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후서 1:1-11

베드로후서 1:1-11 (공동번역)

발신자 베드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라고 소개한다. 베드로는 수신자들을 우리의 하느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의에 힘입어 귀중한 믿음을 우리와 함께 간직하게 된 사람들이라고 소개한다.
베드로는 은총과 평화의 근원이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알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느님과 주 예수를 아는 것은 무엇일까?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경건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도 주님의 영광과 능력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알게 해 주셨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과 능력에 힘입어 귀중하고가장 훌륭한 약속을 받았다. 우리는 그 덕분으로 정욕에서 나오는 이 세상의 부패에서 멀리 떠나 하느님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미덕을 더하고, 미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교우끼리의 사랑을, 사랑에 만민에 대한 사랑을 더하라는 권면을 받았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풍성하게 갖추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더 부지런히 알려고 할 것이며, 마침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게 될 것이다. 만약 이런 것들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장님이며, 죄 용서를 받았다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이다. 베드로는 독자들을 형제라고 부른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시고 뽑아주셨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깨달으라고 명령한다. 그래야 우리가 빗나가지 않을 것이고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7절’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를 공동번역에서는 ‘경건에 교우끼리의 사랑을, 교우끼리의 사랑에 만민에 대한 사랑을 더하라.’ 하고 번역한다. 사랑의 폭이 훨씬 더 넓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가족 친척 교회내 사람들로 한정되지 않는다. 만민에 대한 사람에는 당연히 원수에 대한 사랑로 포함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사람을 받은 자들이 아닌가? //1절에서 베드로는 우리가 하나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정의에 힘입어 귀중한 믿음을 함께 간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나 ‘사랑’대신 그리스도의 ‘정의’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정의는 은혜보다 공동체를 강조하는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믿음이 공동체적이어야 한다고 적용해본다. ….

https://quietwaters.blog/2020/12/21/

요나 4:1-11

요나 4:1-11 (공동번역)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에 하느님께서 니느웨의 멸망을 철회하시자 요나는 잔뜩 열받았다. 요나는 야훼께 이렇게 될 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도망치려고 했었다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요나는 하느님께서 애처롭고 불쌍한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시는 분이요,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으시어 악을 보고 벌하려 하시다가도 금방 뉘우치시는 분인줄 알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래도 이스라엘의 원수를 살려주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항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나는 야훼께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말한다. 원수가 잘 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한다. 야훼께서는 요나가 화를 내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타이르셨지만 요나는 시내를 빠져나가 동쪽에 초막을 치고 니느웨가 장차 어찌 되는가 보려고 했다.
하느님 야훼께서는 요나의 머리 위로 아주까리가 자라서 그늘을 드리워 더위를 면하게 해주셨다. 요나는 아주까리 덕분에 아주 기분이 좋았다. 이튿날 새벽에 하느님께서 그 아주까리를 말라 죽게 하셨다. 해가 뜨자 뜨거운 열풍이 불어오게 하셨다. 내리쬐는 해와 열풍으로 요나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투덜거렸다. 하느님께서 요나를 타이르셨다. 아주까리가 죽었다고 화를 내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요나는 어찌 화가 나지 않겠느냐고 답을 했다. 야훼께서 요나에게 아주까리가 자라는 데 아무것도 한 일이 없으면서도 그것이 하루 사이에 자랐다 죽었다고 그토록 아까워 하느냐고 반문하셨다. 하느님은 니느웨에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만 해도 십이만이나 되고 가축도 많이 있으니 내 어찌 이 큰 도시를 아끼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

https://quietwaters.blog/2022/04/24/

//요나는 하나님의 자비를 배우지 못했다. 4장 12절이 있었다면 마침내 요나가 하나님의 자비에 굴복하는 내용이 기록되었을까?
요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낸다. 죄악이 하늘에 사무친 니느웨를 바로 멸망시키시지 않으시고, 요나에게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전하게 하신 것부터가 하나님의 자비다. 요나 개인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도망한 요나의 죄값을 묻지 않으시고 죽음의 뱃속에서 구해주시고 다시 한번 심판을 전하게 하신 것도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다.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얼굴을 돌렸지만, 자신의 불순종을 회개했다는 내용은 없다. 요나는 자신과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배워야 했다. 그러나 편협한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자비가 열방에 적용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우리도 이렇게 산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았으면서도 일백 데나리온 빚진자를 용납 못한다. 그러나 자비를 행하는 자가 자비를 입는 복을 누린다. 새해에는 자비를 베풀며 살자. 자선보다 자비다.

요나 3:1-10

요나 3:1-10 (공동번역)

야훼께서 요나에게 다시 한번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요나는 야훼의 말씀대로 지체하지 않고 니느웨로 갔다. 니느웨는 큰 도시로 돌아다니는데 사흘이나 걸리는 곳이었다. (유럽의 웬만한 마을들은 돌아보는데 한나절이 걸리지 않는다.) 요나는 니느웨에 들어가 하루동안 돌아다니며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잿더미가 된다고 외쳤다.
니느웨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단식을 했다. 지도자들은 니느웨 시민들에게 가축에게까지 베옷을 입히고 단식하며 하느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짓으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권력남용(기득권)을 모두 버리라고 말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노여움을 푸시고 니느웨를 멸하시려는 뜻을 돌이키실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니느웨 사람들은 이렇게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섰다. 하느님께서는 이 모습을 보시고 그들에게 내리시려던 재양을 거두셨다.

//삼일 길이나 되는 큰 성 니느웨에서 요나는 고작 하루 동안만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다. 과연 요나는 하나님의 심판의 메세지를 그대로 전했을까?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전하라고 하셨는데, 요나는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잿더미가 된다고 외쳤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자신이 전하고 싶은 메세지만 전한 것 같다. 하나님의 자비로 살아났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자비를 전하는데 인색했다. 원수의 나라에 대해서는 그래도 되는 것일까? //니느웨 사람들이 돌이키는데 삼일이 다 필요하지 않았다. 하루면 족했다. 야구에서도 타자가 3할을 치면 잘치는 타자다. 삼분의 일이면 3할을 웃돈다. 바닷물에 소금은 겨우 3.5%다. 하나님의 자비도 누룩과 같다. 적은 양으로 전체를 부풀게 할 수 있다. //요나는 멸망을 선포했지만,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께 자비를 구했다. 그리고 기득권을 포기했다. 요나서 저자는 니느웨 사람들이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섰다고 기록한다.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었다고 볼 수 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5:7)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복은 요나 때에도 이미 있었던 일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복이다. 우리도 자비를 베풀며 살라고 하신다.

https://quietwaters.blog/2022/04/23/

요나 1:17-2:10

요나 1:17-2:10 (공동번역)

바다에 던져진 요나. 야뤠께서 큰 물고기를 보내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야훼 하느님께 살려 달라고 외쳤다. 요나는 자신이 하느님의 눈 앞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하느님을 뵐 일이 다시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하느님이 큰 물고기를 보내주셔서 살려주셨다. 그제야 요나는 하느님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 자기를 구원해 주실 분이 야훼 하느님 밖에 없다고 고백했다. 야훼 하느니께서는 물고기에게 명하여 요나를 뭍에 뱉어내게하셨다.

//바닷 속에서 물고기 뱃속, 곧 죽음의 뱃속에서 요나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받은 사명이 아니라 자비로운 하나님뿐이었다. 이것이 요나를 살렸다. //바다에 던져진 요나가 산 것은 요나가 말씀을 거부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친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켰기 때문이 아니다. 죽음의 뱃속에 있는 요나를 긍률히 여기신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이다. 하나님의 눈 앞에서 쫓겨났지만 요나는 죽음의 순간에 자비로우신 구원의 하나님을 다시 기억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요나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베풀어졌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니느웨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비가 베풀어질 가능성은 있다. //세상에 더 나쁜 사람들이 있을까? 모두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요나 1:1-16

요나 1:1-16 (공동번역)

야훼의 눈 앞을 벗어나!

요나는 야훼의 말씀을 받고도 불순종한다. 요나서의 기자는 불순종을 ‘야훼의 눈 앞을 벗어나‘는 것으로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기록한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해도 그 말씀에 순종할 힘을 구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야훼의 눈 앞을 벗어나는 꼴이다. 

요나는 순종의 현장에서 멀어지려고 했다. 회피다. 말씀에 순종해야 할 현장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 결과 요나 자신은 평안할지 몰라도 주변은 광풍에 죽게 되었다. 요나는 자신이 죽으면 죽었지 니느웨로 갈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광풍보다 더 큰 어려움이 닥쳐도 평안했을지 모른다. 차라리 죽음을 택할 심산이었다. 죽어서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인생이)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없다!

2025년 새해다. 하나님 눈 앞에 살기를 다짐한다. 말씀에 좀 더 순종하기를 원한다.  세상이 시끄럽다면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한 내 탓인 줄 알고 주님 앞으로 돌아가자. 말씀에 순종하는 흉내라도 내면서 주님께 좀 더 가까이 나아가자. 흉내가 진심이되기를 바라면서. 올해도 말씀 앞에 서자. 말씀에 순종할 힘을 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