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더 1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롬 14:17)

에스더서 저자는 먹고 마시는 나라의 극치로 서문을 연다. 인도에서 구스 (아라비아반도) 까지 180일간의 잔치, 그리고 7일간 이어지는 왕궁잔치. 아름다움과 질서까지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마지막날 왕이 취하기 전까지였다. 아니 온 성이 취했다. (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아하수에로 왕이 취하기 전에는 빈부귀천의 차별도 없었고 부부유별의 질서도 있었던 것 같다. 그게 한순간에 무너져 결국 술취함과 남존여비의 나라로 전락했다. 의와 평화와 기쁨이 빠진 그냥 먹고 마시는 나라가 되었다. 세상왕이 다스리는 나라의 한계다. 세상 지혜자들의 한계다.

이렇게 삼강오륜이 깨어진 취함의 나라에 에스더는 등장한다.

세상잔치는 끝났다. 영원하지 않다. 교회에서도 하나님의 법이 깨어지고 재물에 취한 나라에 살고 있다.

공동번역 1절은 ” 모르드개는 꿈에서 깨어나, 자기가 꾼 꿈과 그 속에 나타난 하느님의 계획에 대하여 생각하며 온종일 그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려고 무진 애를 썼다.” 라고 맺는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엡 6:10-24

주 안에서

주 안에 있는 것은 새사람을 입는 것이며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이다. 바울은 이 막연한 표현을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는 명령으로 설명한다. 주 안에 있는 것, 새사람을 입는 것, 그리스도로 옷입어야 하는 것은 마귀를 대적하기 위한 것이다. 옛사람의 습관으로 돌아가게 하는 마귀의 유혹으로부터 이기기 위함이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빈틈이 보이는 육적인 초보자가 아니라 고단자들, 눈에 보이지 않는 막후의 영적 실세들이다.

// 그래서 온몸을 보호해야 한다. 군인으로 말하자면 완전군장을 해야 한다. 얼마전 전역한 이승기가 30킬로 군장을 메고 400킬로미터 천리행군을  했다고 한다. 육군의 완전군장무게는 50킬로에 육박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무게는 중요하지 않다. 기능이 중요하다. 세상의 악한 가치와 맞서 하나님나라에서 설 수 있게 해준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무겁다고 벗어놓고 다녀도 되는 것이 아니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미스릴갑옷처럼 가벼우니 항상 입어야 한다. 진리의 허리띠, 정의의 가슴보호대,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칼.

그러나 완전군장을 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낙오하지 않아야 한다. 믿음의 여정을 완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군대열에서 떨어져서는 안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기도와 간구다. 성령의 교통하심이다. 바울은 반복해서 에베소 성도들을 일깨운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야 한다는 것을. 그러니 내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함께 지어져 가기 위해서 여러 성도들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한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다.

바울의 기도요청은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을 신고’의 적용이라고 생각된다. 완전군장을 했어도 개인에게 부족한 부분이 있다거나, 혹은 자신에게 주어지 임무에 따라 더 닦고 조이고 기름쳐야 할 부분이 있을 것이다. 바울은 복음전도의 일을 하다가 갇힌 자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을 위해 기도요청을 한 것이다. ‘담대히’라고 두번이나 강조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상황도 두기고를 통해 알려 주겠다고 적는다. 막연한 기도요청이 아니라 사정을 알고 기도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전신갑주는 성도 개인이 입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입는 것이기도 하다. // 교회가 전신갑주요, 주님이 전신 갑주다. 그래서 ‘주 안에서’ 살아야 한다.

편지는 ‘은혜와 평강’ 순서를 바꿔 마친다.

평안이 있을지어다. 은혜가 있을지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변함없이’

엡 6:1-9

주안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그리스도를 경외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머리라는 뜻이요 ‘피차 복종하라’라는 말씀은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 된 우리들은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주 안에서’는 누가 높고 누가 낮고 따질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고 공경해야 한다.  3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라는 말씀은 이 아침에는 부모님께 순종하고 공경하는 데 필요한 (부모님을 봉양하는데 필요한) 물질도 주시고 부모님보다 먼저 죽는 불효를 면하게 해주신다는 말씀으로 들린다.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은 불효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명령이다.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다.

아비들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하신다. 달리말하면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지 않으면 자녀를 노엽게 하게 된다는 뜻일 수 있다. 바른 부모가 되기위해서도 주님을 더 잘 알아가야 한다.

종들도 주 안에서는 상전보다 낮은 자가 아니나 상전에게 순종해야 하고 상전들도 주 안에서 종들보다 높은 자가 아니니 종들을 위협하지 말아야 한다. 종과 상전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바울은 복음을 위탁받은 사람들의 원리를 적용한다.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 2:4) 결국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주 안에서’행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계속 강조한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존재라고.

 

엡 5:22-33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막내가 결혼할 때 권면하거나 부부상담을 해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한 여자의 남편인 나는 이 아침에 굳이 ‘아내들’에게 하는 명령을 들을 필요가 없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셔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사랑하라. 사랑하니 아내를 위해 죽어야 한다. 남편으로서의 권리를 내려놓아야 한다.

바울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아내로 맞이하셨다. 성자의 권리를 내려 놓으시고 죽으셔서 (우리처럼 되셔서) 신부로 맞아 주셨다. 성부하나님께서는 성자를 부활시키셔서 성자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셨다. 신부된 우리는 덩달아 사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죽으신 것은 교회를 깨끗게 씻기 위함이요, 거룩하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죽었었고 그리스도는 그런 우릴 위해 죽으셨다. 죽었다는 (죽는다는) 것은 권리를 내려 놓는 다는 말이다.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신부로 다시 살리신 것이다. 그리고 흠없고 아름답게 단장하신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를 제 몸과 같이 사랑하고 하신다. 아내 사랑이 곧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냐고 반문한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자기 몸으로 사랑하신다. 남편들아 아내를 자기 몸인 줄 알고 사랑하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어찌 말로 다 이해하랴. 이 땅에서는 아내를 사랑함으로 체득해야 알 수 있다. 아내는 나의 절반이 아니다. 살중의 살이요 뼈중의 뼈다. 하나다. 한몸을 이룬다. 한몸을 아내와 나로 분리한다는 것 자체가 우습다. 하나님과 여러 증인들 앞에서 결혼서약을 하지 않았던가. 상처를 받기도 하였고 물론 상처도 주었다. 그러나 한몸이다. 서로 붙어있는 레고 조각이다. 교회의 지체로 여기 저기 떨어져서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은사는 다를지라도 가정을 통해 주시는 은사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라고 하신다. 남편들이여 자기 몸을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아내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내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이요, 내가 죽지 않고 아내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살을 꿈꾸는 것이다. 아내를 위해 죽으라고 하신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나를 위해 사는 것이다. 한몸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를 위해 죽으셨다. 그냥 사랑하라. 그냥 사랑하라. 사랑하라.

 

엡 5:15-21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오직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

사랑을 받은 자, 주 안에서 빛인 자들에게 바울은 명한다. 지혜 없는 자가 어리석은 자요 어리석은 자가 술 취한 자 일 것이니 세월을 아끼기 위해서는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해야 하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세월을 아끼는 것은 시간을 아끼는 것과 다르다. 무슨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것도 아니고 더 많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멀티타스킹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세월을 아끼는 것은 ‘더 빨리’와 ‘더 많이’를 추구하게 만드는 악한 시대 정신에 따라 살지 말고 우리가 가진 것을 투자해서 (손해 보더라도) 주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도록 악한 시대 정신에 세상을 팔아먹지 말고 ‘다시 사라’는 명령이다. 나 자신만, 우리 자녀만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더 앞설 수 있다면 악한 세상에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경쟁심이  우리를 사로잡지 않도록 해야한다. 오 어리석도다.!

세월을 아끼기 위해서는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주의 뜻은 주어졌는데 사람마다 자기가 이해한대로 해석하는 세상이다. 물론 아전인수로 해석하고 적용한다. 예수님은 전통과 관습으로 이해하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다. 헬라인들은 헬라철학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자기 문화에 취해서 이해한다. 술 취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하여도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주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직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예수님께서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라고 친히 알려 주셨다. 성령의 도우심을 너머 ‘충만’해야 한다고 하신다. 악인의 꾀가 끼어들 틈조차 없어야 한다.

‘성령 충만’은 순종함으로 유지한다. 함께 모여 시편도 읽고 찬송도 부르고 진실된 마음으로 주신 주의 뜻을 찬양해야 한다. 범사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항상 기뻐하며, 쉬지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성령을 소멸하지 않는 방법이다. 성령충만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삼위 하나님께 대한 순종은 궁극적으로 성도들간의 복종으로 드러난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성령충만은 다른 성도에 대한 나의 복종으로 열매 맺는다. 겸손하게 하소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지어져 가는 것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성도간에 복종해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