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20:12-28

사사기 20:12-28 (공동번역)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 지파들은 베냐민 온 지파에 전갈을 보내었다. “너희가 이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다니,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이제 기브아에 있는 무뢰배들을 내놓아라. 그 녀석들을 사형에 처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서 악을 뿌리뽑아야겟다.” 그러나 베냐민 사람들은 동족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베냐민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과 싸우려고 살던 성읍들을 떠나 기브아에 집결하였다. 그날 여러 성읍에서 모여온 베냐민 사람들을 점호해 보니, 기브아 주민말고도 칼 찬 군인이 이만 육천 명이나 되었다. 그 군대에는 왼손잡이 정예부태 칠백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머리카락 하나 빗나가지 않게 맞히는 돌팔매질의 명수였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점호를 하니, 베냐민 지파를 배고 칼을 찬 군인이 사십만이나 되었다. 그들은 길을 떠나 베델에 올라가 하느님께 물었다. “우리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누가 먼저 나가 베냐민군을 칠까요? 야훼께서 대답하였다. “유다가 앞장을 서라.” 아침이 되어 이스라엘 군은 출동하여 기브아를 마주보고 진을 쳤다. 그들은 베냐민과 싸우려고 출동하여 기브아를 마주보고 대오를 정리하였는데, 베냐민 군은 기브아에서 나와 이스라엘 군을 쳤다. 그 날 전사한 이스라엘 군은 이만 이천 명이나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께 나가 저녁이 되도록 그 앞에서 통곡하며 다시 물어보았다. “우리가 우리 동족인 베냐민 사람들과 한번 더 싸워야 합니까?” 야훼께서 대답하였다. “쳐올라가거라.” 이스라엘 군은 다시 용기를 내어 전날과 같은 지점에서 전투 대열을 벌였다. 둘째 날도 이스라엘 군은 베냐민 군에 접근해 갔다. 그런데 그날도 베냐민은 기브아에서 마주 쳐 나와 다시 이스라엘군 만 팔천 명으 쳐죽였다. 이 때 죽은 사람들은 모두 칼을 쓰는 군인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과 전군은 베델로 일제히 올라가 야훼 앞에 앉아 통곡하며 저녁때가 되도록 온종일 단식하고 야훼께 번제와 친교제를 올리고 야훼께 여쭈었다. 그때에 하느님의 계약궤는 거기 있었고 계약궤를 모시는 사제는 아론의 손자이자 엘르아잘의 아들인 비느하스였다. “우리가 다시 올라가 우리 동족인 베냐민 사람들을 쳐야합니까? 아니면 이제 그만두어야 합니까?’ 야훼께서 대답하셨다. “나가거라. 내일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부치리라.”

삿20:12-28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응답을 듣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군다나 자기 의와 확신으로 가득찬 경우는 더욱 그렇다. 이스라엘 전군은 베냐민 기브아를 벌하기로 했다. 하나님의 자리에서 심판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기브아를 벌하는 것을 하나님께 물어야 했는데, 이미 벌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첫번째로 어느 지파가 선두에 서서 싸울지 물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전군은 자신들의 숫자를 믿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앞 장서라고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않고 자신들의 숫자를 믿으면 필패다. //첫번째 싸움에서 지자, 그제서야 동족을 치는 것이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베냐민 기브아를 치는 것이 맞다고 자신한 그들은 한 번 더 싸워야 하는지 물었다. 하나님께서 쳐올라가라고 답을 하시자 그들은 더이상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에는 하나님의 방법이 있다. 하나님의 방법을 묻지 않으면 필패다. //두번씩이나 베냐민에게 패하자 그제야 이스라엘 전군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하나님께 통곡하며 온종일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 후에야 다시 하나님께 물었다. 이번에는 베냐민 기브아를 치는 것이 맞는지 아닌지 먼저 물었다. 심판자의 자리에서 내려왔다. 심판의 도구가 가져야할 마땅한 자세다. 그제서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군의 손에 베냐민을 부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나의 확신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어렵다. 나의 간절함으로 기도해도 하나님의 응답을 듣기 쉽지 않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가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고 빈손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세밀하게 말씀하신다. 대충 들어서는 안 된다.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사사기 20:1-11

사사기 20:1-11

온 이스라엘 백성이 떨쳐 나왔다. 전체 회중은 미스바에 모여 야훼 앞에 일제히 모였다. 이스라엘 전군의 지휘관들은 이스라엘 각 지파를 거느리고 하느님의 군대를 이루어 나섰다. 칼을 찬 보병이 사십만 명이었다.

베냐민 사람들은 이스라엘 전군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스라엘은 그런 나쁜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살해된 여인의 남편인 레위인에게 물었다. 그는 첩을 데리고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로 가서 하룻밤 묵으려고 했는데 기브아의 어른이라는 것들이 일어나 자신이 묵고 있던 집을 에워싸고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가 자신의 첩을 욕보여 죽게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신의 첩의 시체를 가져다가 토막을 내어 우리가 상속받은 이스라엘의 전 지역에 보내 그들이 이스라엘에서 얼마나 더럽고 얼마나 고약한 짓을 했는지 알렸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겨레 전체가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지 당장 결정을 내려달라고 청원했다.

전군은 일제히 자기 집으로 돌아지 않고 기브아 놈들에게 보복하러 올려보낼 사람들을 제비뽑았다.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열 명 중 한 명을 뽑고 군량미를 모았다. 이스라엘 사람은 모두 뜻을 모아 기브아 성을 치려고 모였다.

삿20:1-11

//이스라엘에서 일어나지 말아야할 사건에 이스라엘 전 지역이 분노해서 모였다. 살해된 여인의 남편은 자신의 잘못은 감추고 자신이 피해자이며 첩의 죽음을 온전히 기브아 사람들의 잘못으로 증언했다. 기브아로 가서 하룻밤 묵으려고 했다는 배경만 빼고 모두 거짓 진술이다. 기브아 무뢰배들을 기브아 어른이라고 불렀다. 기브아 무뢰배들이 자기 일행 모두에게 (성)폭력을 가하려고 했던 것을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첩을 그들에게 내주었으면서도 마치 그들이 주도적으로 첩을 욕보여 죽게 했다고 말했다. 이에 이스라엘 온 회중은 기브아에게 보복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결정했다. 각 지파에서 십분의 일씩 병사를 뽑고 군량미를 모았다. ////천인공노할 사건이라도 한 명의 증언만 듣고 판결해서는 안 되는 것이 이스라엘의 법이 아니던가? 그런데 피해 당사자의 진술만으로 인민재판이 되어버렸다. 왕이 없던 시대다. 곧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스바에서 하나님 앞에 모였다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은 아니다. 코람데오는 어디에서 모였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모였느냐의 문제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마찬가지다. 어디에서 드렸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드렸느냐가 중요하다.

사사기 19:22-30

사사기 19:22-30

레위인과 첩과 종은 노인의 환대릎 받았다. 그런게 그 성의 무뢰배들이 몰려와서 노인에게 나그네를 내보내라고 요구했다.노인은 나그네에게 나쁜짓 고약한 짓을 하지 말라고 말했다. 노인은 심지어 자기 딸을 욕보여도 되니 나그네에게는 고약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무뢰배들이 말을 듣지 않자 레위인은 자기 첩을 넘겨주었다. 그들은 잔인하게 그 여자를 밤새도록 욕보이고 동이틀 때가 되어서 놓아주었다. 날이 밝자 남편이 있는 곳에 돌아 온 여인은 환히 밝기까지 문지방에 쓰러져 있었다. 남편은 아침에 일어나 다시 길을 떠나려다 첩이 문지방을 잡고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일어나 가자고 했으나 대답이 없자 나귀에 얹어서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한 그는 자기 첩의 시체를 열두 조각을 내어 아스엘 전역에 보내면서 이 사건을 신중히 심의하여 어떤 결정을 내릴지 의견을 말해달라고 했다.

삿19:22-30

//기브아 마을의 무뢰배. 그들은 나그네들을 욕보이고자 했다. 동성애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성적 폭력을 통해 자신들의 욕구를 채우는 불량배들이다. 교도소나 군대에서 일어나는 동성에 대한 성적 폭력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동성애자들이 아니고 성폭행자들이라는 것은 레위인의 첩을 밤새도록 윤간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레위인이 자기 첩을 무뢰배들에게 내주었다는 사실에서, 그는 첩에게 성매매를 시킨 또다른 성폭행자다. 19장 서두에서 첩이 친정으로 도망간 이유를 행음이라고 했는데, 첩은 산당에서의 레위인 남편에게 신전(산당)행음을 강요당했을 것이다. //왕이 없는 시대를 하나님의 다스림이 없는 시대라고 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다르지 않다. 롯이 환대한 천사들을 내놓으라고 소동한 소돔성 무리와 오늘 본문의 기브아 무뢰배들이 무엇이 다른가? //사회적 약자를 돌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곧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는 증거다. 예수께서는 양과 염소 비유를 통하여 “너희가 여기 내 형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고 말씀하셨다. 반대로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셨다. //레위인은 자기 잘못은 뒤로 숨기고 첩의 죽음을 사회악이라며 공론화 했다. 이 역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자의 특징이다. ////교회는 사회적 약자를 돌봐야할 책임이 있다. 교회마저 사회악에 핑계를 대고 가난한 자, 사회적 약자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그들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교회가 환대해야할 나그네들이다. 끼리끼리 사랑은 누구나 한다. 오히려 낯선 자들, 특별히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우리가 그런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도 그런 사랑을 하며 살자.

사사기 19:10-21

사사기 19:10-21

레위인은 더이상 처가에 머물 생각이 없어 첩과 종을 데리고 밤길을 떠났다. 여부스사람이 사는 예루살렘이 보이는 곳에 이르자 날이 많이 기울었다. 종이 여부스성에 들러서 묵어가자고 했으나 주인은 이방민족이 사는 성에 묵을 수 없다며 기브아나 라마까지 가서 묵자고 했다. 그들은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까지 갔다. 해는 이미 졌다. 그들이 기브아 장터로 갔니만 누구 하나 그들을 환대하지 않았다. 마침 에브라임 산악지대 출신 한 노인이 그들을 보고 자기 집으로 맞아들여 나그네 일행을 환대했다.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이 고대 근동의 문화였다고 한다. 종이 여부스 성에서 묵자고 하는 것이 그 방증이다. 그런데 주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방 사람의 성에 머물기보다 좀 더 가서 베냐민지파에 속한 기브아에 가서 묵기로 했다. 그러나 기브아에 도착했으나 아무도 그들을 환대하지 않았다. 동족은 다를 줄 알았는데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동향사람 노인이 그들을 환대했다. //한 노인! 그는 어렸을때부터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을 보고 자랐을 것이다. 나그네를 환대하는 풍습이 무너진 기브아 마을에서  어쩌면 그는 세상의 조류를 거슬러 사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공동체가 무너지면 미풍양속도 잃는다. (개인주의는 미풍양속을 품지 못하고 새로운 풍습을 낳기 마련이다.) 잃어버린 미풍양속 중 하나가 나그네 환대다. 오늘날에는 사회적 약자를 품는 것으로 적용하자. //종과 한 노인! 그래도 사회적 약자들에게는 여전히 미풍양속이 남아있다. 이들을 실패자라고 치부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이들이야말로 교회도 못하는 공동체정신을 회복하는 거푸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사기 19:1-9

사사기 19:1-9

이스라엘에아직 왕이 없었던 때다. 에브라임 산 속 깊은 곳에 사는 한 레위인이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 하나를 데려왔다. 그 첩은 화가나서  그를 버리고 베들레헴에 있는 친정으로 돌아가 넉달을 머물렀다. 남편은 첩을 찾아가 달래어 데려오려고 처가로 갔다. 장인은 그를 기꺼이 마중하였다. 사흘이나 대접받고 나흘째 첩을 데리고 떠나려하자 장인은 하룻밤 더 묵으며 놀다가라고 강권했다. 닷새째 아침 떠나려하자  장인은 다시 음식을 권해 그를 붙잡고, 저녁이 되자 하룻밤 더 묵고 내일 아침 일찍이 떠나라고 권했다.

삿19:1-9

//왕이 없었던 때. 또 다른 레위인 이야기다. 그도 에브라임 산지 깊은 곳에 살았다. 왕이 없었던 때라는 것은 제사장도 없었고 레위인의 역할도 없었던 때라고 이해하면 좋겠다. 이 레위인은 아마 산 속 깊은 곳에서 개인적인 산당을 운영했을 듯 싶다. 그렇지 않으면 입에 풀칠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산당이 잘 됐는지 첩을 들였다. //첩은 왜 화가나서 친정으로 돌아갔을까? 개역개정은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났다고 기록한다. 그러나 문맥상 레위인은 첩에게 이방제사에나 있을 신전행음을 강요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오늘날로 말하면 산당제사를 빌미로 성적착취 성적학대를 당해서 친정으로 도망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남편이 행음으로 도망친 첩을 (잡아서가 아니라) 달래서 데려오려고 할 다른 이유가 있을까? //이랬던 저랬던 장인은 사위를 환대한다. 딸이 당한 고초를 들었을 것인데도 하루라도 더 대접하려고 했다. 손님대접 문화가 몸에 배어서일까? 그러나 하루라도 더 대접하려는 장인의 바람에 그들은 결국 저녁에 출발하게 된다. 상대방의 일정을 무시하면 그것은 더 이상 대접이 아니다. 오히려 학대에 가깝다. ////종교의식을 빙자한 학대, 환대를 가장한 학대가 왕이 없는 시대, 곧 하나님의 다스림이 없는 시대상이다. ㅠㅠ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