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 5:8-14

주안에서 빛이라

간단 명료. 어둠이 갑자기 빛이 될 수 없다. 더이상 어둠이 아닌 이유는 빛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어둠은 빛이 없는 것이다. 빛이신 예수님께 나오면 더 이상 어둠이 아니다. 주안에서 빛이다.

새사람을,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과 마찬가지로 빛이신 주 안에 있는 것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로 알 수 있다. 역으로 말하면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따르는 것이 빛의 자녀로 행하는 것이다.

착함, 의로움, 진실함이라는 성품은 개인의 성공? 보다 공동체를 이뤄가는데 필요한 덕목이다. 그러니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시험하는 것도 그 목표가 개인적인 성취보다도  공동체의 유익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로 함께 지어져 가기위한 목표라야 한다.

어둠의 일, 주안에서 하지 않는 일에는 열매가 없다.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세우는 일이 아니라면 열매없는 어둠의 일이라 하지 말아야 하고 오히려 책망해야 한다. 어둠 가운데 은밀히 행하는 일은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일이다.

책망은 부끄러운 일을 드러내는 것이요,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빛가운데 나오는 것이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책망을 거부하고 정죄받는 사람들도 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3:19-21)

그리스도인이 주안에서 빛인 이유는 우리의 부끄러움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더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있을까 ? 부, 건강, 출세, 자녀의 형통, 교회의 직분, 많은 헌금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죄인임을 고백하는 세리의 기도야 말로 주를 기쁘시게 한다.

나의 부끄러움으로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으니 감사합니다.

엡 5:1-7

사랑을 받은 자

새사람을 입은 자, 그리스도로 옷입은 자는 사랑을 받은 자다. 요셉에게 채색옷이 입혀졌듯이 돌아온 둘째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이 입혀졌듯이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도 새사람, 그리스도로 옷입혀졌다. 그러니 사랑받은 자다. 하나님의 자녀다.

사랑받은 자녀는 부모를 본받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래서 바울도 성자하나님을 본으로 삼는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셨다. 우리도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가장 큰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가기위해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해야 한다. 음행, 더러움, 탐욕은 모양도 버려야하고 음담패설을 입에도 담지 않는 것이 성도에게 마땅하다. 대신 감사의 말을 해야 한다. 음행, 더러움, 탐욕은 우상숭배다.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을 수도, 그리스도로 옷입힐 수도 없다.

음행, 더러움, 탐욕은 새사람을 입은 사람이 아닌 불순종 하는 사람들, 옛습관을 따르는 사람들, 결국 우상숭배자들이다. 이들과 함께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들과 완전히 분리되어 따로 살라는 말이 아니다. 파트너가 되지 말라는 뜻이니 동역하지 말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심판대에 설 때 오른편 양에 속하고 왼편 염소무리에 들지 말라는 것이다. 줄을 잘서야 한다. 어렵지 않다. 성부 하나님께 순종하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면 쉽다. 내 이름을 부르시는 선한목자의 소리를 따라가면 된다.

선한목자의 음성을 아는가?

 

//사족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난 까마귀들이 너의 흰 빛 시샘하니
맑은 물에 깨꿋히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

정몽주 모친이 지은 ‘백로가’를 현대문으로 옮겼다. 이성계를 방문하지 말라고 모친이 부른 노래라고 전해진다. 방문울 마치고 돌아오던 정몽주는 이방원의 ‘하여가’ 에 ‘단심가’ 로 답하고 결국 선죽교에서 죽임을 당한다.

요즘 세상가치는 이방원 편이 우세한 듯하다. 그러나 내가 충성해야 할 (본받아야 할) ‘임’ 은 분명하다.

엡 4:25-32

새사람을 입는다.

새사람을 입은 줄 어떻게 알까? 바울은 그 증거로 교회의 지체로 거짓을 버리고 진실된 말을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 새사람을 입는 것이요,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이다. 새사람은 속임이 없고 진실하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 (5:17)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선언한다. 새사람을 입는다는 것은 결국 ‘그러므로 주안에서’의 삶을 사는 것이다.

새사람을 입은 구체적인 증거는 죄를 짓기까지 분내지 않으며, 마귀에게 틈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옛습관을 버릴뿐 아니라 선한 일을 도모한다. 도둑질 하던 자는 구제하기 위하여 열심히 선한 일을 한다, 악담을 즐기던 자는 선한 말로 은혜를 나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던 자는 하나님의 뚯대로 근심하여 후회 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버린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서로 친절, 서로 자비, 서로 용서한다. 바울은 새사람을 입는 것을 개인적 /성/품/이 변화하는 것만이 아닌 /삶/이 바뀌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다.

지난 목요일 학생들과 선생님들 교복을 맞추었다. 재단사가 와서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몸 치수를 쟀다. 상의 셔츠 하나를 만드는데 열군데 이상 쟀다. 그래도 몸에 딱 맞지 않을게 뻔하다. 나는 그냥 100사이즈 반팔 셔츠 하나를 가져와 그대로 만들어 달라고 할 예정이다. 나는 옷을 입지 않고 걸친다. (사람들이 나라는 옷걸이가 좋다고 하는 이유가 입지 않고 걸치기 때문인가? ㅠㅠ) 그러나 새사람을 입는 것은 우리 몸에 꼭 맞는 옷을 입는 것이다. 외모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이고 삶이라는 옷이기 때문이다.

물론 새사람이라는, 그리스도로 옷입는다는 것은 불편할 수 있다. 처음에는 내몸에 잘 맞지 않을 수 있다. 몸에 꽉 낄 수도 있고 헐렁헐렁해서 쉽게 벗겨 질 수 도 있다. 내 스타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에게 딱 맞는 옷인데 하나님의 형상을 잊어 버렸기 때문에 생기는 착시다. (세상이라는 울퉁불통한 거울에 비춰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러므로 주안에서’라는 안경을 끼고 살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2,3)

우리 학교는 매주 수요일이 교복입는 날이다.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매일 그리스도로 옷입고 살게 하소서.

엡 4:17-24

그러므로 주안에서

사도 바울은 이제 ‘그러므로 주안에서’라는 안경을 끼고 에베소 성도를 본다.

에베소 성도들에게 이방인 같이 행하지 말라고 한다. 더이상 이방인이 아니라 한 몸, 즉 교회의 지체다. 그러니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는 이방인일 수 없다. 이방인은 생명이 없는 우상처럼 된다. 감각없는 자가되어 욕심을 따라 행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따라야 할 그리스도는 그런 분이 (우상이) 아니다. 대신

그리스도는 진리시다. 성도는 이방인과 다르게 진리를 듣고 진리 안에서 배운다. 진리가 아닌 옛습관을 따르면 옛사람 그대로다. 여전히 이방인이다. 바울은 은근슬쩍 육체의 할례도 옛습관을 따르는 것임을 지적하듯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옛습관을 따르면 유대인도 이방인과 다를 바 없다.)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마음에 할롈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새롭게 지음을 받는 것이다. 새사람을 입는 것이다. 입는다!

나는 흰 옷을 입은 날엔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먹지 않는다. 그런데 하얀 새 옷을 입은 날에 꼭 누군가 짜장면을 사주겠다고 한다. 염려했던대로 짜장 얼룩이 묻어서 집에 온다. 아무리 조심해도 짜장면 먹고 검뎅이 자국 없이 집에 온 기억이 거의 없다. 입가에 묻은 것은 닦으면 되는데 옷에 묻은 것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 . 새옷이 헌 옷이 된다. 이렇듯 새사람을 입어도 옛사람이 되기 쉽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는 새사람을 입는 것을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3:27)라고 표현한다. 새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유니폼을 입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복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한다.

흰 옷을 입으면 짜장면이 묻을까 조심하는데 그리스도로 옷입으면 어떻게 해야할까? 얼마나 더 조심해야 할까!

엡 4:1-16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의 충만함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께서 그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 부름을 받은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능력이다. 이것을 에베소 성도들이 알았으면 하는 것이 바울의 기도였다.

그러므로 ‘갇힌 자’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권면한다. 바울은 자신이 ‘주 안에서 갇힌’자라로 소개한다. 3장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자라고 이미 소개 했었다. 결국 바울은 ‘교회 안’과 ‘그리스도 예수 안’ (3:21)에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로마 감옥에 있지만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시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는 것을 밝히는 것은 아닐까?

바울의 권면은 에베소 성도들도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4:3)이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잘 설명한 구절은 2장 22절이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가는 것이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요, 성도들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사랑으로 서로를 용서함으로 감당할 수 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됨’ (통일)이다. 건전한 지체의식은 반드시 필요하나 한 몸, 한 성령, 한 소망, 한 주인, 한 믿음, 한 세례, 한분 하나님으로의 통일을 강조한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신 이유다. 분량이 다르다. 참 어려운 표현이다.

분량이 다르다는 것은 그릇으로 지음 받은 각 사람의 용량이 다르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릇으로 지음받은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릇 가득’ 은혜를 주신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그릇 가득’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소유 전부’를 팔아야 보화가 감추인 밭을, 값비싼 진주를 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7절에서 11절로 이어지는 게 편하다. ㅋ)

그릇에 따라 사도, 선지자, 복음전도자, 목사, 교사의 은혜가 부어졌다. 그릇에 따라 은혜가 부어졌으니 그릇을 지으신 토기장이에게 은혜부음의 주권이 있다. 각 사람이 내가 사도 그릇이요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은혜를 주신 이유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  다시 돌아가서

교회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가 되도록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도록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는 것은 물리적 건물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조각’이 되는 것이고, 공동체적으로는 ‘레고’처럼 빈틈없이 조각들이 만들어진 곳에 결합되는 것이다. 메뉴얼 대로 레고를 조립하지 않으면 원래 의도했던 작품이 나올 수 없다. 메뉴얼 없는 오래된 레고 조각들로 이런 저런 작품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원래 의도했던 작품은 분명 아니다. 사람의 속임수에 불과 하다. 이것을 창의성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의 속임수요 간사한 유혹, 온갖 교훈의 풍조다.

하나님께서는 레고 한조각 한조각이 어디에 정확히 조립되어야 할 지 아신다. 그 조각 역할을 하는 것이 참된 것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이고 교회로 자라는 것이다.

레고조립을 생각하라. 조각은 자신이 놓여질 자리가 준비되지 않으면 그냥 조각들 속에 묻혀 있어야 한다. 조각들은 다른 조각들의 도움을 받아 자기 위치에 조립된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스스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 존재할 수 없다. 이미 조립된 누군가와 연결되고 결합되어 존재한다. 성령께서 이 일을 하신다. 교회의 지체로 조립되기 위하여 누군가가 레고처럼 나의 일부 혹은 전부를 가리면서 연결되고 결합될 수 있다. 나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 그런 위치에 박혀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게 교회를 세워가는 하나님의 방법이고 우리가 순종해야 할 길이다. 다른 지체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작품이 교회다.

(오늘은 본문이 좀 길다. 이렇게 이해하면서 적어가는데만 한참. 레고회사에 감사)

레고 조각이다. 어디에 꽂혀야 할 지 깨닫게 하시고 다른 성도들이 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몸에 연결되고 결합될 수 있도록 나는 더 작아지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