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8:16-29

우리가 아는 ‘태정태세문단세…’ 조선 왕들의 이름은 묘호라고 하여 죽은 뒤 붙여 준다. 열왕기의 왕들의 이름도 그랬을까?

오랜만에 열왕기에 남쪽 유다의 왕이 기록된다.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 오년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자신의 아들 여호람을 왕으로 세워 유다를 다스리게 했다고 사관을 기록한다(16). 사관은 아합의 아들 여호람(3:1)과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을 구분하기 위해 아합의 아들을 요람이라고 기록한다. (새번역에서는 3:1에서도 요람이라고 번역)

사관은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의 이름을 ‘여호람/요람’이라고 기록함으로써 유다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따라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음을 강조하는 것 같다. 아합의 딸을 아내로 삼고 주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

그래도 주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유다를 멸하기를 즐겨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악에는 벌이 따른다.

에돔이 유다를 배반했다. 배반하고 덤비는 에돔에 대항했으나 더 이상 정복할 힘이 없었다. 오히려 포위 당했다가 겨우 빠져나왔다. 그때 립나도 배반했다. 이렇게 아합을 따른 여호람의 시대는 저물고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다.  ‘아하시야’역시 이스라엘 여호람/요람 왕의 형,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의 이름을 따온 것 같다. 하기야 여호람이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했으니 아달랴가  일찍 죽은 자기 오빠의 이름을 아들에게 붙여준 것이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다.

사관은 아하시야가 아합의 길로 행하여 악을 행했다는 것을 ‘아하시야는 아합 집의 사위가 되었다’라고 강조한다. 이스라엘 왕 (외삼촌) 요람을 도와 아람 왕 하사엘과 싸웠고, 요람이 부상을 입자 요람 문병까지 갈 정도로 한통속이 되었다.

유다왕 여호람과 아하시야. 이름뿐만 아니라 통치스타일이 아합 집안의 길을 따랐다.

여호람과 아하시야의 선왕 여호사밧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힘을 합치면 옛영화를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맞다. 통일 이스라엘은 강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은 남북통일이 아니라 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라는 것을 망각한 접근법이다.

한반도의 남과북도 통일을 꿈꾼다. 통일 한반도의 잠재력을 상상한다. 통일을 준비하는 한국교회들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통일된 한국교회도 주하나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세상적 강성함만 꿈꾼다면 끔찍한 결과를 맞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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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정태세문단세…’ 조선 왕들의 이름은 묘호라고 하여 죽은 뒤 붙여 준다. 열왕기서 왕들의 이름도 그랬을까?

여호람의 선왕 여호사밧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힘을 합치면 옛영화를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을까? 아들 이름마져 북이스라엘 요람왕을 따랐다. 아합의 딸과 결혼까지 시켰다. 여호람도 아들을 아내 아달랴 (아합의 딸)의 오빠이름을 따서 아하시야로 불렀다. 통일 이스라엘은 강성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은 남북통일이 아니라 주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라는 것을 망각한 접근법이다. 사관은 아합의 사위국이 되었다고 기록한다.

한반도의 남과북도 통일을 꿈꾼다. 통일 한반도의 국력적, 경제적 잠재력을 상상하면 나도 즐겁다. 통일을 준비하는 한국교회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하나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세상적 강성함만 꿈꾼다면 끔찍한 결과를 맞이하지 않을까? 한국교회들도 ‘바벨론의 사위’라고 불릴지 모른다. 음. 지나친 적용일까?

프놈펜으로 돌아왔다. 새벽이 즐겁다.

열왕기하 7:3-20

[만일 우리가 성읍으로 가자고 말한다면 성읍에는 굶주림이 있으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만일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면 역시 우리가 죽을 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 하고(4)]

오늘날 한국교회는 굶주림이 있는 성읍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우리 주변의 사회적 약자들은 안다. 교회에 간들 굶주림이 있으니 교회에서 죽을 것이다. 그냥 죽기 싫은 그들은 결국 맘몬에 항복한다. 맘몬이 죽이든 살리든 ‘케세라세라’. ‘죽으면 죽으리라’!

그러나 절망적이지 않다. 긍정적이다. 악한 세상도 (교회 밖에도)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맘몬도 하나님의 사랑을 거스릴 수 없다. 그래서 굶주린 교회는 교회밖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세상사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귀를 닫고 불신앙을 고집하면 결국 죽는다.

세상을 이겼다고 말하면서 교회 안에 갇혀 말씀의 능력을 맛보지 못하는 굶주림의 신앙 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웃사랑이 없으면 성도들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갈 것이다. 그러다 교회 지도자들은 성문에서 밟혀 죽을지도 모른다.

[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9)]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 나병환자들은 교회 밖에서도 맘몬 대신 주님의 심판을 기억하고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이 되기로 한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교회에서랴.

죽으면 죽으리라!

열왕기하 6:1-7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도 아니고 그냥 쇠도끼 이야기.

예언자 수련생 (선지자 제자들) 중 하나가 수련원 증축을 위해 요단강 가에서 나무를 베다가 빌려온 쇠도끼를 요단 물에 빠뜨렸다. 도끼를 빠뜨린 수련생이 함께 일하러 왔던 엘리사를 향해 빌려온 도끼를 물에 빠뜨렸다고 하자 엘리사는 어디에 빠졌는지 묻고, 그 위치를 보고받자 쇠도끼가 떠오르는 이적으로 쇠도끼를 건져주었다.

선지자의 동행이 모든 문제를 근원적으로 차단하지 않는다. 여전히 어려운 문제는 생긴다. 그러나 선지자의 동행으로 제자는 문제를 바로 보고할 수 있고 선지자도 문제의 근원을 바로 알 수 있다. 쇠도끼가 떠오르는 이적은 물론 주님이 하시는 일이다. 열왕기의 기자는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도끼가 빠진 위치를 확인할 때만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리라고 불렀다.

주님과 동행하는 인생도 마찬가지다.

열왕기하 5

나아만의 주인이 바뀌었다. 그의 주인은 아람 왕이었다. 자신의 나병을 낫기 위해서도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한편 그 자신도 여럿을 거느린 주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의 말에 순종하여 나병이 깨끗이 낫자 하나님의 사람에게 돌아와 ‘당신의 종’ 이라고 자신을 낮추었다. 열왕기 기자는 철저하게 엘리사라는 이름 대신 ‘하나님의 사람’ 이라고 기록해서 나아만의 주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바뀌었음을 강조한다.

나아만의 신분이 바뀐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아람의 군대장관으로 아람 왕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삶의 주인은 주 하나님으로 바뀌었다. 나병환자에서 평안의 삶을 산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종들에게도 경청한 (온유한) 나아만은 노새 두마리에 실을 흙(땅)만 받았지만 하나님나라를 받은 것이다.

또 한사람 엘리사의 종 게하시의 주인도 맘몬으로 바뀌었다. 맘몬을 주인으로 바꾸자 평안 대신 거짓이 게하시를 주장했다. 결국 게하시는 나병환자로 살게된다.

평안하냐? 고 물으신다.

열왕기하 5:1-14

열왕기 기자는 나아만을 아람 왕의 군대장관으로 크고 존귀한 자, 큰 용사이나 문둥병자라고 소개한다. 주목할 것은 나아만을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라고 소개한 것이다.

주인이 (아람왕이) 나아만을 크고 존귀한 자로 세워준 이유를 기자는 나아만이 아람을 구원한 전쟁영웅 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또한 주 하나님의 섭리아래 이루어졌음을 빼먹지 않았다.

아람을 구원한 전쟁영웅 나아만은 종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이는 경청하는 마음의 소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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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말씀을 듣는 것 만큼이나 아래로부터 듣는 것도 중요하다. 여종의 이야기를 나아만이, 나아만의 이야기를 아람왕이 들어주었다.

듣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듣고 행하는 자가 지혜롭다.

나아만에게는 충성해야 주인인 아람 왕이 있었다. 그는 주인에게 경청했을 것이다. 열왕기 기자는 나아만이 아람을 구원한 전쟁영웅으로 아람 왕에게 존귀함을 받았다고 기록하면서, 이 역시 하나님의 섭리임을 빼먹지 않았다.

나아만의 경청하는 성품은 아랫사람들에게도 적용된다. 신하들뿐만 아니라 포로로 잡아온 여종의 이야기도 경청했다. 이 경청하는 성품이 나병환자였던 나아만을 낫게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는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들의 말도 경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