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41:21-29

이사야 41:21-29

창조주 야훼께서 열방에게 논쟁할 것이 있으면 가지고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열방에게 미래 일을 아느냐고 물으신다. 야훼의 신적 권위에 도전하려면 장차 될 일을 말해보라고 물으신다. 미래 일을 말할 수 있다면 모두 놀라며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러나 열방은 아무것도 아니며, 열방이 하는 일은 헛것이며, 열방이 섬기는 신도 혐오스러운 존재일 뿐이라고 하신다.
야훼께서는 북쪽에서 한 사람을 일으켜 오게 하실 것이다. 야훼께서 지명하여 부른 그 사람이 세상 통치자들을 짓밟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누구도, 어떤 우상도 이 일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 일러준 자도 들려준 자도 없었다. 야훼께서 비로소 이 소식을 시온에 알려주셨다. 예루살렘에 희소식을 전할 자를 보내셨다. 세상 누구도, 우상들도 말하지 못하고 야훼의 질문에 답을 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우상들은) 모두 허수아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람이요 허공일 뿐이다.

이사야 41:21-29
//(창조주 야훼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말씀하시는지 분명하지 않다. 우상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읽는다.) 앞서 읽었듯이, 우상은 사람들이 못으로 고정시키지 않으며 기우뚱 거리는 존재다. 주님께서 조롱하시듯 장래일도 과거일도 말을 못하는 벙어리다. 벙어리라서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생명이 없다. 오직 만군의 주 하나님만이 북쪽에서 세상 정복자를 일으키시고, 동쪽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오게 하시는 분이시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벙어리 우상들과 구별된다. 시온에서 법을, 예루살렘에서 말씀을 선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국지적 하나님이시면서 섭리와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우주적 하나님이시다. ///주의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을 벙어리 우상으로 대하는 어리석은 자다. 그들은 주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을 모르는 자들이다. 그래서 말씀이 선포되어도 들은 것이 없는 것처럼 반응한다. 만약 사람이 만든 우상이 하는 말을 듣는다면 그것은 자기 음성을 듣는 것이다. 우상이 말할리 없기 때문이다. 우상은 바람이요 헛된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이 우상을 찾는 이유는 자기가 듣고 싶은 소리를 주장하고 싶어서다. 심지어 삼위 하나님도 우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세상이다. 주님을 가르치려는 종교지도자들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어리석은 종교지도자들의 허언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다스림(말씀)에 순종하자. 하나님의 주권(섭리)에 잠잠하자. 역사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다. 시온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희소식이다. ////예수께서는 말씀을 듣기만 하면 어리석은 자요 듣고 행하는 자를 지혜롭다 하신다.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은 예수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은 말씀으로 우리 마음에 거하신다. 곧 임마누엘이다.

이사야 41:1-20

이사야 41:1-20

야훼께서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다. 열방을 향해 논쟁해보자고 제안한다. 누가 동방에서 한 정복자를 일으켜 세워 제국을 건설하게 했는지 묻는다. 누가 역사의 주관자인지 묻는다. 그리고 야훼께서 바로 자신이 세상 끝날까지 역사의 주관자라고 선언하신다. 열방은 주님 앞에 두려워 떨며 나아온다. 주님은 대장장이들이 만든 쇠붙이 우상과는 다르다. 우상은 못을 박아 고정해야 설 수 있는 존재들이다. (스스로 못 선다.)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종이요, 자신의 친구 아브라함의 후예라고 노래한다.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땅 끝에서 데려와서 세웠는데 버리겠느냐고 반문하신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곁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 야훼께서 그들의 하느님이요 그들의 힘이요 그들의 도움이시라고 하신다. 정의의 오른팔로 붙들어 주신다고 하신다.
이스라엘에게 서슬이 푸르게 달려들던 자들은 부끄러워 쥐구멍을 찾게 될고 결국은 멸망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고 하신다. 이스라엘과 다투던 자들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야훼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 되시며 주님의 오른팔로 붙들어주시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다시 말씀하신다. 주님 앞에서 이스라엘은 벌레 같고 구더기 같을지라도 거룩하신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도와주고 구원하시는 분이시다.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탈곡기로 사용하셔서 원수들을 까불어 바람에 날리실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야훼 앞에서 기뻐 뛰놀며 거룩하신 하느님을 찬양할 것이다.
이스라엘이 억눌린 빈민의 처지라해도 야훼께서 그들의 하소연을 들어주시고 그들을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메마른 산에 개울물을 내시고 골짜기에 샘을 솟게 하시고, 마른 땅에 물이 솟아나와 사막을 늪으로 만드실 것이다. 사막에 각종 나무들을 심으실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야훼께서 손수하신 일임을 그들이 알게 될 것이다.

이사야 41:1-20
//섭리! 역사의 주관자는 창조주 하나님이다. 임마누엘만이 복음이요 영생인 이유다. 세상 정복자들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정복도 하고 패망 당한다. 가련한고 빈궁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도움(구원)을 받는다. 따라서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람의 손으로 만든 (기우뚱 거리는) 우상에 의지하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신다. 세상 역사와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가라고 교훈한다. 교만한 자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흩어질 것이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들만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임마누엘! //종! 주님은 이스라엘을 주의 백성, 주의 자녀라는 표현 대신 주의 종이라고 부른다. 주님의 친구 아브라함의 후예를 주의 종이라고 한다. 주님은 이스라엘은 탈곡기로 사용하셔서 악인들을 키질해 버리신다. 구약에서는 주종관계가 확실하다. 구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어도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알지 못했다. 주님이 친구로 부를 만한 인물은 아브라함, 모세, 다윗 등등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친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친구와 종의 차이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느냐, 아니면 그냥 복종하느냐의 차이 같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자들이다. 물론 여전히 희미하게 보지만 말이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한 분이신 우리 예수께서는 종으로 사셨다. 그것도 철저히 종으로 사셨다. 친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사셔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데… 하물며 우리랴! 철저히 종으로 살아도 하나님 앞에서 기뻐 뛰놀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것이 복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다. 우리의 하나님(신)이요 우리의 힘이요 우리의 도움이 되신다. 임마누엘의 복을 누리라고 하신다.

이사야 40:12-31

이사야 40:12-31

야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풀어간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하나님을 온전히 소개할 수 없다. 야훼의 뜻을 좌우할 사람이 없으며, 야훼를 가르칠 사람도 없으며, 야훼께서는 가르침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야훼 앞에서는 열방이라도 물방울이나 먼지일 뿐이다. 레바논의 산림은 하늘나라의 장작으로 쓰기에도 부족하고 거기 뛰노는 짐승들도 번제물로 바치기에 모자란다. 민족들을 다 모아도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하니며 허무하여 그 자취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전혀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과연 하느님을 누구의 형상을 닮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장장이가 금은으로 부어 만든 우상이 아니시다. 손재주 있는 사람이 나무로 만들어 세운 우상도 아니시다. 하느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에 비하면 사람들은 메뚜기와 같을 뿐이다. 통치자들과 위정자들도 하느님 앞에서는 허수아비와 같다. 하느님의 입김이면 그들은 말라버리고 바람에 날리는 검불과 같다.
그러면 거룩하신 하느님을 누구와 비교할 수 있을까? 천체를 만드신 창조주이시다. 만드신 것을 하나 하나 다 아시는 분이시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야훼 주님께 불평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주님이 나의 사정을 정말로 모르실까? 그러나 야훼께서는 영원하신 하느님, 창조주이시다. 전지전능하신 (피곤을 느끼지 않으시며 지칠줄 모르시며 슬기가 무궁하신) 분이시다. 이 하느님이 힘이 빠진 사람에게 힘을 주시고 기진한 사람에게 기력을 주신다. 그래서 청년들이 힘이 빠져 허덕이고 장정들이 비틀거려도, 야훼를 믿고 바라는 사람은 새 힘이 솟아날 것이다. 날개쳐 솟아오르는 독수리 같을 것이다. 뛰어도 고단하지 않고 걸어도 지치지 않을 것이다.

이사야40:12-31
//(출소하고 새로운 세상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다. 새로운 세상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다.) 그렇다면 다스리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사야(이사야의 저자)는 하나님에 대해 쓸 말이 무궁무진하다고 노래한다. 찬송가 304장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 //이사야는 (가장 먼저) 하나님은 우리와 차원이 다르다고 소개한다. 비교불가라고 선언한다. 굳이 비교한다면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라고 말한다. 사람이 만들어 세운 생명없는 우상이 아니라 우리의 사정을 낱낱이 아시는 창조주요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소개한다. //이런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을 때, 인생은 독수리가 날개쳐 솟아오르듯 하고 고단하지 않고 걸어도 지치지 않는다고 노래한다. 그렇다고 ‘고단하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는다’를 너무 강조하면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살아도 이 땅에서는 ‘힘이 빠져 허덕이고 비틀거려도’가 인생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다만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위로와 쉼을 얻게 된다. ////바벨론에서의 귀환은 단순히 예루살렘으로 지리적 귀환만을 뜻하지 않는다. 시온(하나님의 다스림)으로의 귀환이다. 그래서 바벨론에 눌러 앉은 사람들, 다니엘도 에스더도 귀하다. 오늘날에도 각자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모든 성도가 귀하고 귀하다. 백투예루살렘 운동이 지리적 구호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하나님의 말씀(하나님의 다스림)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곳이 시온이요 예루살렘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40:1-11

이사야 40:1-11

하느님께서 주의 백성을 위로하신다. 예루살렘 시민에게 주님의 위로하심을 다정스레 전하라고 하신다. 이제 복역의 기간이 끝났다고, 벌을 받을 만큼 받았다고, 야훼의 손에서 죄벌을 곱절이나 받았다고 전하라고 하신다.
한 소리가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 하느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 길을 훤히 닦아라.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내려라.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을 넓혀라. 야훼의 영광이 나타나리니 모든 사람이 그 영화를 뵈리라. 야훼께서 친히 이렇게 약속하셨다’ 하고 외친다.
한 소리가 다음과 같이 외치라고 명하신다. ‘모든 인생은 한낱 풀포기, 그 영화는 들에 핀 꽃과 같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진다. 스쳐가는 야훼의 입김에. 백성이란 실로 풀과 같은 존재다. 풀은 시들고 꽃은 지지만 우리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으리라. 너 시온아 높은 산에 올라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너 예루살렘아 힘껏 외쳐 기쁜 소식을 전하여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질러라. 유다의 모든 도시에 알려라. 너희의 하느님께서 저기 오신다. 주 야훼께서 저기 권능을 떨치시며 오신다. 팔을 휘둘러 정복하시고 승리하신 보람으로 찾은 백성을 데리고 오신다. 수고하신 값으로 얻은 백성을 앞세우고 오신다. 목자처럼 당신의 양떼에게 풀을 먹이시며, 새끼 양들을 두 팔로 안아 가슴에 품으시고 젖먹이 딸린 어미 양을 곱게 몰고 오신다.’

이사야 40:1-11
//출소1 – (오랜만에 이사야서로 돌아오니 분위기가 어색하다. 하여간 오늘은 출소에 관한 이야기다.) 벌을 충분히 받았다고 위로한다. 그런데 교도소 문만 나가면 될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오시는 길을 내라고 명한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힘껏 외쳐 전하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선한 목자와 같이 다스리실 것이라고 하신다. //출소2 – 출소는 복역을 마쳤으니 세상으로 다시 내보냄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을 진정한 출소라고 풀어낸다.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오실 길을 닦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냥 오셔서 다스려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 않다. 내가 다듬어져서 주의 백성의 공동체 속에 녹아들어가야 한다. 평탄케 되면 나를 자랑하거나 비참해야할 일이 없다. 사람들은 사면복권된 나의 영광이 아니라 사면복권 시키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봐야한다. //출소3 – 만기 출소 했어도 여전히 풀처럼 시들고 꽃처럼 지는 존재다. 영원한 존재, 영생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삶이라고 했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으로 삼는 삶이어야 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영원하신 삼위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삼위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들 뿐이다. //출소4 – 진정한 출소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시온과 예루살렘의 거주민이 되는 것이다. 시온은 하나님의 율법이 선포되는, 곧 다스림이 있는 곳이고,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선포되는) 곳이다. 시온과 예루살렘은 같은 곳이다. 결국 시온과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법이 있고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곳이다. 영생(천국)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삶이다. 죄에서의 출소는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선한 목자의 인도를 따라 사는 것이다. 때로 사망의 음친한 골짜기를 지난다 해도. ///이사야가 전하는 구원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이다. 우리에게는 우리 허물과 죄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것으로 적용할 수 있다. 그러나 졸업이 끝이 아니듯 구원도 끝이 아니다. 귀환(출소)후의 삶이 있듯이 구원받은 후의 삶이 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

열왕기상 22:41-53

열왕기상 22:41-53

유다왕 여호사밧은 삼십오세에 왕이 되어 이십오 년간 다스렸다. 어머니는 실히의 딸 아주바였다. 여호사밧은 부왕 아사처럼 야훼 보시기에 올바른 일만 했다. 다만 산당은 그대로 두어 백성들은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드렸다. 여호사밧은 이스라엘 왕과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여호사밧은 남창들을 전국에서 쓸어버렸다. 여호사밧은 왕이 없는 에돔에 수비대를 두었다. 여호사밧은 다르싯의 상선대를 조직했으나 조난을 당해 실패했다. 여호사밧은 아합의 아들 아하지야가 선원을 보내 도와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했다. 여호사밧이 죽어 다윗 성에 안장되고 요람이 왕위를 계승했다.
아합의 아들 아하지야는 여호사밧 십칠 년에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이년간 다스렸다. 아하지야는 야훼의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해서 이스라엘을 죄에 빠뜨렸다. 부모처럼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 바알을 섬기고 예배하여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의 속을 썩였다.

열왕기상 22:41-53
//여호사밧의 어머니는 실히의 딸 아주바(아수바)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어머니 아주바와 외조부 실히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없다. 사관이 기록할 당시에는 누구나 아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다만 여호사밧이 야훼 보시기에 올바른 일을 했다는 평가에서 여호사밧의 모친 역시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본을 보였다고 짐작할 수는 있다. 특별히 아합의 왕위를 계승한 아하시야가 아버지의 길과 어머니의 길을 걸어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다고 어머니의 길을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자녀교육에서 어머니가 한 축을 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더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남유다 여호사밧에 대해 사관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1)주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 2)북이스라엘과 평화롭게 지냈다. -통혼으로 아합과는 군사적으로 동맹을 맺었다. 3) 남창을 쫓아냈다. – 남창은 그냥 남색을 하는 동성애자들이 아니라 , 아마 산당제사에 관련된 일을 하면서 몸을 팔았을 것이다. 4)에돔에 총독을 파견해서 다스렸을 정도로 군사력을 어느정도 회복시켰다. – 아마 북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이 한 몫 했을 것이다. 5)솔로몬 때처럼 해양무역선단을 꾸렸으나 북이스라엘(아하시야)과 경제적으로 손을 잡지 않았다. 다만 파선으로 경제적 번영을 회복하지는 못한 것 같다. 여호사밧은 전반적으로 주님보시기에 정직한 왕으로 꽤 영화를 누렸다. //반면 북이스라엘 아합의 아들 아하시야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아합이 잠시 하나님 앞에 겸손하였지만 주님 보시기에 정직하지 않았다. 주님 보시기에 정직하지 않았으니 다른 것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하나님을 알아갈 기회들을 번번히 놓치고, 하나님 앞에 겸비하였던 마음마져도 오래가지 못했다.) 사관은 아하시야가 아버지(아합)의 길과 어머니(이세벨)의 길을 따랐다고 기록한다. 그 결국은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 가문의 멸절로 끝난다. ////누구의 인생에나 굴곡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주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를 사느냐? 에 따라 인생의 종착역이 달라진다. 자녀를 염려한다면 나부터 여로보암의 길이 아니라 다윗의 길을 따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