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5:29-39

마태복음 15:29-39 (공동번역)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을 떠나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 많은 군중이 절름발이와 소경과 곰배팔이와 벙어리와 그 밖의 많은 병자를 예수께 데려왔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다 고쳐주셨다. 군중이 보고 크게 놀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찬양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군중이 사흘동안이나 아무것도 먹지 못하였으니 참 안 됐으니 굶겨 보낼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이런 외딴 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을 것을 구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빵이 몇개 있느냐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마리가 있다고 대답했다. 예수께서 군중을 앉히시고 빵 일곱 개와 물고기를 들고 하느님께 감사한 뒤 떼어 제자들에게 나눠주셨고 제자들은 군중에게 나눠주었다.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었다.  남은 조각을 주워모으니 일곱바구니에 가득찼다. 여자와 어린이들 외에 남자만도 따져도 사천 명이 먹었다. 예수께서 군중을 돌려보내시고 배들 타고 마가단 지방으로 가셨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으로 촉발된 이방을 향한 사역이 절정에 이른다. 예수께서는 이방사람들에게도 하늘나라를 선포하신다. 병을 고쳐주셨다는 기록만 나오지만 하늘나라 복음을 선포하셨을 것이다. 군중이 이스라엘의 한나님을 찬양했다는 표현은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는 반증일 것이다. 이방사람들에게도 오병이어의 하늘나라를 맛보게 하신다. 빵 일곱개로 사천명을 먹이신 방법을 여기서도 알 수는 없다. 개인적으로는 사흘동안 굶으면서까지 자기것을 움켜잡고 있던 사람들이 하늘나라의 복음에 따라 서로서로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이해할 수 밖에 없다. 예수께서 돌들로도 떡을 만드실 수 있으시지만 굳이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적은 것이지만 (예수님도 그들도 사흘동안 군중과 같이 굶었을 것이다.) 마태는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일곱 광주리라고 기록한다. 예수님이시라면 오차없이 남김없이 빵 조각을 나눠주셨을 것이다. 더군다나 나눠주기 전보다 더 많이 남았다. 굶주림 가운데 나누는 것이 하늘나라다. 콩 반쪽이라도 나눠먹는 것이 어렸을 때의 인정이었다. (요즘은 이런 표현을 듣기 쉽지 않다.) 사랑이다. 교회는 ‘예수천당 불신지옥’ 이라는거창한 신학적 복음보다 사랑이라는 하늘나라의 맛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맛을 본 사랑을 보여줘야 한다. ‘서로 사랑하라!‘ 우리에게 주어진 새 계명이자, 완성된 계명이다.  요일 3:14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복음서에서 (5:24)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은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들어섰다.” 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했다. 요한일서의 말씀은 요한의 적용이다. 예수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마태복음 15:21-28

마태복음 15:21-28 (공동번역)

예수께서 띠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그 지방에 와서 사는 가나안 여자 하나가 예수께 나와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며 자기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자기 딸이 마귀가 들려 시달린다고 간청했다. 예수께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제자들이 예수께 그 여자를 돌려보내시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는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여자가 예수께 다가와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애원했다. 예수께서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며 거절하셨다. 그 여자는 “주님,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하고 말했다. 그제야 예수께서는”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 

//예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더 멀어진 변방이다. 이스라엘의 잃은 양을 우선 찾아 돌보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변방까지 가셨나 보다. 아흔 아흔 마리의 양 무리를 나두고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아나셨다. 그런데 그곳에서 이방 가나안 여자를 만난다. //이 가나안 여자에게도 하나님의 자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잃은 양과 다를 바 없었지만 이방여자였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잃은 양이 우선이라며 한 번 튕기신 것은, 음, 굉장히 소화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반전은 여자의 태도다. 그 여자는 개 취급을 당하더라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주워 먹기를 바랐다. 천국잔치상에 참여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쉽지 않은 자세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천국잔치에  참여시키신다. //주님 앞에서 무엇을 주장하랴! 하나도 없다. 오늘도 주님 앞에 나가 무릎을 꿇을 수는 있으니 감사하다.

https://quietwaters.blog/2023/03/02/

마태복음 15:10-20

마태복음 15:10-20 (공동번역)

읽기1)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서 돌이키시고 군중을 불러모아 가르치셨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않고,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위가 상한 것을 아시느냐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심지 않으신 나무는 모두 뽑힐 것이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비위가 상한 것에 괘념치 않으시고 그대로 두라고 하셨다. 오히려 그들을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 둘 다 구렁에 빠지는, 눈 먼 자들에 비유했다. 베드로가 비유의 뜻을 물었다. 예수께서는 입으로 들어간 것은 뒤로 나오기 때문에 사람을 더럽히지 못하지만,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증언, 모독과 같은 악한 생각들로,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히지, 손을 씻지 않고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해주셨다.

읽기2)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이 제기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문제에 대하여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전통을 핑계삼아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는 자들이라고 심하게 책망하셨다. 그들이 입술로는 주님을 공경하여도 마음이 주에게서 떠났다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뒤로 하고 군중에게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가르치셨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신 것을 걱정했으나, 예수께서는 괘념치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을 눈 먼 소경에 비유하셨다. 한 마디로 그들에게 ‘아가리 닥쳐라!’ 하신 셈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손씻는 문제에 대해 풀어주셨다. 손씻지 않고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증언 모독과 같은 악한 생각들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셨다. 결국 손을 씻지 않고 먹은 제자들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잘못을 찾아내려고 꼬투리 잡으려는 그들의 마음이 악하다고 하셨다.

//깨끗한 것을 먹어야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다. 마음 속에 깨끗한 것이 있어야 깨끗하다.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증 모독을 행해야 더러운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이런 생각을 품는 것만으로 이미 더러운 것이다. 예수께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도 살인이라고 하셨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것만으로도 간음이라고 가르치셨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찾은 것은 예수를 죽일 꼬투리를 찾으려는 마음에서니, 그들은 이미 악하다. //악인의 꾀를 따르고 죄인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것은 악한 마음에서 시작한다. 돌이켜 마음을 정결케 하는 길은 말씀과 성령 밖에 없다. 손이 아니라 마음을 씻어야 한다. 정결한 마음 주시옵소서. 오 주님.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임마누엘을 구한다.

https://quietwaters.blog/2023/03/01/

마태복음 15:1-9

마태복음 15:1-9 (공동번역)

예수의 소식에 예루살렘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갈릴리로) 예수를 찾아왔다. 그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조상들의 전통을 어긴다고 따졌다.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으니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이야말로 전통을 핑계삼아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다고 책망하셨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예로 드셨다. 그들은 ‘하느님께 바쳤다’ 는 말로 부모를 봉양하지 않았다. 이것은 전통을 핑계삼아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을 위선자라고 선언하신다. 입술로는 주님을 공경하여도 마음은 주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으며, 주님을 헛되이 예배하며 사람의 계명을 하느님의 것인양 가르친다 라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으로 책망하신다.

//중심 예루살렘에서도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이) 변방 갈릴리의 변화를 인지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의 행보를 율법의 완성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전통의 파괴로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오히려 전통을 지키기 위해 율법의 정신을 파괴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신다. //할례가 율법보다 앞서듯이 사실 율법이 전통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전통이 아니라면 언제든지 문화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전통이든 율법이든 그 정신이 더 중요하다. 예수님이 율법을 사랑으로 승화시키신 이유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부모 공경/봉양을 뒤로 미루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부모공경을 믿음의 식구들에게까지 확장해야 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어머니요 형제 자매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성도에게는 혈통적 부모와 함께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는 부모들을 봉양해야 할 의무가 있는 셈이다. //전통을 따지는 것은 사람이 만든 계명을 하나님의 것인양 가르치는 꼴이다. 말뿐인 예배요,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잘못된 전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성서를 읽어야 하고 보혜사 성령님의 깨닫게 하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전통에 비추어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으로 성서를 읽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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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4:22-36

마태복음 14:22-36 (공동번역)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홀로 남아 군중들을 돌려보내신 후, 조용히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다. 제자들이 탄 배는 역풍을 만나 풍랑에 시달리고 있었다. 새벽 네시쯤되어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다. 그것을 본 제자들은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소리를 질렀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주님이시면 자신더러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하고 소리쳤다. 예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밟고 예수께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거센 바람을 보자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들었다. 베드로는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고 예수께서는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아 주시며,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하고 말씀하였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배에 오르자 풍랑이 그쳤다. 배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하고 경배했다. 그들이 겐네사렛 땅에 이르자 그곳 사람들이 예수를 알아보고 부근 지방에 두루 사람을 보내 온갖 병자들을 데려왔다. 예수의 옷자락만 만지게 해달라고 청하고 만진 사람은 모두 깨끗이 나았다.

//우리 시각처럼 믿지 못할 감각이 없다. 배 위의 제자들은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생김새나 옷차림이 달라졌을 리 없다. 예수께서 물 위로 걸으신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의 눈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본다. //그나마 청각은 조금 더 정직하다. 지문처럼 안 변하는 것중의 하나가 목소리라고 한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안다. 예수님은 짠하고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기 전에 음성으로 안심시키셨다. (말의 내용보다, 목소리가 중요하다.) //우리의 감각이나 지식뿐만 아니라 외부적인 환경도 믿음을 약화시킨다. 시선이 예수님에게서 거센바람으로 옮겨가자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물에 빠지기 시작했다. 어부라고 수영을 잘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하여간 베드로는 무서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우리도 시선을 예수에게서 돌리면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의 조류에 휩쓸리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의 비명 소리를 들어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예수와 함께해야 물에 빠지지 않는다. //배 위의 사람들(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은 여전히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다. 그래서 아직은 우상을 대하듯 옷자락만이라도 만져 병낫기를 바란다. 시작에 불과한데 여기서 끝내는 사람들이 많다. //오늘도 말씀을 마음에 담는다. 성령이라는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그래야 주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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