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14:17-29

열왕기하 14:17-29 (공동번역)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지야는 이스라엘 왕 요호아하즈의 아들 여호아스보다 십오 년을 더 살았다. 아마지야의 나머지 역사는 유다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예루살렘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아마지야는 라기스로 도망하였다. 그러나 반란군은 라기스까지 쫓아가 그들 죽였다. 그러나 그의 시체만은 말에 실어 예루살렘으로 모셔가다 다위 성에 있는 왕실묘지에 안장시켰다. 온 유다 백성이 나이 십육 세인 우찌야를 택하여 부왕 아마지야를 대신하여 왕으로 삼았다. 왕이 세상을 떠나 선조들에게 돌아간 다음 엘랏을 찾아 유다의 한 성으로 재건한 장본인이 우찌야다.
여호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지야 제십오년의 일이었다. 그는 사마리아에서 사십일 년간 다스렸다. 그는 야훼게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을 죄에 빠뜨렸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고 그 악습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하맛 어귀로부터 아라바 해에 이르는 이스라엘 영토를 되찾은 것은 그였다.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당신의 종인 예언자 요나를 시켜 하신 말씀이 이렇게 이루어졌다. 요나는 갓헤벨 출신으로서 아미때라는 사람의 아들이었다. 이스라엘의 고생이 막심한 것을 야훼께서 눈여겨보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종이나 자유인이나 할 것 없이 고생하고 있으며 도와줄 이도 없었다.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지워버리지 않기로 하시고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을 시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여로보암의 나머지 업적과 그의 치적, 공적 그리고 그가 치른 전쟁 및 유다에게 빼앗겼던 다마스쿠스와 하맛을 탈환한 것 등은 모두 이스라엘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여로보암이 선조들과 함께 잠들어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 곁에 안장되자 그의 아들 즈가리야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하 14:17-29
//남유다 왕 아마지야(아마샤)는 자신을 사로잡고 남유다을 수탈해간 북이스라엘 왕 요시아(여호아스)보다 십오 년을 더 살았다. 그러나 오래 살았다고 복이 아니다. 아마샤도 선왕 요아스처럼 신하들에게 암살되었다. 요아스는 우상숭배로 아마샤는 교만으로 말년을 망쳤다. 그나마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정치를 폈다는 평가로 만족해야 하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평가의 잣대는 다윗이다. 물론 다윗도 완벽/완전하게 살지는 않았다. 다윗의 삶도 굴국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지만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는 복원력을 보였다. 다윗은 성령이 떠나지 않기를 노래했던 사람이었다. //북이스라엘의 여호아스 왕은 아들 이름을 여로보암이라고 지었다. 여로보암(1세)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여로보암은 이름 값을 해냈다. 사십일 년이나 왕위에 있었고 영토를 회복했다. 그러나 사관의 평가는 냉정하다. 여로보암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고 그 악습을 답습했다. 하나님보시기에 악을 행했다. 사관은 여로보암2세 당시의 번영과 영토회복을 여로보암이 잘 다스렸기 때문이 아니라 고생이 막심한 이스라엘을 눈여겨 보신 하나님의 자비때문이라고 분명히 토를 달았다. ////영화 암살자(들) 논란이 뜨겁다. 극우는 마치 이스라엘의 영토회복과 번영을 이끈 여로보암을 칭송하는 모양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종이나 자유인이나 고생이 막심한데 도와줄 사람이 없자 여로보암을 잠시 구원자로 사용하신 것 뿐이지 않은가? 여로보암의 공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잣대는 확실하다. 여로보암에 대한 사관의 한줄평은 그가 하나님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것이다. 박통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대한민국 국민이 고생이 막심한데 도와줄 사람이 없자 박통을 잠시 구원자로 사용하신 것 뿐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박통이 하나님의 쓰임을 받은줄도 모르겠지만.) 하여간 박통의 경제성장의 공을 높이 평가하고 바른 정치를 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하의 총에 암살당한 그의 결국이 역사의 잣대다. 박통에 대한 한줄평을 써야한다면 분명 <그는 ‘독재자’였다.>라고 적힐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이라는 수식을 붙인들 독재자에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 동네 꼬마였을 때는 몰랐지만 자라면서 빨갱이로 몰리고 연좌제로 고생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나는 어쩌다 박통의 혜택을 입은 쪽에 속했겠지만 피해를 받은 사람도 적지 않다. 아직도 그 울분을 삭히지 못하신 분들도 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혹여 애통할 일이 없거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을 누려야 한다. 우리 사회가 아직도 정의롭지도 진실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면 기득권을 누리고 있다는 방증이다. 의에 주리고를 영적/종교적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자비를 누리고 있다면 자비를 베푸는 복을 누리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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