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23:21-30

언약책에 기록된 말씀을 실천하는 요시야 왕은 유월절을 지키기로 한다. 사관은 무려 사사시대부터 유다 여러 왕들조차 이렇게 지킨 일이 없던 유월절이었다라고 평가한다. 역대기에 보면 히스기야 때도 유월절을 지킨 것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유월절을 지킨 것이 전혀 없지는 않았겠지만 언약책에 기록된 말씀대로 철저하게 지킨 것은 몇 안되는 것 같다. (유월절이란 단어로 구약을 검색하면 정말로 여호수아서 이후에는 열왕기하 역대하 두곳 요시야와 히스기야 왕 때와 에스라서 두번 에스겔서에 한번 나온다.)

언약책에 기록된 말씀에 대한 순종은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거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그래서 사관은 다시 한번 요시야를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라고 평가한다. 이보다 완벽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런 요시야에 대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유다에 대한 주님의 심판은 별개였다. 유다에 대한 주님의 심판을 사관은 굳이 므낫세가 주님을 격노하게 한 모든 격노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것은 단순히 므낫세의 죄 때문에 요시야가 벌을 받는 것은 아니다. 유다가 심판 받을 만큼 죄를 채우고 채웠다는 의미다. 주님은 유다도 물리치시고, 예루살렘과 성전도 버리겠다고 하신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그러나 요시야는 애굽의 바로 느고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다. 갑자기 18:5의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라는 평가와 비교하게 된다.

요시야 왕은 어쩌면 율법을 자신의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 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열심은 자칫 자기 의로 변질될 위험성이 많다. 그래서 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말씀을 순종했다는 요시야의 평가보다 주님을 의지했다는 히스기야의 평가를 받고 싶다.

어차피 나는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가?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죽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 안에 사셔야 한다. 내 마음, 내 뜻, 내 힘을 내려 놓고 (그럼 뭐가 남나) 주님을 의지한다. 뭔가 말이 안되는 것 같으면서도…

 

열왕기하 23:1-20

요시야 왕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들을 불러 모았다. 이들이 모여 성전으로 올라갈 때 유다 모든 사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왕과 함께 했다. 요시야 왕은 성전에서 발견한 언약 책의 모든 말씀을 읽었다. 얼마나 걸렸을까? 모세오경

언약책을 읽은 요시야 왕은 주님 앞에서 언약을 갱신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언약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겠다고 언약을 세웠다. 백성들도 그 언약에 동참하기로 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께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언약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는 첫번째 실천은 성전을 정결케 하는 일이었다. 성전 밖도 아니고 성전 안에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일월성신을 제사하던 제기들이 있었다니. 성전안의 우상들을 기드론 밭에서 불살라 가루로 만들어 제거한 후 우상들과 일원성신을 섬기게 한 제사장들을 없앴다. 아니 아세라 상이 또있네. 이 아세라 상도 기드론 시내로 가져가 불살라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설상가상이라고 해야하나. 성전 안에 있는 남창의 집을 헐었다. 한마디로 성전은 구석구석 더럽혀져 있었다.

그리고 게바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있던 산당들을 헐어버렸다. 산당들의 제사장들에게 더이상 제사장 직분을 맡지 못하게 하였다. 자녀 인신 제사를 드리는 법을 금지시켰다. 태양신을 섬기는 것도 금지시켰다. 아하스와 므낫세가 세웠던 제단들도 헐어 버렸다. 선대 왕들이 세웠던 산당들도 제거했다. 목석의 우상들을 찍어버렸다. 또 아세라 목상을 불살랐다…끝이 없다.

정말 끝이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 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고후 10:5 말씀이 떠오른다.

“세상은 원칙이 없습니다. 인정사정 없는 냉혹한 곳입니다! 세상은 정정당당하게 싸우지 않습니다. 이제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 일에 사용하는 도구는 마케팅이나 시세를 조작하는 데 쓰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도구는 타락한 문화 전체를 뒤엎는데 쓰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강력한 도구를 사용하여 뒤틀린 철학을 분쇄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가로막기 위해 세워진 장벽들을 허물고 모든 흐트러진 생각과 감정과 충동을 그리스도께서 조성하신 삶의 구조에 맞게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도구는 모든 방해의 원인을 제거하고 성숙에 이르는 순종의 삶을 세우는 데 즉시 쓸 수 있도록 준비된 도구입니다.”( 고린도후서 10장 3-6절 메시지 번역)

모든 교만, 모든 생각, 교회 안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 안에서부터 시작하자.

 

 

열왕기하 21

므낫세. 통치기간 55 년. 최장수 통치. 그래도 선왕 히스기야보다도 적은 지면을 차지한다. 사관의 평가는 직설적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행하여 주님의 진노를 일으켰다.

여호와 보시기에 가증한 일 첫번째가 선왕 히스기야 때 와서야 겨우 제거한 산당을 다시 세운 것이다. 겨우 한 세대만이다. 히스기야와 므낫세의 공동 통치기간을 고려한다면 히스기야는 결국 죽기 전에 ‘너는 집을 정리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한 셈이다.

// 피는 물보다 진하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 이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인지상정을 극복해야 한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갔던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므낫세는 자식을 제물로 드렸다. 믿음만이 아니라 탐욕도 인지상정을 거스리게 한다.)

므낫세의 악행을 적고 또 적고. 사관은 므낫세가 주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 외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렸다고 마무리 한다.

이어지는 아들 아몬도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었다. 결국 아몬은 신하들의 반역에 죽고 요시야가 유다 왕이 된다.

열왕기하 20:12-21

또 ‘그 때에’ 라고 시작한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었던 때, 아니면 기도로 나은 후 였을까. 그 때에 바벨론 왕이 편지와 예물로 히스기야를 문병했다.

사신들을 보내 히스기야를 병문안 한 바벨론 왕은 히스기야의 어떤 명성?을 들었을까? 사신들은 히스기야를 무슨 말로 칭송했을까? 사관은 앞에서 주님을 의지하는 히스기야가 어디를 가든지 형통했다고 기록했다. 마치 솔로몬의 지혜가 만국에 퍼졌었듯이 히스기야의 형통도 만국에 퍼졌을까? 당시 강국 앗수르 왕을 배반하고 섬기지지 않은 히스기야의 용맹을 염탐하고자 했을까? 하여간 히스기야는 바벨론 사신들의 감언이설에 자고했던 것 같다. 사신들에게 나라를 속속들이 보여 주었다.

이사야가 (황급히) 다시 등장한다. (주님께 무슨 말을 듣고 왔었길래 ) 선지자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바벨론 사신들과 있었던 일의 자초지종을 캐 물었다. 히스기야는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먼지방’이라는 수식어는 마치 군사적 위험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사야는 왕에게 무엇을 사신들에게 보여주었는지 물었다. 히스기야는 (자신있게) 모든 것을 다 보여 주었다고 대답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주님의 때가 이르면 바벨론에게 왕궁의 기물을 빼앗기고 후손들도 잡혀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될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히스기야는 주의 뜻대로 이루어 질 것이라고 화답한다. 그동안 이사야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히스기야에게는 샬롬이요 진리였다.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었다. 히스기야는 자기가 통치하는 동안에 주님의 말씀대로 샬롬과 진실을 누리는 것에 자고했기 때문일까. 후손들이 나라를 빼앗기고 포로로 잡혀간다는 주님의 신탁을 들어야했다.

히스기야는 주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삶으로 배운 왕이다. 히스기야는 떼를 써서 기도로 죽을 병에서 나음을 입은 왕이 아니다. 그러니 후손들에 대한 심판에 대해서도 히스기야는 자신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할 수 없었다. 주님의 뜻은 대신 선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대신 히스기야는 ‘너의 집을 정리하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지 고민했을 것이다. 저수지를파고 수로를 만들어 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이는 역사도 나름 ‘너의 집을 정리하라’라는 주님의 신탁을 실천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기도로 주님의 뜻을 바꾸려고 하는 것보다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주님을 의지한 히스기야의 시대는 이렇게 저물고 므낫세가 왕이 되었다.

우리 삶의 큰 적은 ‘먼 지방’에 있지 않다. 시간적으로도 언제 일어날 지 모른다. 샬롬과 진리로 충만할 때 다가 올 수도 있다. 바로 자고할 때다, 바로 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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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는 주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삶으로 배운 왕이다. 히스기야는 떼를 써서 기도로 죽을 병이 나는 왕이 아니다. 그러니 후손들에 대한 심판에 대해서도 히스기야는 자신의 교만함을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가 주님을 뜻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후손들이 주님을 의지함으로 샬롬과 진실의 기간이 영원히 길게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을 것이다.) 대신 주님의 뜻이 선하다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한편 히스기야는 ‘너의 집을 정리하라’라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지 고민했을 것이다. 저수지를파고 수로를 만들어 물을 성안으로 끌어들이는 역사도 ‘너의 집을 정리하라’라는 주님의 신탁을 나름 실천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주님을 의지하는 것과 어떤 상관이 있을까?
기도로 주님의 뜻을 바꾸려고 하는 것보다, 주님의 뜻을 바꾸려고 나름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것보다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열왕기 사관의 히스기야 왕 한줄 평가가 그래서 중요하다.
[그는 주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을 신뢰하였는데, 유다 왕 가운데는 전에도 후에도 그만한 왕이 없었다. (18:5 새번역)]
주님을 의지하면, 주님은 약속의 말씀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 가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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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기야의 후손들이 큰 심판을 받게 된다는 주님의 말씀을 히스기야의 잘못에 의한 결과라고만 생각하면 안됨. 주님은 아비의 죄로 자식이 자식의 죄로 아비가 벌을 받지 않는다고 분명히 약속하셨는데. 열왕기 사관은 이미 14장에서 아마샤 왕이 율법을 따라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은 왕이라고 소개했음을 기억한다면 더 분명한 결과. 사관은 교만은 멸망을, 주님을 의지하는 것은 샬롬(평안)과 진실을 누리는 것임을 대조적으로 보여줌으로 역사의 교훈을 받으라는 의미가 강하다고 봄. 결국 포로는 불순종한 후손들의 책임임. 주님을 의지한 히스기야도 연약한 인간이기에 자고할 수 있음.

히스기야는 기도로 주님의 뜻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왕이었음. 병이 나은 것도 기도로 주님의 뜻을 바꾼것이 아님. 자기 때만 샬롬하고 진실을 누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후손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것은 무시한 왕이 아니라, 이 문제는 금식하고 메달려야 할 문제가 아니라 후손들이 주님께 의지해서 포로로 잡혀가는 때가 (자신의 생이 15년 늘어난 것 처럼) 아주 아주 오랜 후로, 영원히 오랜 후로 늘어날 수 있다는 바람, 혹은 믿음의 결과라고 생각됨.

따라서 히스기야의 반응은 자포자기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한 결과요, 후손들도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기를 바라는 교훈을 주기 위함이 아닐까?

사관은 18:5에서 이미 히스기야에 대한 한줄 평가를 내렸음.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성경은 간음에 살인을 한 다윗도 주님과 마음이 합한 자라고 한줄 평가를 내리기도 함. 결국 우리의 믿음을 해치는 것은 멀리 있는 (먼 지방 바벨론) 것이 아님.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내 속에 있는 자고함이 아닐까?

히스기야가 한순간 무너졌지만 (아마도 여러번) 그는 평생 주님을 의지함으로 주님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바라며 살았던 왕으로 기억되면 좋겠다. 사관의 평가처럼.

 

열왕기하 20:1-11

승전의 기쁨이 채 가시기 전 그 때에 히스기야는 병들었다. 그것도 중병에 걸렸다.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주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히스기야에게 보내셨다. 이사야는 주님의 말씀을 전했다. 네가 다시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왕으로서 인수인계를 하여라.

히스기야는 벽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고 주님께 기도했다. 다른 것을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겠다는 의지다. 심지어 선지자에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겠다는 뜻일 것이다. 산헤립의 편지를 펼쳐놓고 주님께 기도했던 히스기야는 자신의 마음을 찢고 (마음을 펼쳐놓고) 주님께 기도했다.

[“주님, 주님께 빕니다. 제가 주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온 것과, 온전한 마음으로 순종한 것과, 주님께서 보시기에 선한 일을 한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고 나서, 히스기야는 한참동안 흐느껴 울었다. (3 새번역)]

생명의 위로가 아닌 죽음의 선언을 전했던 이사야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도 기도했으리라. 그리고) 주님은 이사야를 통해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히스기야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라고 하셨다.

[네 조상 다윗을 돌본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네가 기도하는 소리를 내가 들었고, 네가 흘리는 눈물도 내가 보았다. 내가 너를 고쳐 주겠다. 사흘 뒤에는 네가 주의 성전으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너의 목숨을 열다섯 해 더 연장시키고, 너와 이 도성을 앗시리아 왕의 손에서 구하여서, 이 도성을 보호하겠다. 내 명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내 종 다윗을 보아서라도, 내가 이 도성을 보호하겠다.]

히스기야는 이사야에게 주님께서 히스기야를 고치시고 사흘 뒤에는 성전에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된다는 증거를 요청했다. 이사야는 주님의 말씀이라는 증거로 해 그림자를 십도 앞 혹은 십도 뒤로 움직이게 할 수 있으니 히스기야에게 선택하라고 말했다. 히스기야는  해 그림자가 뒤로 물러나는 증거를 요청했다. 이사야가 주님께 기도하자 아하스가 만든 해시계 위로 드리운 그림자가 뒤로 십도 물러났다.

굉장히 드라마틱한 이야기다.

주님은 히스기야의 살려달라는 애걸에 주님의 뜻을 바꾸셨을까? 아니 우선 히스기야는 살려달라고 애걸했을까? 히스기야의 기도문을 읽고 또 읽어도 살려달라는 애걸의 의미는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진실함과 온전한 순종과 선한 일 햄함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 했다. 그리고 한참을 울었다. 히스기야는 어쩌면 십자가 상의 예수님처럼 ‘다 이루었다’는 심정이었을 수 있다. 앗수르 산헤립의 손에서 유다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선한 구원의 손길에 대한 기도 응답을 받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그의 울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너는 집을 정리하라’라는 주님의 마지막 명령에 순종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울음이지 않았을까? 당시 히스기야에게는 왕위를 계승시켜줄 아들이 없었을 수 있다. 아니면 어렸든지. 그것도 아니면 아들이 주님을 순종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너는 집안을 정리하라’는 주님의 부탁을 이룰 수 없으니 울고 또 울었을 것이다.

십오년을 더 살게 해 주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은 ‘너는 집안을 정리하라’는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기한을 주신 것이다. 주님이 이사야를 통해 히스기야에게 주신 대답을 보면 확실하다. 주님은 자신을 다윗을 돌 본 주님이라고 소개하고, 다윗을 보아서라는 이 도성을 보호하겠다고 하셨다. 다시말하면 영원한 다윗의 위를 약속하신 주님의 언약을 지키시기 위해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고 하신 말씀의 기한을 알려 주신 것다. (사람에게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닌가?) 주님은 히스기야가 기력을 회복하여 ‘너는 집을 정리하라’라는 왕위 계승 준비를 할 시간을 /충/분/히/ 주신 것이다.

나도 한 번 죽는다. 그러나 영원히 죽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나의 말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음을 겪지 않을 것이라”라고 진정으로 진정으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심판대에 섰을 때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보고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많이 부족해서, 엉엉 울게 되겠지만. 오늘 하루도  주님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라고,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하라고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