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 20:14-29

모세가 가데스에서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며 이르되 당신의 형제 이스라엘의 말에 우리가 당한 모든 고난을 당신도 아시거니와 [민 20:14]

세상은 녹록치 않다. 형제지간이라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400년 이상 애굽생활과 40년의 광야생활에 찌든 무리를 형제라고 맞아주기에는 현실적이지 않다. 야곱이 하란에서 에서에게 많은 선물을 가지고 돌아 올 때와 상황이 전혀 다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합당한 값을 치르고서라도 에돔 땅을 지나가고자 협상을 벌였지만 돌아 온 답은 ‘노’였다. 하나님께서는 헤스본 왕 시혼에게 대해서는 같은  일에 대해 진멸을 허락하셨지만 이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이킬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다투지 말라고 (신 2:5) 하셨기 때문이다.

에돔은 이 일로 영원히 멸절 되리라는 심판을 받는다 (옵1:10).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선처, 특별히 형제에 대한 선처가 필요하다.

세상은 내가 처한 어려운 사정을 알아 주지 않는다. 형제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결국 우리가 비빌 언덕은 하나님이시다.

20장은 미리엄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아론의 죽음으로 끝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다. (히 9:27)

 

 

민 20:1-13

[민 20:1-13]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물도 없도다 [민 20:5]

영국을 다녀왔다. 아이들에게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고 하니 ‘먹는 것’이라고 한다. 집에서 일품요리에 (다른 반찬 없이, 물론 김치도 없치) 밥만 먹다가 이모집에서는 맛있는 것을 진수 성찬으로 먹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캄보디아에 오자마자 손님을 초대 하는 바람에 일품요리에 김치도 사고 국도 끓여 먹고 열대 과일에 아이스크림 후식도 먹었으나 이모집 음식에는 비할 바가 못되리라.

‘아빠 어찌하여 우리를 영국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 캄보디아로 데려왔습니까? 이 곳에는 재미있게 놀 놀이 동산도 없고 치즈도 없고 맛있는 음료수도 안사주시면서요’라는 불평이 절로 나올만 하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우리 아이들도 많이 컸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말로 힘들었나보다. 40년이 지났건만 문제만 생기면 불평과 원망으로 애굽생활을 그리워 한다. ‘노예 생활’이었는데도 말이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거룩함을 나타내셨다. 심지어 모세와 아론까지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리는 믿음없는 행동을 했지만 (모세와 아론은 또 엎드렸지만 반복되는 엎드림에 지쳤을까 모세 특유의 온유함을 버렸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거룩함을 나타내셨다.

오늘 배우는 거룩함이란 반역하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책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과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민 19:11-22

민 19:11-22

그 정결한 자가 셋째 날과 일곱 째 날에 그 부정한 자에게 뿌려서 일곱째 날에 그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그는 자기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저녁이면 정결하리라 [19]

부정한 자를 정결케 하는 의식은 정결한 자에 의해서 진행된다. 제사장, 레위인, 장로, 지휘관 등 직급이나 직무에 따르지 않는다. 정결한 자가 부정한 자를 정결케 할 수 있다. 물론 그 정결한 자 역시 정결 의식을 행한 후에는 자신도 부정해져서 자기 옷을 빨고 몸을 씻어야 했다. 부정한 자가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는 것으로 간주되어 회중 가운에 끊어져야 했다. 즉 진영 밖으로 나가야 했다. 추방이다. 더이상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다. 다시말해 혈육적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겠다면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결케 된 우리도 마찬가지다. 더 이상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나라의 백성일 수 없다. 부정한 자를 정결케 하는 하는 정결한 사람처럼 부지런히 자기 옷을 빨고 몸을 씻어야 한다. 매일 매일 그리스도로 옷입어야 한다.

왕상 20:22-34

  • 왕상 20:22-34

그선지자는 일차전을 크게 아긴 아합왕에게 이차전을 대비하라고 예언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차전을 대패하고 돌아간 아람왕의 신하들은 새로운 전술전략을 벤하닷에게 제시하였다.

첫번째는 운동장 사정이 좋아야 하니 경기장을 바꾸라는 것이고 두번째는 삼십이명이나 되는 부감독직을 폐지하고 코치만 두어 감독의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세번째는 일차전에 잃은 선수를 대신해서 새로운 선수를 보강하라고 하였다.

해가 바뀌어 벤하닷은 이차전을 시작했다. 일차전과 마찬가지로 수적으로는 비교가 안될정도로 우세했고 경기장 상황도 울툴불퉁하지 않고 평평했다. 아합왕은 일차전 시작과 마찬가지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선지자는 아합왕에게 일차전 결과를 상기시켰다. 승패는 전력이나 전술, 운동장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했다. 이번 승리로 제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라.

시합은 한동안 소강상태였다가 한순간에 이스라엘이 승기를 잡았다. 벤하닷은 우세한 전력을 가지고도 속수무책으로 밀렸다. 주전선수들도 후보도 차례로 쓰러졌다. 이제 심판의 판정만 남았다. 그때 벤하닷의 신하들이 작전타임을 요청하라고 조언했다. (심판은 작전타임을 받아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승리를 확신한 아합왕은 아람왕이 애걸하는 바람에 승리감에 도취되어 작전타임을 받아주었다. 승부는 연장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지나친 승리는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을 잊게하고 스스로를 교만하게 만든다.

 

왕상 20:13-21

왕상 20:13-21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한 선지자가 아합왕에게 나아왔다. 그는 아합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나에겐 개인적으로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가 관심문구인데 아합에게는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누구를 통하여 이런 일이 일어날지 묻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방 고관의 청년들 (우리로 하면 화랑이 되나? / 서양의 표현으로 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선제 공격이라고 예언한다.

아합은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을 계수하였다. 230명. 기드온의 300 용사보다 작은 규모다. 그리고 싸움에 나갈 병사를 계수하니 칠천명이었다. 사관은 의도적으로 칠천명이라는 수를 적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알에게 무릎꿇지도 입맞추지도 않은 사람의 수와 동일한다. 세상싸움이 영적싸움이 되는 순간이다.

사람의 수에 의지한 벤하닷은 자신이 먼저 선전포고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낮에 돕는 왕 삼십이 명과 더불어 마시고 취한 상태였다. 고관의 청년들의 선제공격은 적중했다. 벤하닷은 도망할 수 밖에 없었다. 아합왕은 뒤따라 나가서 아람을 물리쳤다.

열지파의 고관의 청년들이 삼십이명의 족장들을 이긴 것이다. 전쟁은 사람의 수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한 선지자. 열왕기서의 사관은 굳이 누군지 밝히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의 고뇌와 달리 무명씨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합왕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그는 또한번 여호가가 하나님인줄 아는데 실패한 것 같다.

그렇다면 그의 인생은 결국 실패한 것이다.

전쟁에서 지더라도 하나님을 아는 것이 전쟁에서 이기고도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