣지 않는 ) 왕이 신하들의 말을 들었을리 만무다. 왕은 바룩과 예레미야를 잡아오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들을 숨겨주셨다.

두루마리는 태워졌으나 주님의 말씀이 불살라진 것은 아니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다른 두루마리에다 여호야김 왕이 불사른 첫 두루마리의 모든 말을 다시 기록하라고 명하신다. 그리고 여호야김 왕에게 전하는 에필로그도 더해주셨다.

“나 주가 말한다. 너는 예레미야에게 ‘왜 두루마리에다가, 바빌로니아 왕이 틀림없이 와서 이 땅을 멸망시키고 사람과 짐승을 이 땅에서 멸절시킬 것이라고 기록하였느냐’ 하고 묻고는, 그 두루마리를 태워 버렸다. 그러므로 유다 왕 여호야김을 두고서 나 주가 말한다. ‘그의 자손 가운데는 다윗의 왕좌에 앉을 사람이 없을 것이요, 그의 시체는 무더운 낮에도 추운 밤에도, 바깥에 버려져 뒹굴 것이다. 나는 이렇게, 여호야김과 그의 자손에게만이 아니라 그의 신하들에게도, 그들이 저지른 죄를 벌하겠다. 그들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에게, 내가 경고하였으나 그들이 믿지 않았으므로, 내가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겠다.”(28~31 새번역)

//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 두시는 분이 계신다. 바로 주님이시다. 주님은 여호야김 왕에게는 말씀의 빛을 가리셨다. 음~ 여호야김이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버렸다고 해야하나.

// 예레미야와 바룩을 숨기신 분도 주님이시다.

// 평안의 예언이 아니라 재앙의 예언에 이 시대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예레미야 36:1-19

다시 여호야김때로.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요시야 왕 때부터 여호야김 때까지 예언했던 모든 말을 두루마리 책에다 기록하라고 명하신다. 기록의 목적은 분명하다. 유다 가문이 (재앙의) 예언을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면 주님이 유다 가문의 악과 죄를 용서하시기 위함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의 통로다. 복음이다.

예레미야는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불러 주님의 말씀을 대필하게 했다. 그리고 바룩에게 성전에 들어가서 두루마리 책에 대필한 주님의 말씀을 금식일에 백성의 귀에 낭독하라고 부탁했다. 예레미야는 백성이 말씀을 듣고, 주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며 (주님을 노엽게 하고 진노하게 한 ) 각기 악한 길에서 떠날 것을 기대했을까?

바룩은 예레미야가 명령한 대로 성전에서 두루마리에 적어 온 주님의 모든 말씀을 낭독했다. 유다백성들은 이날 금식을 선포했고 바룩은 성전에서 두루마리에 적어온 예레미야의 (재앙의) 예언을 모든 백성에게 낭독했다.

사반의 손자요 그마랴의 아들인 미가야도 바룩의 낭독을 들었다. 그는 왕궁에 가서 고관들에게 자신이 들을 예언의 말을 전했다. 이에 고관들은 바룩에게 두루마리 책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왕궁에서 다시 낭독하게 했다. 그들은 바룩의 낭독에 놀라 왕에게 보고하기로 했다. 한편 그들은 이 재앙의 예언이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궁금해 했고 바룩은 예레미야가 불러주는대로 기록했다고 답을 했다. 고관들은 바룩에게 돌아가서 예레미야와 함께 숨어 있으라고 말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밝게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도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게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 5:14-16 공동번역)”]

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구절이 떠올랐을까? 고관들은 바룩과 예레미야을 숨겨주기보다 함께 재앙의 예언을 낭독하며 다녀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낼 본문을 당겨보니…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