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0:1-18

히브리서 저자는 다시한번 첫 언약, 즉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마음의 예법, 새 언약의) 그림자라고 말한다. 그래서 첫언약인 율법을 따라 해마다 드려야 하는 제사는 온전하지 않다고 한다. 유한하고 무흠하지 않은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사는 유한하고 무흠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만약 한번에 온전히 정결하게 되었다면 다시 제사를 드려야 할 죄를 짓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서 제사 드리는 일을 그쳤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첫언약에 따라 드리는 제사들은 매년 갱신되어야 한다. 짐승의 피로는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한다. 앞에서는 사람의 양심을 온전히 깨끗하게 하지 못한다고 했다. 세상 제물 역시 제사장들처럼 유한하고 무흠하지 않다. 그래서 성부하나님께서는 율법에 따른 (불완전한) 제사와 예물을 원하시지 (기뻐하시지) 않으시고 친히 제물을 예비하셨는데, 성자 예수님이 성육신하셔서 친히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리자는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다고 한다.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 하신 말씀이라고 히브리서 저자는 적었다. 시40에서 시인 다윗의 노래를 주님의 노래로 재해석 한다.)

이것이 ‘큰’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의 ‘개혁’이다. 첫 언약에 따라 세워진 아론의 자손된 제사장들의 입장에서는 가히 쿠데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율법에 따른 불완전한 제사가 아니라 순종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혁이 필요했던 것이다.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오셨다. 그래서 첫 언약을 폐사히고 새 언약을 세우셨다. 유한하고 무흠하지 않는 불완전한 제물로 드리는 제사대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자신의 몸을 단번에 완전한 제물로 드리셔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 첫 언약에 따라서 드리는 제사는 아무리 자주 드려도 항상 불완전해서 죄를 없게하지 못한다. 반복되는 제사는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기보다는 우리의 죄인 됨만 깨닫게 해 준다. 제사의 목적은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가는 것인데 반복되는 제사는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갈 수 없음만 깨닫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큰’ 대제사장 그리스도의 제사는 단번에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가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죄를 깨닫게 해주시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되었음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다. 심판 때까지 더이상 죄를 깨달아야 할 필요가 없도록 한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

이것이 새언약이요 마음의 예법이라고 성령도 깨닫게 해 주신다.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에 기록해 주셨다.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하게 된 자들의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하지 않으신다. 자주 반복해서 죄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와 불법을 기억하지 않으시고 사하셔서 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는 삶을 반복하는 대신 거룩하게 (하나님의의 뜻을 행하며) 살라고 하신다. 예수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하는 이유다. 임마누엘을 매일 구해야 하는 이유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영적 예배(제사)다. 주일 아침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히브리서 9:23-28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는 원리는 하늘의 원리였다. 그래서 땅에 있는 모형이요 그림자인 성막/성전도 짐승의 피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참 것은 (하늘에 있는 본체는) 짐승의 피로는 온전히 정결하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좋은 (완전한) 제물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셔야만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땅에 있는 그림자/모형인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하늘에 있는 본체 성소에 들어가셔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셨다. 땅에 있는 대제사장은 해마다 짐승의 피로 땅에 있는 그림자/모형인 성소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땅에 있는 그림자/모형인 성소에서 매년 되풀이해서 제사드리셔야 하는 유한한 대제사장이 아니셨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땅의 제사장들처럼 유한하셨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창조이래로 자주 고난을 받으셨을 (여러번 피를 흘리셔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셨다. 세상 끝에 나타나셔서 마지막 대제사장이 되신 것이다. (9회말 투아웃에 대타로 등장하셔서 끝내기 홈런을 치셨다. 음 이것으로도 잘 설명이 안된다.) ‘큰’ 대제사장이 되셨다.

누구나 죽는다. 그 후에는 승패만 있다. (끝이 나면 결과가 따라온다.)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들이 승리하도록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다. 그리고 (죄인이었던) 많은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피로) 죄와 상관 없는 자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다시 오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늘 성소, 즉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도록 초청하는 것이다. 패자가 아니라 승자로 하나님 앞에 나가도록 초청하는 것이다. 그래서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한편으로 예수님을 나에게 모시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들이 지어져 가야하는 이유다.

 

히브리서 9:11-22

9장 첫부분에서 히브리서 저자는 첫언약은 육체의 예법이어서 개혁이 필요하다고 정리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이 개혁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한다. 새언약, 즉 하나님께서 생각에 넣어주시고 마음에 새겨준 율법을 주셨다.

새언약은 율법의 예법과 대비되는 마음의 예법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육체의 예법에 따라 지어진 성막/성전보다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이 온전한 성전에서 ‘큰’대제사장의 직무를 맡으신다고 설명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미 7장에서 ‘큰’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제물삼아 속죄제를 드렸다고 말했었다.

육체의 예법에 따라 이땅 성막/성전에서 드리는 속죄제사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드린다. 첫 언약인 육체의 예법에 따라 제사장이 된 아론의 자손들은 흠있고 유한한 존재였을뿐 아니라 그들이 뿌려야 했던 ‘피’ 역시 사람의 양심을 완전하게 해주지 못하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였다. 물론 한시적이었어도 염소와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로 육체를 정결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육체의 예법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는 ‘큰’ 대제사장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이 없는 자신의 피로 속죄제를 드렸다. 유한하고 무흠할 수 없는 염소와 황소의 피는 사람의 양심을 완전하게 (깨끗하게) 할 수 없지만 영원하고 흠이 없는 그리스도의 피는 사람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새언약, 즉 마음의 예법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마음의 예법의 중보자, 곧 ‘큰’ 대제사장 이시다. 그리스도는 첫 언약, 즉 육체의 예법으로는 완전히 깨끗하게 할 수 없는 죄가운데 있는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을 완전히 깨끗하게 하시려고 자신이 제물이 되시고 피를 흘려주셨다. 히브리서 저자는 새 언약, 즉 마음의 예법이 유효함을 (유언에 빗대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효력이 있다고 설명한다.

첫언약, 즉 육체의 예법도 피로 정결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송아지와 염소의 피를 언약의 피로 삼아 뿌렸던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유한하고 무흠할 수 없는 육체의 예법에 따른 언약의 피는 사람의 마음을 영원히 정결하게 할 수 없었다. 한시적이어서 반복되어야 했다. 율법, 즉 육체의 예법은 피흘림이 없이는 정결케 될 수 없다고 가르친다. 히브리서 저자는 육체의 예법, 즉 첫 언약의 원리가 마음이 예법인 새언약에도 그대로 반영된다고 하는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로) 율법을 육체의 예법에서 마음의 예법으로 완성하셨다.

정결한 마음을 구해야 하는 이유다.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성령을 거두지 말라고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은 나의 양심까지 정결케 하시는 예수의 피밖에 없다. 나를 정케하기는 예수의 피밖에 없네.

히브리서 9:1-10

히브리서 저자는 첫언약에 미련을 갖고 있는 독자들에게 첫언약은 육체의 예법이라고 다시 설명한다. (이에 반하여 새언약은 마음의 예법이다.)

먼저 첫언약에도있는 법과 성소에 대해 설명한다. 장막이나 성전이나 성소와 지성소는 휘장으로 분리되어있다. 지성소에는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언약궤가 있다. 언약궤 안에는 첫언약을 상징하는 만나항아리 아론의 지팡이 언약의 돌판이 있었을뿐이다. 언약궤위에도 영광의 그룹들의 형상만 있었을뿐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더이상 지성소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첫언약에 따라 세워진 제사장들은 성소에서만 하나님을 섬기는 예식을 행할 수 있었고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에 한번 들어가 자기와 백성들의 죄를 속죄했다. 즉 매년 첫언약을 갱신해야 했다.

히브리서 저자는 성령의 깨닫게 하심을 받아 첫언약은 성소와 지성소가 휘장으로 막혀있어 대제사장이라고 하여도 일년에 한번 첫언약 갱신때를 제외하고는 들어갈 수 없었음을 꼬집는다. 더군다나 대제사장이라고 하여도 흠이 없을 수 없고 유한하여 갱신이 필요없게 할 수 없다. (앞에서 마음에 새긴 새언약은 갱신이 필요없다.) 하나님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있지 아니하고 의와 평강과 희락인데 첫언약에 따른 섬기는 법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가지 씻는 것 등등 육체의 예법이요 첫언약에 따른 성막이나 성전은 건물일뿐이라고 한다. 개혁!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개혁을 이루신분이 ‘큰’ 대제사장 우리 주님이라고 앞에서 설명한 것이다.)

첫언약에 미련을 두고 있는 독자들에게 히브리서 저자는 첫언약은 개혁때까지, 다시말해 평생회원권을 받을 때까지 한시적으로 년회원권을 갱신하도록 한 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선호할 수있다. 주일성수도 일주일 한번 주회원권을 갱신하는 것일 수 있다. 일주일에 하루 십자가를 달고 나머지는 십자가를 떼어버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핑계로 멋대로 하는 삶. 육체에 속한 사람들의 꾀다. 첫언약에 미련을 갖는 이유다. 그러나 새언약은 일주일 내내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우리의 연약함을 핑계로 성령님께 의지하는 삶이어야 한다. 개혁이다. ‘큰’ 대제사장이신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할 수 있도록 (하나님게 담대히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주셨다. 아멘!

히브리서 8 (1-13)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에게 딱 알맞은(합당한) ‘큰’ 대제사장이 있다’ 는 것이 요점이라고 한다. 이 ‘큰’ 대제사장이 지극히 높으신 하늘 보자 우편에 앉으셨다고 한다. 우리 주님이 계신 하늘 보좌 우편이 성소요 참장막이라고 한다. 사람이 세운 성소와 장막은 참 성소와 참 장막이 될 수 없다. 유한하기 때문이다. 하늘 보좌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참 성소와 참 장막에서 우리 구원을 위해 간구 (제사) 드리신다.

땅에 있는 대제사장들은 예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리기 위해 세움을 받았다. 이들은 율법을 따라 예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이다. 이미 제사장들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땅에서는 굳이 제사장 직무를 맡으실 이유가 없었다. 땅에서 예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은 하늘에 있는 참 성소, 참 장막의 모형과 그림자인 모세의 장막과 성전건물에서 직무를 감당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더 아름다운 (위대한) 하늘에 있는 참 성소 참 장막에서 대제사장의 직무를 보신다. 율법으로 주신 모형과 그림자보다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를 드리시는 ‘큰’ 대제사장의 직무를 맡으신다. 땅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담당하던 레위 자손들은 무흠할 수 없었다. 그들이 유한하지 않고 무흠하지 않았다면 굳이 ‘큰’ 대제사상 예수님의 직무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불순종의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하여 새언약, 더 좋은 언약을 맺으시길 원하셨다. 왜냐하면 이스라엘과 유다가 옛언약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옛 언약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들을 돌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새언약을 맺으신다. 이번에도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언약의 주도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셔서 하나님의 법을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의 생각에 두시고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시겠다고 하신다. 이렇게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설정된다. 이렇게 하나님과 백성들은 서로를 안다. (하나님을 알고, ‘큰’ 대제사장 예수를 알면 곧 영생이다.) 이전까지의 불순종을 (불의를)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신다. 첫 계약의 불이행에 대해서는 아무런 죄값을 묻지 않으시겠다고 하신다. 아니 첫 계약은 없어졌고 무효라고 하신다.

히브리서 저자는 은연중에 첫 계약에 대한 미련을 버리라고 하는 것 같다. 마치 독자들이 첫계약에 집착하는 것처럼. 그러나 한시적으로 갱신을 거듭해야 하는 첫 계약은 없어져야 한다. 대신 더 좋은 새 언약을 지키라고  한다. 하나님을 힘써 알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에 더 관심이 많다. 첫번째 계약은 제사보다 젯밥인 축복으로 우리 눈이 돌아가게 한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그러니 하나님도 그런 백성을 돌보시지 않으신다. 그래서 새 언약을 맺으신다. 마음에 하나님의 언약을 새겨주신다.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젯밥이 아니라 제사(예배)가 보물이라고 가르쳐 주신다. 하나님과의 사귐, 즉 임마누엘이 복이라고 하신다. 우리로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하는 우리에게 딱 알맞은 (합당한) ‘큰’ 대제사상이신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