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7:20-28

율법에 따라 레위 자손, 그것도 아론의 자손들만 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유다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레위 자손 입장에서는 정말 쿠데타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시편 110편을 소환한다. (내가 가진 성경앱에서 멜기세덱으로 검색하면 창세기에 세번, 시편에 한번 히브리서에 10번 사용되었다고 나온다. 그 시편이 110편이다.) 시편 110편 4절 말씀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큰’ 대제사장이 되신 것은 하나님의 신탁, 그것도 하나님께서 맹세로 약속하신 것이라고 밝힌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새로운 약속,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인)이 되셨다. 쿠데타가 아니라 말씀의 성취다.

율법에 따라 레위 자손들이 제사장 직무를 맡지만 이들의 직무는 각자에게 한시적이다. 저들의 생명은 유한하기 때문에 제사장의 직무도 대대로 이어져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히 계신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사장 직무는 레위인 제사장들처럼 인수인계 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제사장 직무를 맡으신다. 그래서 예수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 그는 항상 살아계셔서 믿는 자들의 구원을 위해 간구하신다. 이런 ‘큰’ 대제자상이 우리에게 더 알맞다.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높은 하늘 보좌 우편에서 성부하나님과 교제하시면서 성도들을 위해 언제나 간구하는 ‘큰’ 대제사장이 예수님이시다.

레위 자손 제사장들은 저들도 죄인이라 자기 죄부터 속죄해야 백성들의 죄를 속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레위 자손 제사장들은 되풀이해서 속죄제들 드려야 했다. 즉 저들의 속죄제는 한시적으로만 유효했다. 그러나 ‘큰’ 대제사장 예수님은 단번에 (영생하시는) 자신을 제물 삼아 속죄제를 드렸고 다시 속죄제를 드리지 않아도 되었다. 레위 자손들은 연약한 중에 율법에 따라 각자 한시적 제사장 직무를 담당했으나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에 따라 영원하고 온전한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으셨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합당한, 딱 알맞는 ‘큰’대제사장이라고 설명한다. 그를 통하여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 그를 통하여 우리는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수 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나라의 왕이시요 하나님나라의 대제사장이시다.

구체적 적용은?

히브리서 7:11-19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즉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사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의 후손 모세(와 아론)를 통해 율법을 받았다.) 아론의 계보를 잇지 않고 멜기세덱의 계보를 잇는 다른 ‘한’ 제사장이 필요없을 것이라고 히브리서 저자는 반문한다. 그리고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으니 율법도 반드시 바꿔어져야 한다고 선언한다. 법이 먼저 바뀌고 직임이 바뀌는 것이 보통인데 직임이 바뀌었으니 법도 바뀌어야 한다고 한다. ‘쿠데타’가 아니고서야…

레위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에 속한 사람이 ‘큰’ 대제사장이 된 것이다. 우리 주님은 유다지파에서 나셨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이땅에 오셨다. 그런데 모세는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할 때 유다지파에 관련해서는 한마디로 한적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주님은 멜기세덱과 같은 다른 계보를 통해 ‘큰’대제사장이 되셨다. 즉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이 바꾸어졌다는 것이 명백하다.

우리주님이 ‘큰’ 대제사장이 되신 것은 육신에 속한 (사멸할) 계명, 즉 율법을 따른 것이 아니라,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른 것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인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말하면 멜기세덱의 계보를 잇는 제사장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제사장이라는 뜻이다. 율법을 통해 세워진 제사장직은 연약하고 무익했기 때문에 폐기되었고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하게 못하기 때문에, 율법은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하기 때문에) 더 좋은 소망, ‘큰’ 대제사장을 세워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새로운 법으로 바꾸셨다.

며칠째 등장하는 멜기세덱! 히브리서 저자는 집요하게 멜기세덱을 하나님의 계보에 연결시킨다.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으니 하나님이시다.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요 평강의 왕이니 의와 평강과 희락의 하나님나라를 다스리는 왕과 다름이 없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 주님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멜기세덱의 계보를 잇는 분이심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레위자손 대제사장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도록 일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년회원권’밖에 발급할 권한(법)이 없었지만, 멜기세덱 계보를 잇는 우리 주님은 ‘큰’대제사장이 되셔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평생회원권’을 발급하도록 법을 바꾸셨다. 우리는 회원자격만 유지하면 된다. 회원자격유지가 어렵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히브리서 7:1-10

히브리서 저자는 멜기세덱에 대해 설명한다. 멜기세덱을 살렘 왕, 즉 평강의 왕이요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한다. 멜기세덱은 여러 왕을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축복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전리품 전부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나누어 주었다.

멜기세덱은 의의 왕이요 살렘 왕, 즉 평강의 왕으로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고 설명한다. 결국 삼위 하나님의 현현이었다. 성자 하나님이 성육신 하시기 전에 이땅에 잠시 드러낸 모습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멜기세덱의 존귀함은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고 한다.

레위 후손들 가운데 제사장 직분을 받은 자들이 율법에 따라 형제들에게 십분의 일을 받게 되었지만 멜기세덱은 레위 후손이 아니다. 율법이전에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그를 위하여 축복했다. 당연히 높은 자가 축복하고 낮은 자가 축복을 받는다. 다시말하면 멜기세덱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보다 높다는 뜻이다. 레위인들은 죽을 자들이다. 그런데도 율법에 의해 십분의 일을 받을 권리를 가졌다. 하물며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 다시말해 죽지 않고 영생하는 자인 멜기세덱이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으니 결국은 하나님이시다) 십분의 일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한편으로 레위도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바쳤다고 할 수 있다. 레위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상속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는 우리들도, 왕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우리들도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바친 일에 참여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을 축복했듯이 우리도 아브라함이 받은 멜기세덱의 축복을 누리는 상속자들이다. 아니 멜기세덱 계보를 잇는 (하나님과 동등한) 더 ‘큰’ 대제사장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축복을 누리는 상속자들이된다.

하나님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바울은 로마에 편지했다. 하나님나라는 성령 안에서 멜기세덱(의의 왕, 평강의 왕)의 계보를 잇는 주님이 다스리는 기쁨의 나라다.

히브리서 6:9-20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머물러 있는 독자들을 강하게 책망했던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을 ‘사랑하는 자들아’ 라고 부른다. 그리고 히브리서 독자들이 ‘이보다 더 좋은 것’ 즉 가시와 엉겅퀴보다 더 좋은 (하나님의 복을 받는, 즉 구원의 복을 받는) 합당한 채소를 내고 있음을 확신한다고 안심시킨다. 그리고 불의하지 않고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가 더 좋은 것, 즉 구원에 합당한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사랑으로 성도를 섬길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심을 상기시켜준다.

히브리서 저자는 독자들과 함께 열심을 내서 끝까지 하나님의 복을 받는 소망을 누리자고 권면한다. 합당한 채소, 즉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 내는 것에 게으르지 않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약속하신 상속받는 자가되어 후대에의 상속자들에게도 본이되자고 한다.

히브리서 저자는 게으르지 않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상속자가된 아브라함을 예로 든다. 그런데 강조점이 아브라함의 오래 참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다. 아브라함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보다 더 큰 자가 없어 친히 하나님 이름으로 맹세하셨다고 한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시니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소망도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에 근거하기 때문에, 이 소망에 닻을 내리고 살면 하나님과 사귀어 살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가 가진 소망이 주는 안위다.

휘장안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이다. 큰 대제사장 성자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계보로 오셨다. 의의 왕의 계보다. 결국 의로우신 하나님에 의해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도 하나님과의 사귐을 나눌 수 있도록 휘장안으로 들어갈수 있게 해 주셨다.

더 좋은 것, 구원에 속한 것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안다면 오래 참음으로 소망을 이루어 가야한다. 소망을 주신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는 변함이 없다. 문제는 우리의 연약함이다. 우리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섬기는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우리도 오래 참음으로 약속에 따라 상속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한다. ‘성도의 견인’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에 근거하지만 성도의 오래참음을 요구한다. 휘장안으로 들어가신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야 한다.

히브리서 5:11-6:8

히브리서 저자는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멜기세덱’의 계보를 잇는다고 말했다. 멜기세덱이 누구인가? 1차독자들은 당연히 ‘멜기세덱’이라는 이름만 들으면 잘 알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독자들의 반응에, 독자들을 생각하고)히브리서 저자는 주춤한다. 멜기세덱에 관하여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멜기세덱’ 이름의 뜻은 ‘의의 왕’이다. 쉽게 생각하면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숨을 고르다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머물러 있는 독자들을 책망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선생이 되어있어야 할 독자들이 여전히 초보에 머물러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로 단단한 음식은 못먹고 (신령한) 젖을 여전히 먹어야 하는자가 된 것을 책망한다. 젖을 먹는 자는 의의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다. 침대에 누워 베드타임 스토리를 듣는 아이들처럼 상상의 나래를 펼 수는 있어도 현실에 적용할 수는 없다. 단단한 음식을 먹어야 지각을 사용하고 연단을 받아 현실에서 선악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라는 말만 붙드는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라고 권면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행실을) 회개하라고 한다. 하나님을 믿고 세례받고 안수받고 부활을 소망하고 심판이 있음을 상상속의 이야기로 가둬놓지 말고 현실 삶에 적용하는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고 명한다. 우리로 실천하라고 (들은 말씀은 실천하라고) 하나님께서 허락(인정) 하셨다.

말씀의 조명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의 도우심과 깨닫게 하심을 알아 하나님의 선한 말씀의 능력과 새로운 세상, 즉 하나님나라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하나님께 불순종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되어 회개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이런 자들에게는 ‘성도의 견인’이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성자 예수님을 멜기세덱의 계보를 잇는 ‘큰’대제사장으로 인정하지 않고 다시 제사를 드려달라고 그리스도를 모욕을 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하늘의 단비를 흡수하여 합당한 채소를 내어야 하는 사람들이다. 하늘의 단비를 맞고도 우리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것으로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할 수 밖에 없다. 우리 속에 있는 더러움으로 하나님께 원망과 불평을 한다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를 받고 불살라지게 될 것이다.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말씀을 듣기만 하고 내 멋대로 하는 자들에게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는 예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두렵다.