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8-32

복음이란 무엇인가? 바울은 주님의 복음을 로마에도 전하길 원했다. 그래서 믿음으로 하나가 되는 것을 꿈꿨다. 복음은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이듯 삼위 주님과 우리 성도도 하나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의한 사람들은 주님과의 연합이라는 진리를 막았다. 이것이 (주님과의 연합을 막는 불의가) 경건치 않음이다. 주님을 (참된 창조주 신을) 알 수 있음에도 주님을 영화롭게도, 감사하지도 않는 영혼들. 주님 대신 우상을 세운 어리석은 사람들. 주님은 이런 사람들과 연합하실 수 없으시다. 그래서 불의 불경건한 사람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두셨다.

영원히 찬송받으시고 연합해야 할 분은 주님이시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 주님대신 피조물 우상울 만들어 경배하고 섬겼다. 사람들은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 대신 피조물을 섬기면서는 주님과 연합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님의 법은 주님과 연합하지 못하면 사형이라고 정한다) 불의와 경건치 않음이 옳다며 행하고, 주님의 법이 악법이라고 조장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영원히 찬송할 분은 주님이시다. 주님과의 연합이 복음이다. 주님과의 단절이 사망,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주님과의 연합은 당연히 눈에 보이는 성도들 간의 연합을 가져온다. 악인들이 서로 악을 조장하듯 성도들은 복음 안에서 (주와 연합함으로) 서로의 믿음으로 평안을 나누어야 한다.

로마서 1:1-17

@성부 주님의 복음 (1)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 성육신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가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음. 성부와 성자의 은혜와 평강을 누림. 온 세상에 전파되어야 할 복음. 성부의 복음이 성자(그의 아들)의 복음으로 성취됨(9)

@바울이 전하는 복음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은 믿음을 성부께서 인정해 주심. 주님의 뜻 안에서 간구함. 성령의 은사로 서로 교제함. 믿음으로 서로 위로함. 모든 사람에게 빚진자가 됨. 그래서 로마 성도들과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길 원함. 부끄러운 것이 아님.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주님의 능력. 주님의 의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함. 이 믿음으로 사는 자가 의인임.

너희와 나의 믿음이 어떻게 서로를 위로할 수 있을까? 복음이 무엇인지 바로 알 때 (복음이 믿음이 될 때) 가능할까? 성령 안에서 신령한 은사를 나누는 성도의 교제가 바울이 로마 성도들에게 전하고자 한 복음이 아닐까? 성부와 성자의 연합. 성자와 성도의 연합.

생면부지의 그리스도인들과의 연합을 꿈꾼다.

열왕기하 25:8-30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신복 시위대장 느부사라단을 예루살렘에 보내 예루살렘을 접수한다. 성전과 왕궁,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다 불살랐다. 우리가 말하는 소위 지옥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성벽도 헐어버렸다. 바벨론에게 항복한 자들은 포로로 잡혀갔다. 다만 비천한 자들을 남겨 포도원을 짓고 농사를 짓게 하였다. 갈대아 사람, 바벨론 군대는 성전의 기물들도 바벨론으로 가져갔다. 큰 것들은 깨뜨려 쪼개서 가져갔다. 놋이란 놋은 다 쓸어갔다. 금은으로 만든 것은 물론이다.

당연히 바벨론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인가?) 무리들도 있었다. 대제사장 스라야, 부제사장 스바냐, 성전문지기 세사람과  군사를 거느린 내시, 왕의 시종, 징병관 등등 육십명. 이들은 바벨론에 잡혀 왕에게 끌려가 다 죽임을 당했다. 결국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다. 유다에는 비천한 자들과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정책적으로 남긴 사람들만 남았다. 느부갓네살은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달리야로 하여금 유다 땅에 머물며 남은  백성들을 관할하게 하였다. (우리 역사에 빗대면 사반의 가족은 예레미야 선지자와 함께 주화파에 해당한다.)

그달리야는 자신에게 나온 군대 지휘관들, 이스마엘, 오하난, 스라야, 야아사니야 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갈대아 인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 땅에 살며 바벨론 왕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가 평안하리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주화파가 있으면 척화파가 있게 마련이다.

왕족 엘리사마의 손자 느다니야의 아들 이스마엘. 사관은 앞에서는 느다니야의 아들이라고만 적었는데 여기서는 왕족 엘리사마의 손자라는 수식어를 첨가했다. (이참에 왕이 되고자 했을까?) 이스마엘이 부하를 데리고 와서 그달리야를 쳐죽이고 함께 있던 유다사람과 갈대아 사람을 죽였다. (그러나 대세를,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어찌 이기랴.) 그리곤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워 (척화파) 백성들과 군대 지휘관들은 모두 애굽으로 도망갔다.

사관은 바벨론에 잡혀갔던 유다 왕 여호야긴이 복권?되어 바벨론 왕 에월므로닥과 함께 먹었다는 기사로 열왕기를 맺는다. 종신토록 바벨론 왕에게서 매일의 쓸 것을 받게 된 여호야긴의 복권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개인적인 세상적 지위의 회복에 촛점을 두면 이보다 서글픈 일이 있을까? 베벨론을 섬기라, 그러면 너희가 평안하리라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성취에 촛점을 맞추어야 한다.

// 유대인으로 바벨론을 섬기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리스도인으로 세상을 섬기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에스더서의 이야기가 다시금 떠오른다.

열왕기하 24:8-25:7

여호야긴.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따라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선은 대를 잇기가 힘든데 악은 정말 잘 넘어간다. 여호와 보시기에 계속 악을 행하자 주님은 바벨론으로 다시 심판하신다.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직접 예루살렘에 와서 여호야긴을 잡아갔다. 느부갓네살 왕은 성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의 보물을 집어내고 성전의 금 그릇을 다 파괴 하였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되었다.)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 특별히 지도자, 용사, 장인, 대장장이 등등을 포로로 잡아 갔다. 그래서 예루살렘에는 비천한 자만 남았다.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의 숙부, 그러니깐 요시야의 아들 맛다니야를 (이름 뜻 여호와의 선물) 대신 왕으로 삼고 이름을 시드기야 (여호와의 의로움)으로 바꿔버렸다. 느부갓네살은 자신도 모르게 주님의 도구로써 유다를 심판했다.

이쯤되면, 여호아하스-여호야김-여호야긴을 통해 뭔가를 배웠어야 할 시드기야가 아닌가? 그런데도 시드기야도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주님대신 바벨론에 의해 꼼짝달싹 못하는 애굽을 의지한 것이다. 사관은 주님이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으로 주님 앞에서 쫓아내실 때가 되었다고 기록한다.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예루살렘은 이년을 못버텼다. 예루살렘 성에 양식이 떨어졌다. 성벽이 파괴되자 시드기야는 밤중에 성을 버리고 아라바 길로 도망 쳤으나 바벨론 군대에 의해 여리고 평지에서 잡혔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는 두눈을 빼고 결박해서 바벨론으로 끌고 갔다.

// 떠오르는 생각

//1 성전은 금광인가? 앗수르에게 퍼주고 애굽에게 퍼주고도 뭔가 남은 게 있었나보다. 엉뚱한 비유를 든다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그렇지 않나 생각된다. 퍼주고 또 퍼주어도 또 퍼줄 사랑이 있는 곳. 그런데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이름뿐이 교회는…

//2 비천한 자만 남았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눅6:20)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을 돌보는 사람은 복이 있다. 재난이 닥칠 때에 주님께서 그를 구해 주신다” (시 41:1)

//1+2 교회는 퍼주고 퍼주고 또 퍼주어 가난해져야 한다. 먹고 마시는 세상나라가 아닌 의와 희락과 화평의 하나님나라가 교회 것이기 때문이다.

//3 주님은 느부갓네살을 통해 여호와의 선물 (맛다니야)를 여호와의 의로움 (시드기야)로 개명시켰다. 구원의 은혜를 선물로 받았으면 의롭게 사는 것이 은혜를 누리는 길이다. 의로움 없이 은혜만 누릴 순 없다.

열왕기하 23:31-24:7

여호아하스. 요시야가 애굽 바로 느고에게 죽임을 당하고 왕위를 계승하나 여호아하스는 요아스의 길을 가지 않고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사관은 이것을 그의 조상들이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라고 적는다. 사관이 남 유다 최악의 왕으로 꼽는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라고 할 때도 ‘그의 조상들의 모든 행위대로’라는 수식은 붙지 않았다.

잠시 건너뛰어 여호아하스를 이은 여호야김을 평가할 때도 “여호야김이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을 따라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라고 적었다. ‘그의 조상들의 모든 행위대로’ 와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을 따라서’는 유다가 멸망을 향하여 치닫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여호아하스는 애굽 바로 느고에 대적한 요아스를 이은 왕이라 느고가 애굽으로 잡아가고 만다. 대신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의 형 (여호아하스 보다 왕이 되었을 때 나이가 두살 위다) 엘리아김을 왕으로 삼고 여호야김으로 이름을 개명시켰다. 엘리아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언약에 따라 주님을 섬기고자 했던 요시야는 아들에게 엘라아김 (창조주 하나님이 세우셨다)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바로 느고는 여호야김 (여호와가 세우셨다)라고 불렀다. 아마도 느고가 창조주 하나님을 유다 민족 신으로 격하시키고자 했을 수도 있고, 이방 느고를 통해 주님이 하신 일임을 교훈하고자 했을 수도 있겠다. 여호아하스는 애굽에서 죽고 만다.

여호야김은 느고에게 은과 금을 바쳤다. 느고에게 은과 금을 바치기 위해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징수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까? 애굽에 의해 세워진 여호야김은 바벨론의 공격에 바벨론의 속국이 되어 섬겼다. 그러나 세해가 지나자 여호야김은 느부갓네살에 반기를 들었다. 자신을 왕으로 세워준 애굽에 대한 충성일까 아니면 은과 금을 바친 애굽에 마음을 둔 결과일까? (그게 그거) 하여간 여호야김은 화를 자초했다. 앞에서 말한대로 유다 조상들의 모든 행위, 유다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을 따라서 주님은 유다를 쳐서 멸망시키고자 하신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사관은 애써 이 모든 일을 자초 한 것을 므낫세의 죄 때문이라고, 므낫세가 무죄한 피를 흘린 것을 주님께서 결코 용서하실 수 없어서라고 므낫세를 희생양을 만들었지만 말이다. 여호야김이 은과 금을 바쳐 의지한 애굽은 다시는 국경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고 사관은 적는다. 격동하는 국제 정세속에서 흐름을 정확하게 읽지 못한 유다는 이렇게 저물어 간다.  창조주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유다는 이렇게 망해 간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했을 때 의지해야 할 것은 주님이시다. 눈을 들어 산들을 보아도 우리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주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