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상 20:1-12

왕상 20:1-12

선지자의 이야기에서 다시 왕들의 이야기로 돌아왔다. 아람의 벤하닷 왕이 군대를 모아 북이스라엘을 포위했다. 재미있는 표현은 왕 삼심이 명이 벤하닷과 함께 했다는 것이다. 왕 32명. 아마도 아람은 통일왕국이라기 보다 작은 부족들의 연합국이었을 것이다. 작은 부족국가들 중 힘있는 부족이 대표하는 연합국. 당시에는 32개 (혹은 33개) 부족이 속해있었던 것 같다.

그런 아람이 그래도 통일왕국이었던 북이스라엘이 만만해진 것이다. 물론 북이스라엘도 10개 지파로 이루어진 나라이지만 말이다. 숫자상으로 3:1이 넘는 우위를 점한 아람에게 북이스라엘의 번영기를 이끌었던 아합왕도 꼼짝 못하고 벤하닷의 요구를 다 들어 주어야 할 형편이었다.

아합왕은 벤하닷의 첫번째 요구 조공과 인질에 대해서 합의해 주었다. 그런데 벤하닷은 여기에 자신감을 얻어 지나친 요구를 하였다. 첫번째 요구에 더하여 아합이 (북이스라엘이) 기뻐하는 것을 뒤져서 가져가겠다고 하였다. 이에 아합은 장로들을 모아놓고 사정을 설명하였다. 조공과 인질에 대해 거절하지 못하였다. 추가요구에 대해 말할 틈도 없이 모든 장로들과 백성들은 조약을 이행하지 말라고 한다. 아니 조약을 맺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도 아합은 벤하닷의 사신들에게 첫번째 요구는 들어줄 수 있으나 두번째 요구는 할 수 없다고 말하고 돌려 보냈다. 아합은 철저하게 자신을 벤하닷의 종임을 자처했다.

벤하닷은 선전포고를 한다. 내가 사마리아를 잿더미로 만들겠다. 완전히 먼지 가루로 만들어 손으로 집을 수도 없게 하겠다. 많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들이 내게 벌을 내릴 것이다. 아마도 아람이 삼십이 명의 족장을 유지한 이유는 삼십이가지의 헛된 신들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아합도 응수한다. 김치국부터 마시지 마라. 갑옷 벗기전에는 큰 소리 쳐봤자다.

벤하닷은 열을 받을대로 받았다. 공격준비를 하라.

전형적이 세상싸움이다. 강자는 약자에게 요구하고 약자는 강자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다. 그러다가 강자가 지나치게 나오면 약자도 배째라 식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 아마도 가장 힘든 것이 강자가 약자가 기뻐하는 것을 빼앗는 것이다. 어쩌면 강자한테는 결코 필요도 없는 것을 약자에게 고통을 주려는 전형적인 ‘악’을 도모하는 것이다.

세상 싸움을 벌이는 벤하닷과 아합은 ‘전쟁이 하나님께 속했다’라는 것을 몰랐다.

왕상 19:1-21

왕상 19:1-21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의 패전을 목격한 아합, 아니 삼년 반 동안의 가뭄의 해갈을 만끽하며 마차를 달려 궁으로 돌아 온 아합. 그는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했다.

아합은 /엘/리/야/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였는지를 이세벨에게 말했다고 사관은 기록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을 전달했다고 한다면 아합은 가뭄을 해갈을 선언한 엘리야는 쏙 빼놓고 만다. 하여간 사관의 관점에서 보면 아합은 갈멜산 사건으로부터 참 하나님에 대한,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는 백성들의 외침을 외면한 것이다.

그러니 이세벨의 반응은 어쩌면 당연하다. 주장인 자신이 전면에 나서지 않은 싸움의 결과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두고보자, 내일 다시 싸우면 죽는 쪽은 너 엘리야다’라는 도전을 엘리야에게 하였다. 이세벨은 바알의 선지자들이 아니라 신들을 등에 업고 싸우겠다고 하였다. 어찌보면 이세벨도 억장이 무너져 내린 상황이었다. 당장 엘리야를 치겠다는 것도 아니고 내일을 기약하겠다는 거다. 백성들이 엘리야 편에 섰다는 것이 두렵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엘리야가 이 상황에서 이사벨의 도전을 피했다. 사관은 엘리야가 ‘자기 생명을 위해 도망’하였다고 기록한다. 북이스라엘에서 유다로 그리고 유대 광야를 지나 호렙산으로. 엘리야는 무너졌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죽음을 피해 도망친 엘리야가 죽기를 원하는 상황. (두번이나) 천사의 도움이 없이는 먹고 마시는 것도 못할지경에 이른 엘리야. 엘리야도 하나님의 일을 자신이 했다고 생각했을까? 더이상 하나님의 일을 할 자신감을 상실한 엘리야. 결국 그는 호렙산 한 굴에 칩거하고 만다.

이런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으로 나타나셨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은 동굴속에 묻혀있어서는 안된다. 드러나야 한다. 엘리야는 자신을 변호하였다. 자신은 하나님께 특별한 열심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는데 자신만 살아남았다고. 그런데 자신의 생명마져도 위험하다고. 오! 엘리야.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강한바람으로, 지진으로, 불로 나타내보이셨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적가운데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세미한 소리. 말씀으로 엘리야와 함께 하셨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는냐?”

한번 무너지 엘리야의 마음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똑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이런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사명을 주셨다. 하사엘에게 기름부어 아람왕이 되게 하고, 에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하나님의 신탁은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기 아니한 자니라”

엘리야의 후계가 정해졌다는 것은 엘리야의 은퇴를 의미한다. 근본도 없이 나타난 (그저 길르앗 디셉 사람) 엘리야는 엘리사부터 만난다.

엘리사. 사밧의 아들. 열두 겨릿소로 밭을 가는 부농의 아들이었을 그는 엘리야를 따른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기름을 붓지 않았다. 자신을 따르라는 표로 겉옷만 던졌을 뿐인데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르기로 결심한다.  엘리사는 부모에게 작별인사를 하겠다고 엘리야에게 요청했고 엘리야는 허락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한 겨릿 소를 잡고, 멍에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들에게 주어 먹게 하고 자신은 엘리야를 따르면 수종 들었다.

오늘은 생각할 이야기가 너무 많다.

왕상 18:16-29

왕상 18:16-29

오바댜는 아합왕을 만나 엘리야를 찾았다고 보고하고 아합은 엘리야를 만나러 갔다. 엘리야를 마난 아합은 엘리야를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라고 부른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것은 자신이 아니라 아합과 오므리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정정한다.

그리고 그 유명한 갈멜산 대결이 시작된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바알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불러 모으라고 한다. 아합이 선지자를 불러모으자 엘리야는 모인 백성들에게 나아가 결단은 촉구한다. 너희가 어느때까지 여호와와 바알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든 바알이든 참 하나님을 따르라고 하였건만 백성들은 잠잠하였다.

엘리야는 여호와의 선지자의 대표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갈멜산 대결을 시작한다. (아세라 400명은 어디 갔을까?)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바알의 선지자들이 아침부터 낮까지 아무리 바알의 이름을 불러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엘리야를 만난 아합은 엘리야에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말했다.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고난을 엘리야에게 떠 넘긴 것이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아합과 오므리’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정정해 주었다.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들도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된 길로 행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잘못은 두주인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재물과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재물이 따라오지 않으면 하나님이 자신을 돌보지 않으신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하나님을 따르든지 재물을 따르든지 하라.

왕상 18:1-15

왕상 18:1-15

오바댜! 아합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은 엘리야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바댜도 있었고 오바댜가 숨겨준 백명도 있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암흑의 시대, 두려움의 시대였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다시 아합왕에게 나갈 것을 말씀하셨다. 엘리야는 사마리로 갔다. 아마도 지명수배를 받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엘리야는 아합왕에게로 출발했다.

아합왕은 일 왕궁 을 오바댜에게 맡기고 있었다. 왕의 비서실장이라고 해야 할까? 정무수석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여로보암의 길에 악을 더한 아합왕의 최측근에서 일하는 오바댜가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는 자라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 오늘날이 였다면 스스로 옷을 벗고 내려와야 하는데. 하여간 오바댜는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를 멸할 때 선지자 100명을 구해, 숨겨주었다.

사마리아의 기근은 더이상 견디기 어려웠다. 아합왕이 친히 물의 근원과 시내를 조사해서 가축들을 살리는 프로젝트를 시행하기 위해 오바댜와 함께 북이스라엘 땅을 두루 다녔다. 효율을 위해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길로 갔다. 그 길에서 오바댜는 엘리야를 만나 알아본다. “내 주 엘리야여 당신이시니이까?”

엘리야는 오바댜에게 아합왕에게 가서 자신이 여기 있다고 알리라고 명했다. 그러자 오바댜는 두려워한다. 자신이 아합왕에게 말하러 간 사이에 엘리야가 자리를 떠나면 허위보고로 자신만 죽게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스스로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선지자 100명도 숨겨 주었는데 그것을 모르느냐고 항변한다.

엘리야는 오바댜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내가 오늘 아합에게 보이리라”라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였다. (이에 오바댜는 아합왕에게 가서 기근의 원흉인 엘리야를 찾았다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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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의 가뭄과 기근의 원흉으로 지명수배를 받은 엘리야는 죽음을 각오하고 아합왕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음을 무릅쓰고 숨겨준 오바댜는 여전히 현실적 핍박속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고 있었다. 아합왕에게 기근을 예언한 엘리야의 일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오바댜의 일은 사람들 사이에 회자될 일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왕상 17:8-24

왕상 17:8-24

하나님의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다.

그릿 시내가 마르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머루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곳 한 과부에게 명령하여 엘리야를 먹이시겠다고 하셨다.

시돈은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의 나라다. ‘엘바앗 (바알과 함께)이 왕으로 다스리는 나라다. 바알신앙의 중심지로 엘리야를 보내셨다. 그렇다고 그릿 시내 외진곳에 숨어있으라 하신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보내신 이유는 무엇일까?

엘리야는 순종하여 사르밧으로 갔다. 그가 성 문 앞에 이를 때 한 과부를 만났다. 그 과부는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다. 엘리야는 과부에게 물을 요청하면서 떡 한조각도 요구했다. 과부는 엘리야에게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 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라고 대답하였다.

과부는 엘리야를 알아 보았을까? 과부의 대답을 보면 알아본 듯 하다. 이미 가뭄이 심해진 상황이라 가나안 일대에서는 가뭄이 아합왕에 대한 엘리야의 예언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을 것이다. 엘리야를 본적이 없었겠지만 만약 엘리야가 낙타 털 옷에 가죽 띠를 띠었다는 옷차림을 그때부터 하고 있었을 수 있다. 그러면 엘리야라고 알아 보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원수 같은 입장이다. 엘리야의 예언으로 자신과 아들마저 죽어야 하는 상황에서 떡까지 요구하는 엘리야에 대해 돌연 반항조로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떡까지 달라고 웃기지 마라 너때문에 우리가 굶주리고 있는데 너 줄 떡이 어디 있니! 있다면 우리가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겠다. 뭐 이런 심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엘리야는 평안을 전한다. 그래 네 말대로 마지막 떡을 만들어라. 나를 위하여 작을 떡 한개를 만들어 가져 오고 과부와 과부 아들을 위하여는 나중에 만들라고 한다. 무엇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라 하셨느니라”라고 과부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순종은 과부의 몫이다. 과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순종의 결과는 엘리야도 과부의 가족도 육의 양식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순종의 결과는 항상 부족하지 않았다이다. 차고 넘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다.)

먹을 것이 있다는 것으로 평안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은 것이다. 과부에게 있어서는 전재산과 같은 아들이다. 과부의 반응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

// 복음은 때론 저주같이 전해질 때가 있다.

엘리야는 과부의 아들을 받아 다락으로 안고 올라가서 자기 침상에 누이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기도했다.  엘리야의 기도도 과부의 반응과 다를게 없다.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 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이 죽게 하셨나이까?”

//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이 재앙일 수 있다.

그래도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었다. 아이들 살려 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과부의 아들을 살려 주셨다.

과부는 신앙고백을 한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과부에게 가뭄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라는 확실한 증거가 없었다. 바알신이 잠시 자고 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떨어지지 않는 밀가루와 마르지 않는 기름도 마술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니 과부의 엘리야 봉양은 가뭄에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 한 행동에 불과 했을 수 있다. 그런데 아들의 죽음은 달랐다.

// 이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 오시는 것부터,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이 고침을 받은 것까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이것을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고백하지 않았는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도 흥하여야 하리라”의 세대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맛보기 그만큼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