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4:13-25

복음이란 무엇인가? 우주 천하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언약은 율법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는다. (구원이란 우주 천하, 즉 창조주의 상속자가 되는 믿음이다.) 바울은 앞에서 율법 대신 하나님의 의라고 말했는데 여기서는 믿음의 의라고 적는다. 하나님의 의와 믿음의 의가 동격이니 하나님이 곧 믿음이다. 따라서 믿음이란 믿는 나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미쁘심이다.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상속자이면 (아브라함은 율법이 모세를 통해 주어지기 반천년전 사람이다) 믿음은 헛것이되고 약속은 파기된다. 믿음=하나님, 약속=언약. 따라서 율법을 통해서만 상속자가 된다면 하나님의 언약은 파기된다고 바울은 설명한다. 율법은 (믿음없음에 대한) 진노로 주어졌다. 율법은 무엇이 범법인지 (죄를 짓는 것인지) 알려준다.

(우주 천하를 지으신 창조주의) 상속자가 되는 것, 이것이 복음이다. 상속자가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에 속하기 위한 믿음으로 된다. (여기서도 믿음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미쁘심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믿음의 은혜는 (믿음의 언약은) 율법에 속한자들 (유대인들) 뿐만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아브라함의 하나님께) 속한 자들 모두에게 유효하다. 아브라함은 우리 믿는 자들의 조상이다.

성경은 주님께서 아브라함을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세우셨다고 증거한다 (창17:5).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의 뜻이 열국의 아비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임을 믿었다. 강조점은 아브라함이 믿은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미쁘심이다. 우리는 미쁘지 않은 것들을 믿지 않는다. 양치기 소년 이야기. 마을 사람들은 미쁘지 않은 양치기 소년의 말을 믿지 않게되었다. 결국 믿음이란 대상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하고 이것이 믿음의 행위를 유발한다. 우리 주님은 미쁘시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것은 하나님의 미쁘심에 근거한다. 유대인의 아비도 되고 열국의 아비도 되는 것을 믿었다. 늙은 부부가 하나님의 미쁘심을 믿었다. ‘믿음=하나님’이라고 했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미쁘심’은 곧 ‘하나님’ 이다. 늙은 부부는 믿음은 약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 (하나님께 대한 신뢰) 이 견고해졌다.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렸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했다. 자신의 믿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미쁘심이 드러나게 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다. (오직 주님께 연합할 때 가능하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 믿음의 의, 하나님의 의는 아브라함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곧 우리 주를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미쁘신) 성부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도 해당된다.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하고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한 자들을 의롭다 하신다.

복음이란 믿음이고 믿음은 하나님의 미쁘심이고 곧 하나님이시다. 나에게는 미쁘신 주님과의 연합이다.

로마서 4:1-12

복음이란 무엇인가?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차별이 없다면서 왜 자꾸 유대인을 언급할까? 복음은 (하나님의 의는)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증인으로 (증거로) 불러낸다. 아브라함이야 말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증인이다.

아브라함은 주님을 믿었고, 주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 인정하셨다.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인정 받은 것은 일, 곧 행위에 대한 삯이 (보수가) 아니었다. 은혜였다. 일을 하지 않아도, 경건하지 않아도 의롭다 하시는 이를 (주님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주님은 의로 여기셨다. 이렇게 일한 것이 없이 (주님을 믿음으로) 주님께 의롭다고 여기심을 받는 것이 복이다. 은혜다.

바울은 잠시 다윗도 증인으로 소환한다. 다윗은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증언한다. 다윗 자신이 이 복을 누렸던 당사자였다.

다시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증인심문을 한다. 아브라함 당신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을 할례자로서 받았습니까? 아니면 무할례자로서 받았습니까? 당신의 믿음이 의로 인정 받았는데 그것이 할례시입니까? 아니면 무할례시입니까? 아브라함은 ‘무할례시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증언으로 복음을 변호한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것에 대한 공증입니다. 무할례자로서 믿음의 조상이 되어 무할례자들도 의롭다고 인정받게 하려는 의도입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고 (자식을 낳아) 할례자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시 가졌던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없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할례자냐 무할례자냐라는 자격제한이 없다. 일을 했는지 안했는지도 따지지 않는다. ‘주님의 의’에 대한 믿음만 따진다. 이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 그래서 복이고 은혜다. 이 믿음이 복음이 말하는 복이고 은혜다. 음~~. 그러니 예수 믿고 받는 복과 은혜는 보너스에 불과하다. 없어도 그만인 복과 은혜다. 이렇게 큰 복과 은혜가 (믿음이)  있는데 우리는 왜 찌그러기 복과 은혜에 (유대인들은 할례에, 우리들은 성공에) 집착할까?

오늘도 결론은 주님과의 연합이다.

 

로마서 3:21-31

복음이란 무엇인가? 선을 뛰어 넘어야 떡을 상으로 받을 수 있는데, 선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떡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와우. (웬 떡? 어제 소개한 우화를 복습)

복음은 율법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방법이다. ‘주님의 의’다. 그렇다고 율법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주님의 의도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해 증명된다.

주님의 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는(믿는) 것이다. 믿음을 믿는다. 말이 어렵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미쁘심에 대한 믿음이 율법으로는 뛰어 넘을 수 없는 선을 넘게 한다. 주님의 의는 차별이 없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 반대편에 서있어서) 선을 뛰어 넘을 수 없다. (떡을 먹는) 주님의 영광(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구원의 능력)으로 선을 넘은 자에게 약속한 떡을 주신다. 값없이, 은혜로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복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알고보니 예수 그리스도께선 선을 뛰어 넘으셨다. 육신을 입고 이땅에 오신 예수님에게도 선을 뛰어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피를 흘리셔야 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예수님은 미쁘셨다. 그래서 우리들은 선을 넘지 못했지만, 주님은 선을 넘지 못한 우리는 간과하시고, 선을 넘으신 (미쁘신) 성자 예수님을 보시고 주님의 의를 나타내셨다.

죄에 대한 분명한 심판으로 주님의 의를 드러내셨고, 예수님과 연합하면 선을 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자들도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다.

그러니 내가 좀 더 멀리 뛰었다고 자랑할 수 없다. 우리 실력으로는 안된다.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 믿음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율법이 아니고 믿음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 할례자도 무할례자도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

그렇다고 믿음으로 율법을 파기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이 율법과 선지자들의 증거를 받기 때문이다. 율법을 굳게 세울수록 믿음은 확실하게 증명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율법 조문으로는 선을 넘을 수 없어 의로울 수 없는 우리가, 선을 넘으신 예수와 연합하는 것이다. 이 믿음이 있으면 예수와 연합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다.

로마서 3:1-20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은 유대인에게 우선권을 주는가? 할례가 복음에 유익한가? 바울은 범사에 많으니 유대인들(표면적 유대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맡았다고 대답한다. 말씀을 맡았다는 것은 말씀을 신뢰하고 믿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다라고 바울은 말한다. 믿지 않는 것은 주님의 미쁘심을 폐하는 태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신실하심, 미쁘심은 참되시다.

// 어릴때 아이들에게 읽어준 우화가 생각난다. 여우가 맛있는 떡을 가져왔다. 여우는 멀찍이 두 선을 그어놓고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뛰면 떡을 상으로 준다고 하였다. 제일 먼저 토끼가 뛰었다. 그러나 한뼘차이로 건너지 못했다. 다른 많은 동물들이 시도했으나 두 선사이 절반도 뛰지 못했다. 모든 동물이 뛴 후 토끼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가 제일 멀리 뛰었으니 떡은 자기 것이라고.  여우는 고개를 저으며 상은 멀리 뛴 자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건너 뛴 자에게 주는 것임을 다시 확인 시켜 주었다. 그렇지만 가져 온 떡을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주고 돌아갔다.

유대인은 토끼다. 1등이지만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다. 주님의 말씀을 맡았으면서도 (믿어야 했음에도) 믿지 못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미쁘시지 않은 분이 되지는 않는다. 주님께서 의로우심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우리가 불의해야 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거짓이 주님을 더 참되게 하고 주님께 영광을 돌아가게 하지 않는다.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다. 한마디로 주님의 말씀은 이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상대적이지 않다. 복음은 상대적이지 않다. 거짓이 있어야 참됨을, 악이 있어냐 선을, 불신이 있어냐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그래서 결국 답을 한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토끼나 다른 동물들이나 다 건너뛰어야 할 선을 넘지 못했다고. 두 선을 뛰어 넘은 동물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한다. 심지어 (두 선을 넘어야 한다는 규칙을) 깨닫는 자도, 그 규칙을 만드시 주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선언한다. 하나도 없다. 모두 입만 살아서 내가 더 멀리 뛰었느니, 혹은 다른 게임을 해야 한다느니 등등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독기를 품고 말들을 한다. 떡을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기도 한다. 파멸과 비참함이 기다리는 길을 간다. 평화, 샬롬의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알지 못한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자들이니 멸망의 길을 가는 것이다.

복음은 무엇인가? 실력으로는 (율법의 행위로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선을 건너뛰어 넘을 수 없다는 것을 (죄를) 깨달음이다. 이것이 복음인 이유는 우리의 실력 (율법의 행위) 대신 다른 것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자기 실력으로 떡을 먹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떡을 먹을 수 있는 것이 복음이 아닌가)

 

로마서 2:17-29

복음이란 무엇인가? 오늘 바울은 복음 대신 복음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 말한다. 율법을 의지하여 하ㄴ.님을 자랑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율법의 가르침을 받아 하ㄴ.님의 뜻을 아는 것도 복음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객이 전도되었기 때문이다. (죽은) 율법이 (살아계신) 하ㄴ.님을 이길 수 없다. 주님을 의지하여 율법을 자랑해야 하고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 율법을 아는 것이 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유대인이라고 불리는 너희는 하ㄴ.님 대신 율법을 자랑하지 않는냐고 바울은 도전한다. 지식과 진리가 담겨 있는 율법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율법을 범하는 것은 하ㄴ.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책망한다. 율법을 의지하여 하ㄴ.님을 자랑하기는 커녕 하ㄴ.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정곡을 찌른다.

율법은 자랑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지키라고, 행하라고 주어졌다. 율법을 행할 때에야 할례도 유익한 의식이 된다. 율법을 범하면 할례 받은 자도 무할례자와 다를게 없다. 반대로 무할례자가 율법을 지키면 할례자와 같이 여기라고 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외모가 아니다. 표면적 유대인,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이면(내면)까지 유대인이어야 하고 마음까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율법의 조문이 아니라 하ㄴ.님의 영을 따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율법의 조문을 따르는 것은 사람의 칭찬을 구하는 것이요, 성령을 따르는 것은 하ㄴ.님께 칭찬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오늘도 성부 성자 성령 하ㄴ.님과의 연합으로 귀결된다. 주님과의 연합이다.

// 하나님을 ‘하ㄴ.님’으로 고쳐 적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