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4:1-11

요나 4:1-11 (공동번역)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에 하느님께서 니느웨의 멸망을 철회하시자 요나는 잔뜩 열받았다. 요나는 야훼께 이렇게 될 것을 이미 알았기 때문에 도망치려고 했었다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요나는 하느님께서 애처롭고 불쌍한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시는 분이요,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으시어 악을 보고 벌하려 하시다가도 금방 뉘우치시는 분인줄 알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래도 이스라엘의 원수를 살려주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항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요나는 야훼께 차라리 자신을 죽여달라고 말한다. 원수가 잘 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한다. 야훼께서는 요나가 화를 내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타이르셨지만 요나는 시내를 빠져나가 동쪽에 초막을 치고 니느웨가 장차 어찌 되는가 보려고 했다.
하느님 야훼께서는 요나의 머리 위로 아주까리가 자라서 그늘을 드리워 더위를 면하게 해주셨다. 요나는 아주까리 덕분에 아주 기분이 좋았다. 이튿날 새벽에 하느님께서 그 아주까리를 말라 죽게 하셨다. 해가 뜨자 뜨거운 열풍이 불어오게 하셨다. 내리쬐는 해와 열풍으로 요나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투덜거렸다. 하느님께서 요나를 타이르셨다. 아주까리가 죽었다고 화를 내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요나는 어찌 화가 나지 않겠느냐고 답을 했다. 야훼께서 요나에게 아주까리가 자라는 데 아무것도 한 일이 없으면서도 그것이 하루 사이에 자랐다 죽었다고 그토록 아까워 하느냐고 반문하셨다. 하느님은 니느웨에는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어린이만 해도 십이만이나 되고 가축도 많이 있으니 내 어찌 이 큰 도시를 아끼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다.

https://quietwaters.blog/2022/04/24/

//요나는 하나님의 자비를 배우지 못했다. 4장 12절이 있었다면 마침내 요나가 하나님의 자비에 굴복하는 내용이 기록되었을까?
요나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낸다. 죄악이 하늘에 사무친 니느웨를 바로 멸망시키시지 않으시고, 요나에게 니느웨에 대한 심판을 전하게 하신 것부터가 하나님의 자비다. 요나 개인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도망한 요나의 죄값을 묻지 않으시고 죽음의 뱃속에서 구해주시고 다시 한번 심판을 전하게 하신 것도 순전히 하나님의 자비다.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얼굴을 돌렸지만, 자신의 불순종을 회개했다는 내용은 없다. 요나는 자신과 니느웨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배워야 했다. 그러나 편협한 민족주의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자비가 열방에 적용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우리도 이렇게 산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았으면서도 일백 데나리온 빚진자를 용납 못한다. 그러나 자비를 행하는 자가 자비를 입는 복을 누린다. 새해에는 자비를 베풀며 살자. 자선보다 자비다.

요나 3:1-10

요나 3:1-10 (공동번역)

야훼께서 요나에게 다시 한번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요나는 야훼의 말씀대로 지체하지 않고 니느웨로 갔다. 니느웨는 큰 도시로 돌아다니는데 사흘이나 걸리는 곳이었다. (유럽의 웬만한 마을들은 돌아보는데 한나절이 걸리지 않는다.) 요나는 니느웨에 들어가 하루동안 돌아다니며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잿더미가 된다고 외쳤다.
니느웨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단식을 했다. 지도자들은 니느웨 시민들에게 가축에게까지 베옷을 입히고 단식하며 하느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짓으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권력남용(기득권)을 모두 버리라고 말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노여움을 푸시고 니느웨를 멸하시려는 뜻을 돌이키실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니느웨 사람들은 이렇게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섰다. 하느님께서는 이 모습을 보시고 그들에게 내리시려던 재양을 거두셨다.

//삼일 길이나 되는 큰 성 니느웨에서 요나는 고작 하루 동안만 하나님의 심판을 전했다. 과연 요나는 하나님의 심판의 메세지를 그대로 전했을까?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전하라고 하셨는데, 요나는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잿더미가 된다고 외쳤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자신이 전하고 싶은 메세지만 전한 것 같다. 하나님의 자비로 살아났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자비를 전하는데 인색했다. 원수의 나라에 대해서는 그래도 되는 것일까? //니느웨 사람들이 돌이키는데 삼일이 다 필요하지 않았다. 하루면 족했다. 야구에서도 타자가 3할을 치면 잘치는 타자다. 삼분의 일이면 3할을 웃돈다. 바닷물에 소금은 겨우 3.5%다. 하나님의 자비도 누룩과 같다. 적은 양으로 전체를 부풀게 할 수 있다. //요나는 멸망을 선포했지만,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께 자비를 구했다. 그리고 기득권을 포기했다. 요나서 저자는 니느웨 사람들이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섰다고 기록한다. 서로에게 자비를 베풀었다고 볼 수 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5:7)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복은 요나 때에도 이미 있었던 일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복이다. 우리도 자비를 베풀며 살라고 하신다.

https://quietwaters.blog/2022/04/23/

요나 1:17-2:10

요나 1:17-2:10 (공동번역)

바다에 던져진 요나. 야뤠께서 큰 물고기를 보내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야훼 하느님께 살려 달라고 외쳤다. 요나는 자신이 하느님의 눈 앞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하느님을 뵐 일이 다시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하느님이 큰 물고기를 보내주셔서 살려주셨다. 그제야 요나는 하느님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 자기를 구원해 주실 분이 야훼 하느님 밖에 없다고 고백했다. 야훼 하느니께서는 물고기에게 명하여 요나를 뭍에 뱉어내게하셨다.

//바닷 속에서 물고기 뱃속, 곧 죽음의 뱃속에서 요나가 기억해야 할 것은 받은 사명이 아니라 자비로운 하나님뿐이었다. 이것이 요나를 살렸다. //바다에 던져진 요나가 산 것은 요나가 말씀을 거부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친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켰기 때문이 아니다. 죽음의 뱃속에 있는 요나를 긍률히 여기신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이다. 하나님의 눈 앞에서 쫓겨났지만 요나는 죽음의 순간에 자비로우신 구원의 하나님을 다시 기억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요나에게 하나님의 자비가 베풀어졌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니느웨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비가 베풀어질 가능성은 있다. //세상에 더 나쁜 사람들이 있을까? 모두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요나 1:1-16

요나 1:1-16 (공동번역)

야훼의 눈 앞을 벗어나!

요나는 야훼의 말씀을 받고도 불순종한다. 요나서의 기자는 불순종을 ‘야훼의 눈 앞을 벗어나‘는 것으로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기록한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해도 그 말씀에 순종할 힘을 구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야훼의 눈 앞을 벗어나는 꼴이다. 

요나는 순종의 현장에서 멀어지려고 했다. 회피다. 말씀에 순종해야 할 현장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 결과 요나 자신은 평안할지 몰라도 주변은 광풍에 죽게 되었다. 요나는 자신이 죽으면 죽었지 니느웨로 갈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광풍보다 더 큰 어려움이 닥쳐도 평안했을지 모른다. 차라리 죽음을 택할 심산이었다. 죽어서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인생이) 과연 하나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없다!

2025년 새해다. 하나님 눈 앞에 살기를 다짐한다. 말씀에 좀 더 순종하기를 원한다.  세상이 시끄럽다면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한 내 탓인 줄 알고 주님 앞으로 돌아가자. 말씀에 순종하는 흉내라도 내면서 주님께 좀 더 가까이 나아가자. 흉내가 진심이되기를 바라면서. 올해도 말씀 앞에 서자. 말씀에 순종할 힘을 구하자.

누가복음 2:41-52

누가복음 2:41-52 (공동번역)

소년 예수 이야기. 의로운 요셉과 마리아는 명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가곤 했다. 예수가 열두 살이 되던 해에도 예년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유대인은 13살이면 성인 대접을 받는다. 그러니 미성년자로 부모 손에 이끌려 예루살렘으로 간 것은 이번이 마지막인 셈이다.)
명절이 끝나 집으로 돌아올 때, 어린 예수는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부모는 그런줄 모르고 하룻길을 갔다가 그제서야 예수를 친척과 친지 일행 가운데서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부모는 예루살렘까지 거슬러 되돌아가며 찾았다. 사흘 만에 성전에서 예수를 찾았다.
예수는 학자들과 한자리에 앉아 토론중이었다. 예수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지능과 대답하는 자세에 경탄하고 있었다. 부모는 예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마리아는 왜 부모를 애타게 했느냐고물었다. 예수는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 하고 대답했다. 부모 예수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했다.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

//소년 예수. 12살이면 유대식으로도 미성년자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계셨다. 정체성만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니 탁월 했다. 그래도 소년 예수는 이 땅의 부모에게 순종했다. 결코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모에게 불손종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못한다는 3계명과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5계명을 범하는 것이다. 아기 예수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몸과 지혜가 자랐듯이 소년 예수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몸과 지혜가 자라 사람들의 총애까지 받았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날마다 자라야 한다. 평생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자라야 한다. 매일 영의 양식을 먹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