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5:14-21

 

14절이 도전된다. 성도들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해야 한다. 여기선 선은 하나님으로 대체되는 선과는 다른 단어다. 양선, 착함으로 번역되는 선한행실이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다. 삶 없이 지식을 떠들어봤자 들어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한 행실이 있고 지식으로 권하면 듣는다. 성도들은 서로에게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형제들이 선함으로 서로 권면하고 위로하는 사람들이라고 확신한다고 적는다. 나는 선함이 가득한가?

  1. 바울이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맡아 이방인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표현이 새롭게 다가온다. 이방인을 제물로 드린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12장 1절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과 같이 이해하더라도 내가 나의 몸(삶)을 영적 예배로 드리는 것과 이방인을 제물로 드린다는 표현이 좀 세다. 아마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 된 지체라 당연한 것인가? 그러고보니 12장 1절도 형제들에게 (복수) 주어진 말씀이고 나의 몸이 아니고 우리 몸이다.

17-18 바울은 이방인들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데 자신이 도움이 되었다고 자랑한다. 그리스도께서 바울을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 달리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학교나오니 여유가 덜하다. 복음이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들이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다. 함께 지어져 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해야 하고, 착한 행실로 서로 권면해야 한다.

 

로마서 15:1-13

바울은 성도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에 관심이 많다. 계속해서 믿음이 강한 사람과 믿음이 약한 사람들 사이를 정리한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 자기 좋을 대로 하지 말고 믿음이 약한 사람의 부족한 부분을 담당하라고 한다.

성도는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복종하는 관계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된 지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를 기쁘게 하기보다는 (자신이 좋을 대로 하기 보다는) 이웃을 기쁘게 해야 한다. 물론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일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어야 한다.) 예수님도 자기 좋으실 대로 행하시지 않으시고 성경말씀처럼 오히려 비난을 받아가시면서까지 이웃사랑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셨다. 성경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려고 기록되었다. 성경을 통하여 위로 받고 소망을 가진다.

하나님 말씀이 교훈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을 본받아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셔서 (우리를 영접하셔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다고 가르친다. 그와같이 우리도 서로 받으라고 (용서하라고 사랑하라고) 권면한다. 서로 받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이다.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할례받은 사람들을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했지만 )받아들이셨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함이셨다. 뿐만아니라 성경에서 약속하신대로 이방인들도 (긍휼히 여기셔서) 받아들이셨다.  그래서 열방들이 모든 민족들이 주의 백성과 함께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위로와 소망이 말씀에 기록되어있다. 위로와 소망은 모든 민족, 열방을 향해 열려있다. 이 위로와 소망은 성도들의 믿음 안에서 충만해 지고 성령의 능력으로 열방을 향해 넘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할 기도내용이다.

이웃사랑은 준법이다. 법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경외 함으로 피차 복종하는 것이다. 이웃사랑은 열방을 향해 넘쳐 흘러야 한다.

로마서 14:13-

핵심은 우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다. 하나님나라다.

성도들끼리, 형제들이 서로 누워서 침뱉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를 섬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지체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

믿음은 나의 판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판단에 따르는 것이다.

// 음, 우리의 대적은 무엇인가? 성도들 간의 미움 다툼 시기 질투가 아닌가? 외부에 있지 않고 내부에 있다.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할 이유다. 우리가 없애야 할 대적은 원수가 아니라 원수 되게 하는 enmity 다.

오늘도 쉬어가자

로마서 14:1-12

성도들은 자신을 위해 살고 자신을 위해 죽는 자들이 아니다. 성도들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위해 살고 죽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주님을 위해 살고 죽는 것은 결국 한 몸의 지체된 형제들을 위해 살고 죽는 것이다.

형제들을 위해 살고 죽는 자는 형제를 비판하지 않는다. 업신여기지 않는다. 형제는 누구나 주님과 연합되어 있다. 누워서 침뱉지 않는다.

오늘은 쉬자

로마서 13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권세는 무엇인가? 권위와 권능으로도 번역된다. 어쩌다 권한이나 관할로 번역되기도 한다. 고린도전서에서는 권리 (고전 7:37)나 자유로 (고전 8:9) 번역되기도 한다.

권세는 통치자나 위정자를 지칭하지 않는다. 물론 짐이 곧 법이나 국가였던 시대에는 동일시 할 수 있었겠지만 오늘날에는 ‘권리’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국민들의 뜻이 모아지면 정권보다 위에 있는 권세가 된다.

그래서 권세를 거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명을 거스리는 것이요, 권세에 대한 불복종은 심판을 자취하는 결과늘 낳는다.

다스리는 자들은 권세 그 자체가 아니라 권세를 집행하는 관리들이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로 일하는 사람은) 다스리는 자들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거스리는 사람에게)는 다스리는 자가 당연히 두려움의 대상일 것이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심판이 아니라 칭찬이 기다린다.

다스리는 자들, 관원들은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선을 베푸는 자들이다. 다시말해 관리들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서 하나님께 권리를 위임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악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자들은) 두려워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세상 권력자들을 사용하셔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고 벌하신다.

그러나 성도들은 벌을 받을까 두려워 권세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 권세들에게 (하나님께서 권세들의 정점에 계신다) 복종해야 한다.

납세의 의무를 다하고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권세를 부리는 관원들이 성실히 (힘써) 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두려워해야 하고 존경해야 할 자로 여겨야 한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리라. (왜 갑자기 이 구절이 끼어 들었을까?) 그러고 보니 빚은 권세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권리에 대응하는 의무다. 다시말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라는 뜻이다. 세금 내는 것은 의무다. 그리고 펀치를 날린다. 이웃사랑은 의무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법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다.

계명들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적용하는 방편이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마치 이웃에게 대하여 무슨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하지 않는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완성이라는 것은 율법의 정신을 온전히 반영했다는 뜻이다.

말세다. 말세가 가까울 수록 이웃사랑을 해야한다. 어둠의 일을 벗어야 한다. 육신을 따라 행하지 말아야 한다.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한다. 영을 따라 행해야 한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어야 한다. 교회학교의 교복을 입었으면 육신을 따라 행하지 말고 영을 따라 행해야 한다.

권세의 정점이신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다. 단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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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권세는 무엇인가? 권위와 권능으로도 번역된다. 어쩌다 권한이나 관할로 번역되기도 한다. 고린도전서에서는 권리 (고전 7:37)나 자유로 (고전 8:9) 번역되기도 한다. 권세는 통치자나 위정자를 지칭하지 않는다. 물론 짐이 곧 법이나 국가였던 시대에는 동일시 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날에는 ‘권리’가 더 적합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소위 민주국가에서는 국민의 권리 (자유)가 정부의 권리 (권위)보다 더 높다.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에도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하지 않나) 그러나 성도들은 무엇보다도 권세의 정점에는 하나님께서 계심을 알아야 한다. 집행관들에게 (관리들에게) 있는 권세는 하나님의 권세의 지극히 작은 부분집합에 불과하다…

… 바울은 권세, 권리를 맡은 자들을 ‘하나님의 사역자’,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부른다. 권세를 맡은 자들이 해야 하는 일은 (권리는) ‘선’을 베푸는 것이다…

… 권리가 있으면 의무가 있다. 성도들이 (성실히) 힘써야 할 의무는 ‘이웃사랑이다.’ 빚을 갚아야 하듯 ‘이웃사랑’을 해야 한다. 그래야 법을 만족시킨다. ‘이웃사랑’은 결국 준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