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31:10-22 (새번역)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모으시고 목자가 자기 양떼를 지키듯이 그들을 지켜주신다고 뭇 민족들에게 말씀하시고, 또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고 명하신다. 뭇 민족들에게 그들의 속량을 구원을 듣고 또 전하라고 하신다. 돌아온 그들이 완전히 회복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처녀가 춤을 추며 기뻐하고 젊은이와 노인들이 함게 즐거워할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이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고, 위로하실 것이다. 그들이 근심에서 벗어나 기뻐할 것이다. 주님이 기름진 것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실 것이며, 주님의 좋은 선물로 주의 백성을 만족시키실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신다. 

주님은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고 말씀하신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고.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고. 자식들을 잃어 위로 받기 조차 그렇다면거절한다고.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다. 이제 울음소리도 그치고 눈물도 거두라고. 수고한 보람이 있어서 자녀들을 적국에서 돌아온다고 주님이 말씀하신다. 자녀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오니 앞날에 희망이 있다고 주님이 말씀하신다. 에브라임의 탄식을 분명하게 들으셨다고 하신다. 주님이 들짐승 같았던 그들을 길들여 주셨다. 그들을 가르치셨고 순종하게 하셨다. 돌아갈 수 있게 이끌어 주셨다. 주 하나님께 돌아갈 준비를 시키셨다. 주님을 떠난 잘못을 깨닫고 곧 뉘우쳤다. 가슴을 치며 진심으로 뉘우쳤다. 물론 허물 때문에 수치와 수모를 겪어야 했지만 말이다. 주님은 에브라임을 귀한 아들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라고 불러주신다. 자식이기 때문에 책망하시지만 그 때마다 측은한 마음이 들어 불쌍히 여기셨다고 주님이 말씀하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정표를 세우라고 명하신다. 전에 지나갔던 길과 대로를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신다. 처녀 이스라엘아 돌아오라고 하신다. 살던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하신다, 방종한 딸로 방황하지 말라고 하신다. 고향 땅에 새것을 창조하셨다고 하신다. 곧 여자가 남자를 안는다고 하신다. (음~~여자가 남자를 안는다? 여자가 더이상 남자의 성적 노리개가 아니라고 하신다? 아니면 약한자가 강한자와 동등하게 된다? …)

//주님은 새창조를 말씀하신다.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하고 (고후5:17) 적용한다. 주님은 이 새창조를 구원받은 백성에게만 선포하시는 것이 아니라 뭇민족들에게 선포하시고 또 전하게 하신다.  그렇다면 주의 백성이 돌아가야할 고향 땅은 지리적 땅이 아님이 분명하다. 시온이다. 주님의 법이 있고 주님의 말씀이 나오는 곳이다. 곧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곳이다. 하나님나라다. 결국 주님의 계명과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새창조의 삶을 누리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기에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라고 보다 확실하게 우리가 돌아가야할 고향땅이 어디인지 알려준다. 주님은 우리를 자녀로 불러주신다. 주님을 떠난 잘못을 깨닫고 진심으로 뉘우쳤으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예레미야 31:1-9

예레미야 31:1-9 (새번역)

나 주의 말이다. 때가 오면 주님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 주가 말한다. 전쟁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고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다. 이스라엘이 안식처를 찾아 나서면 나 주가 먼 곳으로부터 와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주었다. (주님이 친히 안식처가 되셨다.) 나는 영원한 사람으로 너를 사랑하였고 한결 같은 사랑으로 너에게 베푼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일으켜 세우겠다. 네가 다시 일어날 것이다. 너는 너의 소구를 들고 흥에 겨워 춤추며 나오게 될 것이다. 내가 너로 사마리아 산마다 포도원을 만들게 하며 포도를 심은 사람이 그 열매를 따 먹게 하겠다. 에브라임 산에서 파수꾼들이 시온으로 올라가 주 우리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자 하고 외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참으로 나 주가 말한다. 환호와 환성으로 세계 만민의 머리가 된 이스라엘을 기쁨으로 노래하여라. ‘주님, 주님의 백성을 구원해 주십시오.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해 주십시오’ 하고 선포하고 찬양하여라. 내가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북녘 땅과 땅 끝에서 모아오겠다. 그들 가운데 눈먼 사람, 다리 저는 사람, 임심한 여인, 해산한 여인도 있다. 그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 올 것이다. 그들이 간구할 때 내가 그들을 인도하겠다. 그들이 넘어지지 않게 평탄한 길로 인도하여 물이 많은 시냇가로 가게 하겠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이고 에브라임은 나의 맏아들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안식처다. 2,3절에서 이스라엘이 안식처를 찾아 나설 때 주님이 먼 곳으로부터 와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주었다고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다. 안식처는 곧 주님이시다. 주님이 영원한 사랑과 한결같은 사랑을 베풀어 주시는 것이 안식이기 때문이다. 임마누엘이 곧 안식이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먼곳에 계실까? 주님이 굳이 먼 곳으로 떠나신 것이 아니다. 주의 백성이라는 우리가 주를 떠났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떠나 먼 이웃나라로 가서 재산을 탕진한 아들과 같다. 아버지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지켜보신다. 우리가 아버지를 향해 갈 때 아버지는 우리에게 달려오신다. //아버지는 우리가 눈이 멀었는지, 다리를 저는지, 임신했거나 해산했든지 따지지 않으신다. 사지가 멀쩡해도 스스로 안식에 들어 갈 수 없다. 주님이 불러주셔야 한다. 주님이 불러 모으시는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온다고 하신다. 회개의 눈물이며 회복의 기쁨으로 흘리는 눈물이다. 목자의 음성을 따라가는 우리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목자가 되신다. 그러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도 괜찮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주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예레미야 30:12-24

예레미야 30:12-24 (새번역)

11절에서 우리는 구원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다. 구원은 주님께서 주의 백성을 멸망시키지 않고 법에 따라 징계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절대로 벌을 면하게 하지는 않겠다고 하신다. (그러면 죄인인 우리에게 구원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물어야 한다.) 

12-17 주께서 말씀하신다. 우리 상처는 고칠 수 없고 우리가 매맞은 곳도 치유되지 않는다. 변호사도 없고 의사도 없고 약도 없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잊혀진다. 우리 죄악이 크고 허물이 많아 주님의 징계를 받았다. 우리가 받은 벌/징계에 대하여 우리 스스로는 변론할 수 없다. 입이 열개라도 유구무언이 맞다. 주님이 벌을 내리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를 압제하던 자들과 원수들의 운명이 우리처럼 포로가 되고 탈취를 당하겠지만, 주의 백성들은 주님이 고쳐주신다. 주님의 말씀이다.

18-23 주님이 말씀하신다. 주님이 우리를 회복시키신다. 주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삶을 터전을 제자리로 회복시켜주신다. 우리로 감사와 기쁨의 노래를 부르게 하신다. 주께서 다시 번성시켜주시고 영화롭게 하신다. 다시는 멸시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주의 백성의 자녀들은 옛날과 같이 주의 백성으로 회복되고 주의 백성은 주님 앞에서 굳건해질 것이다. 이제 주님은 주의 백성을 억압하던 사람들을 벌하실 것이다. 주의 백성 가운데서 지도자를 세워주신다. 그리고 하나님께 가까이 오게 하신다. 이렇게 우리는 주의 백성이 되고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신)이 될 것이다. 주님의 진노는 이제 악인들을 향한다. 악인들의 머리를 후려친다. 주님이 뜻을 이루실 때까지 주의 진노는 그치지 않으신다.  24 마지막 날에 우리는 이것을 깨달을 것이다.

//구원이란 멸망 당하지 않는 것이지만 벌은 달게 받아야 한다(11절). 우리의 죄악이 크고 허물이 많아 멸망당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구원이다. 그러나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한다면 구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구세주가 필요하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담당해 주신 예수가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이유다. 우리 스스로는 치유도 할 수도 변론 할 수도 없다. 주님만이 우리를 고쳐주실 수 있다. 주님만이 우리를 변호해 주실 자격이 있다. 주님만이 우리를 주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신다. 반면 주의 백성을 억압하는 사람들에게는 영벌이 임한다.  예레미야 때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전 사람들은 마지막 날에야 깨달을 수 있는 비밀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신 우리는 이미 안다. 주님께서 세워주신 지도자 예수께 순종하는 자는 주의 백성이 되고 주님은 말씀과 성령에 순종하는 자들의 하나님이시다. 

https://quietwaters.blog/2018/10/25/

예레미야 30:1-11

https://quietwaters.blog/2018/10/24/

// 기록된 말씀은 구원의 날이 있다는 것이다. 구원을 소망하라는 것이다. 읽고 또 읽어 구원의 날을 잊어버리지 말라는 뜻이다. 구원의 날에 대한 예언은 (그동안 예레미야는 유다를 대상으로 예언했는데, 아닌가?) 이스라엘과 유다를 포함한다. 나의 종 야곱이라고 부르신다. 결국 이스라엘과 유다는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통칭한다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구원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원할 것이라.’  구원은 결국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이다. 구원받은 자도 법에 따라 (끊이없이) 징계를 받는 존재다. 그냥 무죄방면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신다.

‘집행유예’라…

예레미야 29:1-14

예레미야 29:1-14 (새번역)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포로로 잡혀간 장로들 가운데 살아 남은 사람들과 바빌로니아로 포로로 잡혀간 제사장들과 에언자들과 온 백성에게 보낸 편지. 여고냐 왕과 그의 어머니와 내시들과 유다와 예루살렘의 고관들과 기술자들과 대장장이들이 예루살렘에서 떠난 뒤에 쓴 편지. 유다 왕 시드기야가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넷살에게 보낸 사반의 아들 엘리사와 힐기야의 아들 그마랴를 시켜 바빌로니아로 전달한 편지.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예루살렘에서 바빌로니아로 잡혀간 모든 포로에게 말한다. 너희는 그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여라. 과수원도 만들고 시집 장가가고 자녀들을 낳아라. 그곳에서 번성하여 줄어들지 않게 하여라. 그 성읍에서 평안을 누리도록 노력하고 그 성읍이 번영하도록 나 주에게 기도하여라. 그 성읍이 평안해야 너희도 평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있는 예언자들 점쟁이들에게 속지 말고 꿈쟁이들의 꿈 이야기도 곧이듣지 말아라. 그들은 단지 나의 이름을 팔아서 너희에게 거짓 예언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내가 보낸 자들이 아니다. 나 주의 말이다. 나 주가 분명이 말한다. 너희가 바빌로니아에서 칠십년을 다 채우고나면 내가 너희를 돌아보아 너희를 이곳으로 다시  데리고 오기로 한 나의 은혜로운 약속을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이들은 오직 나만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너희가 나를 부르고 나에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의 호소를 들어주겠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내가 너희를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게 하겠다. 내가 너희를 쫓아 보냈던 세상의 모든 나라, 모든 지역에서 너희를 모아 오겠다. 내가 너희를 포로로 보냈으나 나는 너희를 그곳에서 너희의 고향으로 다시 데려오겠다. 나 주의 말이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으로 잡혀간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다.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편지에 담아 전한다. 예언자가 해야 할 일이다. //주님은 포로지에서 나그네가 아니라 정착하여 살라고 하신다. 심지어 포로지를 축복하고 그 땅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다. 돌아가야 할 고향이 있는데도 지금의 삶에 충실하라고 하신다. 고향으로 부르시는 때는 곧 오지 않는다. 기한이 있다. 우리가 준비한다고 바로 될 일이 아니다. 대신 있는 곳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으라고 하신다. 주님을 찾으면 만나주시겠다고 하신다. //주님은 주님을 전심으로 찾는 사람이 있는 바로 그 곳에서 그 사람을 만나주신다. 주님은 성전이나 성소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우주적인 분이시다. >>우리는 세상에 산다. 이제는 세상의 포로나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포로지에서도 일상생활을 하라고 하신다. 종교적 열심을 강조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을 종교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집을 짓고 농사짓고 가정을 꾸리라는 것은 다분히 일상생활이다. 일상에서 하나님을 찾고 만나지 못한다면 결국은 죽은 종교다. 신앙이 아니다.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로 사랑을 행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길이다.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이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미래와 희망을 갖고 사는 길이다.

https://quietwaters.blog/2018/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