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5

유다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때 이야기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레갑사람들을 불러다가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예레미야는 주님의 말씀대로 레갑사람들을 후손 하바시냐의 손자, 예레미야의 아들인 야아사냐와 그의 형제와 그의 모든 아들과 모든 레갑 사람들의 후손을 데리고 성전에 있는 하나니므이 사람 하난의 아들의 방에 가서 포도주를 마시라고 권했다.

레갑 후손들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했다. 선조 요나답이 후손들에게 한 명령, 즉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너희가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화지도 말고 너희는 평생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라는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라고 이유를 댔다. (아주 자랑스럽게)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한 대로 다 지켜 행하였다고 대답했다.

레갑 후손들이 예루살렘에 머무는 이유는 국제정세의 혼란가운데 피난처로 예루살렘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주님이 이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이유는 불순종의 유다 백성들을 교훈하기 위해서였다. 레갑 후손들의 순종을 배우라는 것이다. 레갑의 후손들은 그들의 선조가 그들에게 명령한 그 명령을 지켜 행하는데 유다 백성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불순종의 백성들에게 재앙은 선포하신다. 그리고 선조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의 모든 규율을 지키며 행한 레갑의 아들 요나답 후손들에게는 영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 5:8)]

공동번역에서는 하나님을 뵙게 될 것이다라고 번역한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후손들이 누린 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마음이 성결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들이다. (약4:8)  시편기자도 내가 두 마음을 품는 자들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합니다.(시 119:113)라고 노래한다.

// 사족1: 인생 길을 운전할 때 술김에 운전을 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주님의 네비게이션에 순종하라고 하신다. 무엇보다도 주어진 법규를 따라 운전하라고 하신다.

// 사족 2: 이스라엘 혈통이 아니라 레갑족속도 영원히 하나님 앞에 서는 복을 받았다. 생각하는 바가 많다.

레갑 가문의 가훈은 인생의 음주 운전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명령한 이 가훈을 후손들은 삼백년 가까이 지켜왔다. 국제정세를 피해 임시 정착한 예루살렘 성에서도 지켰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

인생길을 운전함에 있어 술취하지 말아야 한다. 술취하면 음주운전을 하는 꼴이다. 대신 말씀의 네비게이션에 순종해야 한다. 성령충만의 바탕이다.

#레갑

예레미야 34:8-22

주님의 마음을 돌이키자. 시드기야 왕과 유다 백성들이 가시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바벨론에 에워쌓임을 당한 이유를 정의와 공의 짓밟았기 때문이라고 주님이 끊임없이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들은 정의와 공의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고자 동족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선언했다. 하나님과 계약을 맺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기로 했다는 뜻일 것이다. 주님은 동족 노예를 풀어주는 것은 율법에 따라 마땅한 행동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어쩌랴. 마음에 없는 순종의 모먕으로 어찌 주님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으랴. 마음에 없는 순종의 모양은 능력이 없다. 당연히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얼마지나지 않아 노예를 풀어주는 행위가 아무런 효험이 없자 그들은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노비로 삼았다.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다시 히브리 노예에 관한 율법을 상기시켜 주신다. 그리고 선조때부터 순종하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고 지적하신다. 노예를 자유롭게 풀어주는 계약은 주님앞에 마땅하고 바른 일이었는데 너희가 돌이켜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다시 노비로 삼았다고 책망하신다.

주님은 동족 노예를 자유케 하지 않은 백성들에게 대신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시겠다고 선언하신다. 칼과 전염병과 기근이 유다 백성들을 대적할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칼과 전염병과 기근으로 유다 백성들이 세계 여러나라에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이 모든 것은 유다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긴 결과다. 유다의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시드기야 왕부터 모든 백성까지 바벨론에게 넘기신다고 하신다. 유다 성읍들을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신다.

//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정의와 공의는 주님을 사랑하는 어쩌면 유일한 길이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시드기야와 유다 백성들은 정의와 공의의 모양만 있고  정의와 공의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이었다. 경건의 모양만 있고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과 마찬가지다.

//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딤후 3:2~5)]

// 이같은 자들에게서 돌아서지 않으면 교회도 황무지가 될지도 모른다.

예레미야 34:1-7

예레미야는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에워 싼 대적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과 그의 모든 군대와 그의 통치하에 있는 모든 땅의 모든 나라와 모든 백성’이라고 기록한다. 한마다로 세상 모든 나라와 세상 모든 사람들이다.

주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다. “내가 이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이 성을 불사를 것이라” 불순종 한 백성들의 운명이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에게 나아가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유다 시드기야 왕이라고 해서 그 운명이 다르지 않다고 하신다. 칼에 죽지 않고 평안히 죽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제 예루살렘 주위에는 라기스와 아세가 두 성읍만 남고 다 바벨론에 함락되었다.

// 세상 모든 나라와 세상 모든 사람이 불순종한 교회를 애워싸고 있다. 순종의 길로 나아가야 하는데 어쩌면 칼에 죽지 않고 평안히 죽겠다고 여전히 불순종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순종이다. 두 성읍이라도 남아있을 때가 순종을 의미있게 한다.

예레미야 33:14-2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 집에 대하여 계시하신 선한 말 (복음)을 성취할 날이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선한 말은 복음이다. 복음이 성취되는 날은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이 다윗의 자손 예수로 나셔서 이 땅을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시는 날이다.

주님이 정의와 공의를 실행하시는 날이 구원의 날이다. 샬롬의 날이며 의의 날이다.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리심이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나라에서 예배하는 사람들도, 성도들도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은 복음의 견고성을 시간의 흐름으로 반문하신다. 낮과 밤이 뒤바뀔 수 있다면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도 끊어질 수 있고 하나님나라에서 예배하는 성도들고 끊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낮과 밤이 뒤바뀔 수 없음을 안다. 그러니 주님의 약속은 견고한 복음이다.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나라는 영원하고 성도들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번성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복음이 되어 예레미야에게 끊임없이 주어진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불순종으로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 더 이상 하나님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이게 끝은 아니다. 낮과 밤을 정하시고 천지의 법칙을 주님께서 만드셨듯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의 세계의 영원함도 주님의 법칙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신다고 하신다.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신다고 말씀하신다.

// 복음은 주님이 말씀하신 선한 말의 성취다. 이 복음은 낮과 밤이 바뀔 수 없듯이 견고하다. 복음은 결국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다.

예레미야 33:1-13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다시 말하면 예루살렘은 여전히 바벨론에 포위되어 있을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일을 행하시는 주님이요, 그 일을 성취하시는 주님이라고 알려주신다. 즉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시작하고 행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신)이시다. 이런 신에게 부르짖으라고 명하신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은 유다의 운명을 되풀이해서 말씀하신다. 두번째 말씀은 첫번째 말씀과 다르지 않다. 유다가 바벨론에 대항하여 싸우려해도 주님이 주님의 노여움과 진노로 유다 백성을 죽이고 그 시체로 예루살렘을 채우겠다고 하신다. 이유도 똑같다. 유다의 모든 악행때문이다. 주님은 악을 행하는 백성들에게서 얼굴을 가리시고 돌아보지 않으신다. 그러나 이것이 결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회복도 다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유다의 포로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포로까지도 돌아오게하여 그들을 새롭게 (처음 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실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한 모든 죄악을 깨끗하게 씻어주시고 모든 죄악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 (뉘앙스가 중요하다. 다시 범죄해도 그냥 용서 받는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깨끗하게 씻어주시고에 답이 있는 듯하다. 씻기움을 받은자가 용서 받는다. 씻기움=용서. 씻기움을 거부할 수 있을까? 이것은 다른 신학적 문제다.)

예루살렘의 회복을 기뻐하실 분은 주님이시다. 세상은 주님의 이름을 (다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찬송과 영광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을 듣고 주님을 경외하게 될 것이다. 황폐했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에 다신 평화와 기쁨의 소리가 가득하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예배와 찬양이 (일상생활과 신앙생활이) 다시 회복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주님은 예루살렘의 회복을 황폐했던 땅에 다시 목자가 살고, 양떼들은 목자의 돌보심을 받는 것으로 비유하신다. 양떼는 다시 계수될 것이다. (한마리 한마리 돌보심을 받을 것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슴을 버리노라”(요10:14-15)

우리야 말씀의 성취를 읽고 있지만 예레미야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한편으로는 소망중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신실함을 보인 예레미야의 믿음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