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10:18-36

하나님에 대한 ‘예후의 열심’은 극에 달했다. 바알을 섬기는 사람을 색출해서 죽이기 위해 계책을 꾸몄다. 사관은 이 일에 대해서도 주 하나님께서 “네가 나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내리라 하시니라”라고 기록한다. 칭찬처럼 보인다. 그러나 보통 삼사대를 운운하는 것은 저주다. 칭찬은 천대까지 이어진다. 그러니 예후에 대한 주 하나님의 말씀은 저주에 가깝다. 하나님의 열심이 아닌 ‘예후의 열심’에 대한 결과다. 어쩌면 예후에게는 돌이킬 수 있는 또다른 기회를 주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예후는 전심으로 주 하나니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않았다. 결국 자기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신탁을 이용했다고 밖에 달리 볼 수 없다. 사관은 이런 예후를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라고 분명이 밝힌다. 예후가 다스리는 이스라엘은 칭찬이 아닌 벌을 받는다. 이스라엘은 침략당한다.  스물여덟해의 예후의 열심은 이렇게 저물었다.

예후는 외적, 눈에 보이는 우상 바알을 제거 했다.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제거 했다. 그러나 내적 우상을 제거하지는 못했다. ‘자기 열심’이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가장 무서운 우상이다.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기보다 하나님을 위해 내가 뭘 하겠다는 열심도 악인의 꾀요, 죄인의 길이요, 오만한 자의 자리다. 이것은 자신만의 하나님 금송아지를 섬기는 것이다. 사대만에 무너질 탑을 쌓는 것이다. 자기 상을 이미 받는 것이다.

나의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굴복하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열왕기하 10:1-17

예후는 철저히 자기주도로 하나님의 신탁을 이용했다. 신탁에 없는 남유다 아하시야 왕도 죽였다. 개들이 이사벨을 먹고 이사벨을 장사할 사람이 없으리라는 신탁을 들었음에도 이사벨을 장사하려고 했다. 물론 주님은 신탁을 이루신다.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들을 멸절하는 것도 예후는 자기 주도로 진행한다. 그는 왕이 되리라라는 신탁을 받았으면서도 백성의 인정을 받으려고 협박하고 회유했다. 그래서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아합의 아들 칠십명을 죽였다.

예후는 요람 왕가에 문안을 오던 남유다 왕 아하시야 형제 일행 42명도 죽였다. 아하시야 왕을 죽인 것과 함께 이것도 신탁에 없는 내용이다. 예후는 신탁을 이용해 철저하게 자기 사람을 만들어 갔다.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에게도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예후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위한 ‘자기 열심’으로 신탁을 이행했다. 사관은 아합가문의 심판에 대해서는 예후가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이르신 말씀을 이루었다고 정리한다. 그러나 예후가 왕이 되리라는 신탁을 위해서는 자기 주도로 일관했다. 예후에 대한 나만의 편견일까?

‘나의 열심을 보라’ 우리가 흔히 범하는 잘못이다. 하나님의 열심에 굴복하고 순종하라고 하신다.

 

열왕기하 9:27-37

샬롬은 만인의 관심사다. 문제는 아무도 샬롬을 나누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화, 평안은 나눠야 하는 것인데 말이다. 대적을 물리쳐야 샬롬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예후도 다르지 않았다.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까지 죽인 예후는 이세벨까지 죽인다. 이세벨은 예후에게 “주인을 죽인 너 시므리여 평안하냐?” 라고 묻다가 죽었다. 한마디로 살육으로 평안(샬롬)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반문한 것이리라.

하나님의 신탁(계시)를 실천한다는 점에서 예후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후는 하나님 편에서 신탁을 실천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 편에서 신탁을 이용했다. “내 편이 될 자가 누구냐 누구냐?” 예후는 자기 편이 될 자를 찾았다.

편을 가르고서야 어찌 평안할 수 있을까? 샬롬은 오직 하나님 편에 설 때만 누릴 수 있다.

예수님은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라고 가르치셨다.

소위 하나님의 자녀라고 자칭하면서 편가르기를 하는 사람들. 내편 네편에는 샬롬이 없다. 샬롬은 하나님께 굴복해서 모두 하나님 편에 서야 누릴 수 있다.

열왕기하 9:14-26

샬롬!

요람 왕은 평화를 구하나 이미 늦었다. 한 무리가 진격해 온다. 신하를 보내 평안을 묻지만 답이 없었다. 결국 세번째는 자신이 아픈 몸을 이끌고 화평을 구하러 나갔지만 아합의 집을 멸절시키고 왕이되라는 주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예후에게는 샬롬이 없었다.

샬롬은 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싸워 이겨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굴복해서 얻는 것이다.

열왕기하 9:1-13

엘리사는 제자 중 하나를 불러 예후에게 기름부으라고 명한다. 아합 가문에 대한 심판을 완성하신다. 예후는 여호사밧의 아들로 소개된다. 남유다 왕들이 아합가문의 왕들의 이름을 따, 아합의 사위나라가 되었다면 예후는 남유다 왕 여호사밧과 이름이 같은 아버지를 둔 것이다. 이름의 뜻도 여호사밧은 ‘여호와의 심판’이며, 예후는 ‘그는 여호와’이다. 결국 예후에게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심판을 통해 주 하나님을 드러낸다는 것이리라.

오늘의 삼세번은 ‘기름을 붓다’이다. 엘리사가 제자에게 명령할 때, 엘리사의 제가자 예후의 머리에 기름을 부을 때, 예후가 무리에게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할 때 ‘기름을 붓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엘리사도, 엘리사의 제자도, 예후도 이 일의 주권이 주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관은 이스라엘의 주관자가 엘리사도, 엘리사의 제자도, 예후도 아닌 주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한다.

예후를 통한 아합집안에 대한 주 하나님의 심판은 구체적이고 철저하시다. 멸절하기까지 심판하신다.

젊은 선지자의 행동은 예후와 함께한 무리에게 보기에는 미친짓이었다. 새파랗게 젊은 선지자가 군대장관 앞에 나타나서 독대를 요청하고 이래라 저래라 신탁을 전하고기름을 붓고 도망쳤으니 미친 자라고 한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미쳤다는 것은 ‘사람이 감당하기 어렵다’는 뜻이 강하다.  무리들은 젊은 선지자가 예후에게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신탁을 하고 갔음을 알았을 것이다. 예후는 그것을 무리에게 밝혔다. 무리는 신탁의 내용대로 예후를 왕으로 삼았다. 신탁의 내용에 순종하기 위해서라기 보다 자신들을 위해서 새로운 권력에 붙은 것이다.

세상이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 세상은 미친 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이다. 급히 도망쳐야해도, 죽음을 무릅쓰고 전할 말은 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복음을 전하는 곳에서도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