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0:14-21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을 것을 13절에서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자체 해석한다.

그런즉, 주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즉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믿음에서 나온다. 믿지 않는 자는 부를 수 없고, 듣지 못한 자는 믿을 수 없고, 전하는 자가 없으면 듣지도 못한다. 물론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전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걸음이 아름답다 (시기적절하다).

문제는 복음을 듣지 않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복음)을 들음에서 말미암는다. 복음은 온땅에, 땅끝까지 퍼졌으나 사람들이 듣지 않는다. 그러니 여기서 듣는 것은 순종이다. 듣기만 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롭다. 말을 잘 듣는다는 것은 순종한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어리석었다. 말씀을 듣기만하고 (알고도) 순종하지 않았다.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지만 듣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이방을 사랑하시고 이 일로 이스라엘은 질투하고 분노하게 될 것임을 모세를 통해 말씀하셨다. (신32:21)

이사야는 하나님을 찾지 않던 이방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찾은 바 되었고, 하나님을(께) 구하지 않던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하셨다고 기록한다.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사65:1)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을 맞이하시려고 팔을 벌리고 기다리신다.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주님은 종일 (오가는 모든 시대에) 말씀하신다.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오늘 나에게도 말씀하신다.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복음이다.

로마서 10:5-13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뜻이다. 율법의 요구를 다 지키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미완성?의 율법의 줄에서 완성의 믿음의 줄로 옮겨 타야 한다. (어제)

모세는 율법에서 말하는 의는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사는 것이라고 기록했다. 한마디로 (가능하지만)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한편으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는 반대로 (불가능하지만, 즉 사람은 하늘에 올라가서든 무저갱에 내려가서든 그리스도를 모셔올 능력이 없지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믿음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이다. 모세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 입에 있고 백성들 마음에 있다고 했다.(신 30:14) 이미 주어졌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복음전파의 핵심이라고 설명한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 입에 있고 백성들 마음에 있어서 바로바로 행할 수 있다고 적용했듯이 바울은 성도들도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적용한다. 믿음이란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말하면서 결론적으로 ‘믿음=의=구원’ 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성경의 가르침은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원수들이 나를 이기지 못한다는 뜻이다. 특별히 결승선에서 이루어질 일이다. 결승선을 통과한다는 뜻이다. 구원을 받는다는 뜻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주인이 되어 풍성한 생명을 내려 주신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수를 나의 주 나의 왕으로 고백하는 것을 뜻한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b) 오늘도 결론은 주 하나님과의 영적 연합이다. ‘주여 삼창’이 구원받은 증거나 믿음의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 안에서 살아야 한다. 입의 고백이 아닌 삶의 고백으로. 우리에게 입은 곧 삶이 아닌가.

로마서 9:30-10:4

하나님의 미리정하심이 하나님의 긍휼로 바뀌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우리는 왈가왈부할 수 없다.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다. 로마서에서 의와 믿음은 하나님으로 대체될 수 있다. (항상 그런것은 아니겠지만) 그래서 30절 하반절은 ‘하나님을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얻었으니 곧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다’라고 이해하면 쉽다.

한편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한다. 의의 법도 하나님의 법이다. 하나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다.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것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뜻이다. 왜? 율법의 요구사항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했다. ‘믿음 = 하나님’을 또 적용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 = 자신들의 의 (스스로 만든 신)’를 의지 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본으로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건만, 율법과 선지자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말씀해 주셨건만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사 8:14, 28:16)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위 아닌 믿음은 (제사 아닌 순종은, 예수님은) 부딪칠 돌이요 걸림돌이요 거치는 바위가 되었다.  ‘그를 믿는 자는 (예수님을 믿는 자는 =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아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라는 말씀을 적용하지 못했다.

바울은 다시 ‘형제들아’라고 부른다. 바울은 하나님께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간구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행위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려는) 열심은 올바른 지식 (율법과 선지자의 가르침, 성경)에서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해서 구원을 받기를 간절히 간구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행위로는 율법의 요구에 맞출 수 없지만 율법의 마침이 되신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신) 그리스도와의 연합만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게 한다.

// 미리정하심에서 긍휼로 갈아 타야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다. 이것이 믿음의 신비다. 의의 법에서 믿음으로 갈아타야 한다.

로마서 9:19-29

복음이란 무엇인가? 바울은 복음을 이야기 하는데, 자유의지와 예정론이라는 신학적 문제를 꺼내드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신다면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모든 것이 예정되었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책망하실 수 없다고 반발한다. 누가 하나님을 뜻을 거역할 수 있느냐고 따지고 든다. 바울은 근본적으로 피조물은 창조주에게 따질 권리조차 없다고 단언한다. 토기장이와 그릇의 비유로 이 문제에 답한다.피조물은 창조주에게 따질 수 없다. 그릇을 만드는 전권은 토기장이에게 있다.

22절의 분위기는 묘하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진노를 보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시고자 멸하기로 예정하고 만든 (진노의) 그릇에 대해서도 오래 참음으로 관용하신다. 마찬가지로 영광 받기로 예정하고 만든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도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도록 (오래 참음으로 관용) 하신다. 한마디로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어 졌건, 긍휼의 그릇으로 만들어 졌건 피조물은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도록 만들어졌다.

바울은 그릇은 우리라고 한다. 우리는 누구를 지칭할까? 사람들일까? 성도들일까? 바울은 유대인들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 그릇은 긍휼의 그릇만 지칭할까?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없음을 호세아의 글을 인용하여 증명한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사도 요한도 자기 백성은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다고 가르친다. 바울은 유대인들 중에도 남은 자, 소수만 구원받는다고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진노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아는 믿음에 거하는 것이다. 믿음이 결국 하나님이다. (당신이 믿는 것이 당신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토기장이가 귀하게 쓸 그릇과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지만 결국 쓰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이다. 귀하게 쓸려고 만들었어도 지져분하면 쓸 수 없고, 천하게 쓸려고 만든 그릇도 지져분 하면 쓸 수 없다. 지져분 한 그릇은 결국 귀하든 천하든 진노의 그릇이 되고 깨끗한 그릇은 결국 긍휼의 그릇이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는) 하나님의 긍휼로(사랑으로) 바뀌는 것도 당연하다. 하나님의 주권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로 나를 깨끗게 씻어 놓으셨다. (그런데도 검뎅이 위에서 오늘도 구른다.) 성령의 도우심이 끊임없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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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장이가 귀하게 쓸 그릇과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지만 결국 쓰는 그릇은 깨끗한 그릇이다. 귀하게 쓸려고 만들었어도 지져분하면 쓸 수 없고, 천하게 쓸려고 만든 그릇도 지져분 하면 쓸 수 없다. 지져분 한 그릇은 결국 귀하든 천하든 진노의 그릇이 되고 깨끗한 그릇은 결국 긍휼의 그릇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을(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귀하냐 천하냐) 따지는 것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 대신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예수의 피로 깨끗한 그릇 (긍휼의 그릇)이 되어야 한다. 이마져 나의 힘으로 할 수 없으니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고 복음이다. 하나님의 주권이다.

 

로마서 9:1-18

미리 정하신 자들은 누구인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미리 아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맹세한다. 미리 정하신 자들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큰 고통이다. 바울의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언하는 것 때문이다. 유대인이 미리 정하신 자들의 집합이거나 부분집합이라고 당연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자신의 골육 친척, 즉 유대인들에게 (자신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하나님의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만물 위에 계셔서 영원토록 찬양받으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유대인으로 오시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스라엘에게서 난 사람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하나님 말씀이 바울에게 걸림돌이 된다. 아브라함의 씨가 다 아브라함의 자녀가 아니라고 한다.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아브라함의 씨가 된다. 다시말해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자녀로 여기심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 문제는 미리 정하신 것이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이라고 미리 정하신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마엘이 아니고 이삭을 통하여, 애서가 아니고 야곱을 통하여.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에 대해 우리가 불의하다고 할 수 없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모세도 하나님의 일을 (유대인에게만이 아닌 온 땅에  이 복음이 전파되게 하려고) 위하여 세움을 받았다. 긍휼하게 여기시고 완악하게 여기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긍휼히 여길 자, 불쌍히 여길 자, 완악할 자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다.

바울 마음 속에 있는 큰 고통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면서도, 약속이 아닌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에 따라 유대인들은 당연히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유대인 골육과 친척들 때문이다. 육적 유대인들은 나름 하나님을 향해 달음박질을 한다. 그러나 우리의 달음박질과 무관하게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실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실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자유의지가 우리에게 있느냐라는, 예정론이라는 신학적 문제을 불러온다. 그러나 바울의 논조는 확실하다. (또 요한의 글을 빌리면) 자기 백성은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다고. 복음은 겸손한 자가 긍휼히 여기심을 받는 것이다. 자기 백성이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두렵지 않은가?

상속자는 주님과 연합한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